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7년 3월 25일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2017년 3월 하순에 숨쉬고 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지난 3월 3일에 이곳 서프에 올린 글에서 '2017년 3월 초순에 이곳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인류역사상 흔치 않게 저항권에 관해서 차분하게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라는 점'을 설파한 바 있다. 2017년 3월 하순에 대한민국에서 숨쉬고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상 흔치 않은 기회' 정도로 대단한 체험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래도 이 땅의 역사에서는 굉장히 색다르고 중요한 체험이라고 나는 본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2017년 3월 하순이 특별한 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2017년 3월 10일 박근혜가 파면당한 이후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뻔하디 뻔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뻔한 사실을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점에서 제대로 해석하는 것은 결코 '삼척동자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2017년 3월 10일부로 박근혜가 파면당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문재인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박근혜 탄핵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한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말은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틀린 말이다. 절반은 맞는다는 말은... 박근혜가 파면당했다는 사실은 역사책에 실릴 사건이다. 일간신문에는 날이면 날마다 정치관련 기사가 실린다. 그런데 이런 기사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은 10년은 커녕 1년만 지나도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은 1년, 10년 아니 30년이나 10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사건도 그 사건이 일어나던 당대에는 시사사건이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2017년 3월 10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2017년 3월 10일이 오기 전에도 박근혜가 속한 정치세력(자유한국당-새누리당-한나라당-신한국당-민주자유당-민주정의당-전두환의 신군부-민주공화당 및 유신정우회 등)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에 '해서는 안 될' 나쁜 짓을 많이 했다. 당장 2013년만 해도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는 헌정질서 파괴행위를 한 정치세력이 박근혜가 속한 새누리당 세력이었다. '2017년 3월 10일 이전까지는 잘 하던 새누리당 세력이 갑자기 망가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새누리당 세력은 원래 그랬다. 새누리당 세력이 원래는 잘 하다가 요 몇 년 사이에 새누리당을 구성하는 뭔가가 크게 망가져서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파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은 원래 그랬다. 변한 것은 새누리당이 아니라 '원래부터 늘 그랬던 새누리당 세력'을 대하던 '새누리당 반대세력'에서 일어난 미세한 변화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세한 변화'라는 것이 뭘까?

일단 2016년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야권에 참패했다. 새누리당이 야권에 참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박근혜 정권의 독주에 대한 염증이 번져서 새누리당에 대한 견제심리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견제심리가 생기기까지 이명박 정권 출범부터 계산하면 8년, 박근혜 정권으로만 따져도 3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스운 일이지만 이 기간 중 대한민국 국민 중 절반 이상은 '이명박-박근혜가 이끄는 선진민주국가 대한민국'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명박-박근혜가 속한 정치세력의 전신이 박정희-전두환의 독재를 뒷받침하던 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임을 모르던 국민이 있었나? 없었다. 국민들이 그걸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들은 "1970-80년대에 이들이 독재를 했던 것이 사실이고 인권유린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시대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할 일이고, 1980년대 민주정의당과 2010년대의 새누리당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증오에 눈이 멀어서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어리석은 자의 울분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도 대한민국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들 수 있다!" 이 정도로 생각했다.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새누리당 세력이 저지른 비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도 "그건 몇몇 사람들의 개인적 일탈이고 역사의 과정일 뿐이야, 저들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대표하지는 않아!" 하면서 외면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권 들어서 이런 자기기만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미세한 변화'란 이런 상황을 의미한다. 2008년-2016년은 이들의 이런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2017년 3월 10일은 이들의 이런 생각이 그르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못박은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포괄적이고 적절한 해석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들은 박근혜가 온갖 범죄를 저지른 증거가 차곡차곡 쌓일 정도로 분명해져서야 겨우겨우 박근혜를 쫓아낼 궁리를 했다. 이렇게 되기 전에 국민들이 '정치적 판단'을 통해서 박근혜와 새누리당 세력을 축출할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그런 기회를 모조리 놓치고 나서 박근혜가 임명한 헌법재판관들조차도 도저히 봐줄 수가 없을 정도로 '빼도 박도 못할 범죄증거'가 잔뜩 쌓인 뒤에야 박근혜를 쫓아냈다. 이것이 '대한국민의 위대함'인가? 나는 납득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민주국가였다면 이런 '빼도박도 못할 범죄증거'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국민들이 '정치적인 판단'을 해서 새누리당 정권을 응징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한국민은 그러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대한국민이 위대하지 않은 증거라고 나는 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박근혜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박근혜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직위에서 파면당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통해서 '이처럼 파면당할 짓을 한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로 밀어올린 세력(일반 유권자 포함)'이 이 책임을 덮을 방법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박근혜 파면'은 역사책에 실릴 사건이다. 이런 사건이 벌어진 이유는 박근혜가 대통령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로 올린 정치세력의 책임은 이제 은폐가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왜? 박근혜 파면은 역사책에 실릴 내용이니까! 이건 적당히 덮을 방법이 없다. "국민통합을 위해 박근혜 파면사실은 망각하자!"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나?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호응을 얻을 수가 없다. '중간에 쫓겨날 대통령을 자리에 올린 지지자들의 책임'도 역사학의 연구주제가 될테니까. 이제 박근혜 일파의 '콘크리트 지지'는 정치학의 영역이 아니라 역사학의 영역으로 승화해버려서 그들의 만행은 역사책에 새겨질 운명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문재인의 말은 절반은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절반은 틀렸다'는 나의 말은 무슨 뜻인가? 박근혜가 파면되면서 '민주진보개혁세력'이 한시름 놓은 것은 맞다. 박근혜가 대통력 직무에 복귀해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으면 그동안의 민주화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겠지. 하지만 일단 그럴 위험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직에 있는 것과 파면당해서 민간인 신분이 된 것은 천양지차가 나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자. 박근혜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대한민국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였나? '총풍사건'을 박근혜가 일으켰던가? 이명박이 일으켰던가? 박근혜 일개인을 문제삼지 않고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해보면 박근혜 한 명이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대한민국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다. 검찰이 장난쳐서 박근혜를 불기소하든지 하기라도 하면 어쩔건데? 그리고 설령 박근혜를 가볍게 처벌한다고 치자. 그것만으로 대한민국이 깨끗한 사회가 되나?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적폐세력을 쉽게 근절할 수 있나? 결국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박근혜 일개인만을 문제삼을 일이 아니라 박근혜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세력에 대해서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유력 대선주자라는 문재인의 모습을 보면 참... 문재인은 박용철 살해사건도 언급하지 않고, 개표조작논란도 언급하지 않던데 별로 믿음이 안 간다.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은 뭐 그렇다고 치자. 근데 지금같으면 설령 세월호를 잠수함이 들이받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채증할 방법은 없는 것 맞지? 장하다 문재인 ! 훌륭하다 문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