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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 프레임 전쟁과 과학 논쟁 (한겨레 오철우 기자)
논  쟁 
서구 중심의 냉전논리 속에서 제3세계는 세계3차대전의 뜨거운 희생양이 되어오고있다
  번호 200764  글쓴이 p  조회 222  누리 0 (0,0, 0:0:0)  등록일 2020-1-16 13:57 대문 1

라틴아메리카의 ‘뜨거운 냉전’
— 게릴라전, 내부냉전, 국가폭력의 교착

The ‘Hot Cold War’ in Latin America: Entangled Years of
Guerrilla War, Cold Civil War, and State Terror

박구병 | 아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라틴아메리카의 냉전시대는 미국과 소련 양국 간의 차가운 이념 대립이나 군사적 현상유지와 거리가 먼 장기내전과 격렬한 내부냉전의 시기였다. 냉전시대의 동서 이념 대립과 반목, 외세의 개입은 라틴아메리카가 겪은 기존의 정치적ㆍ사회적 긴장을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20세기 초 이래 라틴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적 팽창과 신식민지적 대응, 불안정한 지역정치는 냉전시대의 이념 대립을 계기로 더 치열하고 복잡한 양상으로 증폭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냉전, 긴장완화, ‘신냉전’, 탈냉전 국면을 관통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는 군부쿠데타, 게릴라 세력의 무장투쟁, 군부의 게릴라 진압작전이 끊이지 않았다. 그동안 쿠바혁명 체제의 존재는 실제보다 부풀려져 냉전의 발화점으로 여겨졌고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최근까지 냉전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50년대 중반 이래 미국의 개입전략은 라틴아메리카 내부의 좌우 분열이 장기내전으로 확대되고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의 반공주의적 군부정권이 이념적 억압을 강화하면서 반인륜적 국가폭력을 자행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국가폭력 사례가 빚은 내부냉전의 상흔은 미국과 유럽의 냉전 종식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While the United States and Soviet Union managed to avoid direct
military confrontation under the name of Cold War, Latin America
witnessed a series of local armed conflicts that would have prolonged
even after the end of Cold War in the West. During the Cold War era, EastWest ideological discord and the U. S. intervention as a kind of colonial
power escalated these preexisting local tensions into long civil wars in
Latin America. Since the early 1960s, Cuba has always been one of the
flashpoints in the Cold War and the U. S. sponsored covert operations of
subversion and anticommunist crusade of Latin American military regimes
in the 1970s and 1980s. It should be noted that the longevity and intensity of Latin America’s Cold War were outgrowths of its complex political
violence, for instance, long-running internal clashes, the persistent tension
between U. S. expansionism and Latin American nationalist response, and
the polarizing ideological conflicts.


key words 라틴아메리카 Latin America, 미국의 개입 U. S. intervention, 쿠바혁
명 Cuban Revolution, 장기내전 long civil war, 내부냉전 cold civil war, 뜨거운 냉전
hot Cold War, 콘도르 작전 Operation Condorr

서론

흔히 194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의 기간은 각기 상이한 체제모델을 지향한 미국과 소련이 가공할 만한 군사력을 보유한 채 양대 진영(two blocs)을 이끌면서 이념 대결을 펼친 냉전의 시대로 규정되었다. 이 시기를 주로 미국과 소련 사이의 국제정치적 대립 구도나 공포의 균형이라는 틀에서 파악해온 관행 덕분에 냉전은 큰 이견 없이 단일한 시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런 전통적인 양대 진영론에 따르면, 냉전시대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으로 거대한 강대국 정치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종식되었다. 또한 냉전사의 재인식을 시도한 존 루이스 개디스에게 이 시기는 일부 국지적인 대리전을 제외하고 ‘긴 평화’를 구가한 시대였다(Gaddis 1989; Gaddis 2002).

실전 없는 상태에서 공세적 봉쇄를 추진한 미국에게 냉전은 소련에 맞선 새로운 전쟁이자 20세기 전반의 두 차례 세계대전과 다른 형태로 전개된 ‘또 하나의 세계전쟁’이었다(최승완 2009, 333). 하지만 소련은 고르바초프 시대 이전까지 냉전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대신 ‘제국주의의 공세’를 강조했다(Westad2007, 2). 더욱이 냉전이라는 표현은 미국과 유럽 밖의 현실과 괴리가 컸다. 이 시기에 초강대국의 수준에서는 안정성과 부전(不戰)상태가 뚜렷한 반면, 제3세계 또는 남반부(global South)에서는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독립 또는 민족해방 투쟁, 상이한 종족 간의 마찰, 불분명한 경계선 탓에 불거진 충돌 등 다양한 방식의 열전(熱戰)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rne Westad)의 지적대로 냉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아시아.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는 지금과 다른 모습을 드러냈을지 모를 정도로 냉전이 제3세계의 진로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났다.

