2004년 5월,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이 탄핵심판청구를 기각한 이후에 '민주화 세력'은 "이제 드디어 새로운 시대가 열렸구나!"하고 믿었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2004년 5월 봄의 감격은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실 나는 이 글을 작성하기 직전에 굉장히 부담스러웠다는 점을 밝힌다. "어우, 이렇게 긴 내용을 어떻게 쓰나!"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이가 없어서 맥이 탁 풀렸다. 전혀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거든. 무슨 말이냐면 2004년 5월부터 2017년 4월까지 상황을 설명하기가 너무나 간단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는 말이다. 2004년 5월부터 2017년 4월까지의 정치상황을 복잡하게 설명하려면 정말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하게 설명해야 할 거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 13년에 걸친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이라는 것이 너무나 간단하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1987년 이후 2004년까지 17년 동안 대한민국에 '민주화 세력'이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반대파가 보기에는 '빨갱이들'이었겠지만), 2004년 5월 이후에 보니까 '민주화 세력'이라는 그룹이 존재하지 않더라는 거다. 1987년 이후에(물론 뿌리는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대한민국이 구미 선진국을 닮아가야 한다"고 믿는 국민 개개인이 있었고, 이들이 필요에 따라서 힘을 합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개개인이 "대한민국이 구미 선진국을 닮아가야 한다"고 믿었을 뿐 이런 생각을 공유한 개개인이 서로서로를 각별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들은 그냥 개개인이 "대한민국은 구미 선진국을 닮아가야 한다"고 믿었지 이런 생각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뭉쳐서 대한민국의 서브그룹으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라도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 "전라도 사람들에게 '전라도 사람들과 전라도 빨갱이들을 모조리 때려잡아야 한다고 믿는 백색테러 국민들 사이의 공통분모인 우리 모두의 공동체 대한민국'의 발전에 헌신하여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핍박받은 恨을 승화할 기회를 부여하겠노라!" 이런 식으로 세상 만사를 보던 사람들이 2004년 5월에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이 탄핵심판청구를 기각했다고 하루 아침에 생각을 바꿀 수가 있겠는가? 이들은 스스로를 '민주화 세력의 일원'이라고 보지 않고 그저 자신을 '대한민국의 일원'으로만 보았다. 그나마 2004년 5월 이전에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통째로 날아갈 수 있다는 긴장감이 있어서 이들의 반목을 최소화할 수 있었지만 2004년 5월 이후로는 이런 긴장감이 사라진 상태에서 '민주화 세력'(사실은 '세력'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말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적습니다. 앞으로 민주화를 이어가려면 '세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를 받아들인 유시민이 참여정부 임기가 끝난 이명박 정부 시절에 어떤 책에서 참여정부의 문제점으로 '세력화하지 못한 점'을 들었지. 근데 유시민은 끝내 그걸 실천하지 못했다. 내가 2011년쯤에 이곳 서프에다가 '문찬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문재인+이해찬으로 이루어진 서브그룹'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같은 맥락이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다. 1987년 이후로도 '콘크리트 유권자들'은 1987년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상태였고 '기회주의적 유권자들'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2004년 5월 이후로 민주화 세력의 긴장감 이완에 따른 민주화 세력 내부의 내분이 벌어졌다. 그리고 2016년까지 끝도 없는 내분이 벌어졌다. '민주화 세력'이 힘을 합쳐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야겠다는 공감대는 2004년 5월 이후 13년에 걸친 혼란 끝에 2017년 4월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종걸이 문재인을 편드는 모습을 보면서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된 정도? 지난 13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삽질'을 하면서 겨우겨우 얻은 성과다. 덧붙이자면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2011년 관악을 후보단일화 당시였다. 그 당시에 통합진보당의 부정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멸망했을 거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결정적 계기는 2015년 5월 6일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유시민이 민주당 내 친노-비노 갈등의 허구성'을 이야기하자 온라인상으로 이 정보가 순식간에 퍼진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5월부터 2017년 4월 사이에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딱 둘만 들라면 나는 이 두 사건을 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