제3세계 지도자들은 대개 이데올로기적 선호와 헌신성에 입각해 두 초강대국 중 한 편과 긴밀히 협력하고 때로는 국민 대다수에게 재난에 가까운 악영향을 미치는 발전모델을 추종하곤 했다(Westad 2007, 3). 제3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냉전의 방식과 동기는 식민주의적 개입의 연장이나 저발전 지역에 대한 서양의 지속적 통제, 말하자면 ‘신식민주의’나 ‘신제국주의’로 받아들여질 공산이 컸다(Westad 2007, 5). 예컨대 미국의 개입이 빈발하고 불안정한 지역정치와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은 라틴아메리카의 냉전시대는 ‘긴 평화’와 대비되는 긴 전쟁의 시기였다(Brands 2010, 1-2).

라틴아메리카 냉전의 양상은 남반부의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좀처럼 차갑지 않았고 매우 폭력적이었으며 변화무쌍했다(Joseph 2008, 3; Coatsworth 2010, 221). 그렇다면 냉전을 부전 상태의 연속이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환원하려는 인식과 태도는 일종의 지배적 허구(dominant fiction)일 수 있다.1 그러므로 두 초강대국을 주축으로 한 포괄적인 지정학적 질서로서 냉전을 이해하고 서술하는 접근방식과 이미지화를 넘어 각 지역이 지닌 독특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좀 더 다양한 양태로 펼쳐진 냉전의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정치외교적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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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언급한 지배적 허구는 어떤 사회가 헤게모니를 이론화하는 방식으로서 해당 사회의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합의의 이미지’이다(Burgoyne 199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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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서 냉전 대립의 종식을 선언할 수 있을지라도 냉전적 사고방식과 문화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 그 내용과 구성 요소만 바뀌었을 뿐 세계화 국면에서도 냉전시대가 낳은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담론과 문화가 잔존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 글에서는 20세기 후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맥락을 검토하면서 그 지역이 겪은 냉전시대의 특성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II 미국 주도의 반공전선 대(對) 쿠바혁명

공산주의 진영의 확대를 봉쇄하려는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19개국은 1947년 8-9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근교에서 대륙의 평화와 안보 유지를 위한 회의를 개최하고 미주상호원조협약을 체결했다. 흔히 ‘리우협약’으로 알려진 이 협약서의 제3조에 따르면, “어떤 아메리카 국가가 내부 또는 외부의 공격을 받을 경우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위협당한 것으로 간주해 반격”할 수 있었다(Holden and Zolov 2000, 188). 뒤이어 1948년 3월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미주기구(OAS: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가 창설되어 안팎의 공산주의 위협에 공동 대처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반공전선이 정비되었다. 이에 따라 라틴아메리카는 어느 때보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1950년대 중반에 미국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등장 이래 추진해 온 ‘선린(善隣)정책’을 접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정치ㆍ군사적 개입을 재개했다.

1954년 6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에 힘입은 과테말라 군부의 쿠데타는 미국계 기업 유나이티드프루트(United Fruit Company)의 미개간지에 대해 수용(收用)을 추진하고 “공산주의에 관대”하다는 의혹을 산 중도좌파 정부를 무너뜨렸다(Gott 1999,9.5). 미국의 과테말라 개입과 군부 쿠데타는 훗날 ‘쿠바혁명의 두뇌’로 알려지게 될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Ernesto Che’Guevara)를 혁명가로 만든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과테말라에 체류하면서 이를 목격한 체 게바라는 ‘양키제국주의’와 라틴 아메리카의 과두지배 세력에 맞서는 무장투쟁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게 되었다. 미국 주도의 아메리카 반공전선이 강화되는 가운데 1950년대 말 ‘미국의 뒷마당’에서 발생한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뿐 아니라 전 세계 변혁운동 세력에게 큰 영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 이래 미국의 압박과 봉쇄에 맞선 쿠바의 외교정책은 비슷한 시기 베트남의 저항과 더불어 다른 지역의 투쟁에 자양분을 공급했다.

쿠바혁명은 1910년대 멕시코혁명, 1970년대 니카라과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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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898년 미국-에스파냐 전쟁 이후 에스파냐의 마지막 식민지인 쿠바는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미국은 쿠바 관타나모 만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 쿠바 헌법에 대한 ‘플랫 수정안’을 통해 언제든지 내정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미국은 이 수정안에 근거해 우호적인 정부를 유지하거나 미국인 투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했다. 특히 3조에 따르면, 쿠바 정부는 “쿠바의 독립을 보존하고 개인의 생명과 재산, 자유를 보호하기에 적합한 정부를 유지하고자 … 미국이 개입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해야 했다. 쿠바의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한 이 수정안은 ‘선린정책’으로 1934년에 폐기되었지만 관타나
모 만에 대한 미국의 장기 임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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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함께 20세기 라틴아메리카를 혁명의 대륙으로 아로새긴 게릴라 무장투쟁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다.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주도로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면서 친미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ívar)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 혁명세력은 애당초 ‘사회주의혁명’을 표방하지 않았다. 1956년 11월 쿠바 침투 작전을 앞두고 망명지 멕시코에서 정리된 ‘7월 26일 운동’의 선언에 따르면, 혁명세력은 민주주의 회복, 민족주의, 사회정의를 표방했다. 민주주의란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라는 링컨의 공식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으로서 입법ㆍ행정ㆍ사법부의 상호균형에 입각한 공화정과 민중의 주권 회복을 의미했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뜻하는 바는 독립적인 쿠바의 재탄생이었다. 명목상의 독립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까지 토지, 광물자원, 공공서비스, 금융기관, 교통수단과 같이 중추적인 경제적 기반이 대부분 외세에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종속상태의 극복과 쿠바인들의 이익증대를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쿠바혁명은 무엇보다 1895년
독립투쟁의 과정에서 사망한 호세 마르티(José Martí)의 이상과 실천을 계승하는 것이었다.3
카스트로를 비롯한 게릴라 대원 82명은 1956년 말 어렵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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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쿠바의 역사가들은 ‘백 년 동안의 투쟁’이라는 명제를 통해 ‘7월 26일 운동’ 세력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에 따르면, 1950년대 바티스타 독재에 항거한 혁명투쟁은 1850년대 나르시소 로페스(Narciso López)의 쿠바 해안 상륙 작전, 1868년(‘야라의 함성’)과 1895년(‘바이레의 함성’)의 항쟁, 그리고 1930년대의 저항을 면면히 계승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히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은 호세 마르티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항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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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동부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악지대에 거점(foco)을 확보하고 정부군에 맞섰다. 주요 지도자 일곱 명의 평균연령이 28세에 불과했던 청년 게릴라 전사들은 1958년 12월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끝내 1959년 1월 초 아바나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Wickham-Crowley 1992, 20). 그 뒤 혁명정부의 외무부 장관 라울 로아 가르시아(Raúl Roa García)는 1959년 9월 말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쿠바의 독립을 재천명하고 냉전에서 중립을 선언했다(Miller 1989, 69). 반미 노선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혁명정부가 쿠바를 사탕수수 위주의 농업생산과 과두지배 세력의 대농장 경영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경제체제의 변환을 모색하면서 미국인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토지개혁과 미국인 소유 자산에 대한 혁명정부의 국유화 정책에 맞서 1960년 10월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행정부는 금수(禁輸)조치를 단행해 혁명정부를 압박했다. 또 1961년 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한 뒤 미국의 영향 아래 있던 거의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쿠바와 단교했다. 곧이어 임기를 시작한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미국 자유주의의 상징적 인물이었지만, 그의 대외정책은 냉전의 흐름과 분리될 수 없었다. 1961년 1월 말 그의 취임 연설은 전적으로 외교적 사안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그는 쿠바혁명 이후 긴장감이 감도는 라틴아메리카를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국경의 남쪽에 있는 형제 국가들에게 우리는 특별히 서약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진보를 위한 새로운 동맹을 이루는 데, 다시 말해 자유로운 이들과 자유로운 정부가 가난의 사슬을 끊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 평화적인 희망의 혁명은 적대세력의 먹이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이웃에게 우리는 아메리카 대륙 어느 곳에서라도 벌어지는 침략과 전복 행위를 반대하는 데 그들과 함께 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과 그것을 통한 개발원조는 쿠바의 존재와 소련의 영향력을 의식한 경제적 지원과 이데올로기적 개입, 특히 군대와 경찰의 강화를 의미했다(Gleijesus2010, 346).

미국 정부는 1961년 4월 반(反)카스트로 세력 1,500명의 히론 해안4 침공 지원,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비롯한 수백 차례에 걸친 카스트로 암살시도 등 강경책을 지속했다.5 반면 1961년 4월 히론 해안 침공에 즈음해 카스트로는 쿠바혁명을 “가난한 자의, 가난한 자에 의한, 가난한 자를 위한 민주적이고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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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곳을 영어식으로 ‘피그스 만(灣)’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에스파냐어 코치노(cochino)는 ‘돼지’ 외에 ‘쥐치무리’를 뜻하기 때문에 문제의 지명은 적어도 ‘코치노스 만’으로 고쳐야 한다. 엄밀히 말해 반(反)카스트로 세력이 상륙하려던 지점은 코치노스 만의 히론 해안(Playa Girón)이었으므로 쿠바인들은 이 사건을 ‘히론 해안 침공’이라고 부른다.

5 다음과 같은 카스트로의 발언을 참조하라(Ramonet and Castro 2008, 282). “히론 해안 침공 후인 1961년 11월부터 1963년 1월까지, 14개월 동안 쿠바에 대해 5,780건의 테러가 발생했는데, 그중 717건은 우리의 산업설비에 대한 중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이로써 23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쿠바는 세계에서 테러리즘과 가장 많이 맞서 싸운 국가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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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적인 혁명”이라고 선언했다.6 이에 맞서 1962년 1월 말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에서 열린 미주기구 회의는 “아메리카 대륙의 어떤 국가가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고수하는 것이 미주기구의 설립 취지에 맞지 않고 공산권과의 동맹은 아메리카의 단합과 유대를 깨뜨리는 행위이므로 현 쿠바 정부를 미주기구에서 배제”할 것을 결의했다. 미주기구에서 축출되어 고립에 처한 쿠바의 혁명정부는 소련의 지원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미국의 개입에 대비하고자 소련
의 미사일을 배치한 뒤 1962년 10월 핵전쟁 일보직전의 ‘미사일 위기’7에 내몰린 쿠바는 냉전 대립의 단층선이 되었다. 당시 쿠바에는 쿠바군 병력 30만 명 외에 소련군 병사 4만 2천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군 지휘관은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모스크바에 자문을 구하지 않고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을 사용할 재량권을 지니고 있었다(Ramonet and Castro 2008, 304).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혁명을 전파하려는 의도에서 미사일을 배치했다고 밝혔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소련은) 카리브 해 지역을 간섭하는 미국에 대해 확고하고 효과적인 억제력을 확립해야 했다. 논리적인 해답은 미사일이었다. 미국은 항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50년대 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소련을 겨냥해 영국, 이탈리아,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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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아가 1961년 12월 카스트로는 마르크스ㆍ레닌주의자로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회주의 공동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노동계급의 선도성, 과학적 유물론 등을 명시한 1976년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사회주의로의 전환 선언은 실제법적인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7 쿠바식으로는 ‘10월 위기’이고 소련에서는 ‘카리브 위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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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했기 때문”이었다(Gaddis 2010, 111-112). 결국 미국의 쿠바 간섭 중단과 소련의 미사일 철수, 그리고 미국이 터키에 배치한 주피터 미사일의 철수 등에 관해 상호 양보와 극적인 타협이 이뤄져 일촉즉발의 위기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는 쿠바의 의사를 타진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었다. 카스트로는 이렇게 밝혔다(Diez Acosta 2002, 178-179; Ramonet and Castro2008, 306).

우리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양보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우리는 주권을 지킬 권리가 있다. 흐루쇼프는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미국이 터키에서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하면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겠다고 했다. 10월 28일에 케네디는 그 타협안을 수락했다. … 우리가 보기에 전혀 옳지 않은 결정이었다. 우리는 분개했다.

카스트로는 쿠바가 협상에 참가했더라면, 더 유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8 예컨대 관타나모에 미국의 해군기지가 남아 있지 않았을 수 있고 미국은 쿠바 영공에서 첩보비행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카스트로의 시각은 ‘미사일 위기’를 냉전의 틀이 아니라 미국과 쿠바의 역사적 관계라는 틀에서 파악하려는 것이었다(Munton and Welch 2007, 9). 위기 직후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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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당시 쿠바 정부가 제시한 요구조건은 경제 봉쇄와 모든 상업적ㆍ경제적 압력의 중
단, 무기와 폭발물 투하, 용병 침투, 간첩과 파괴 활동가 침투 같은 모든 전복 기
도 행위의 중단, 미국과 푸에르토리코 기지에서 출항하는 해적 행위의 중단, 영공
과 영해 난입의 중단, 관타나모 해군기지와 미국이 점령한 쿠바 영토의 반환 등 5
개 조항이었다(Diez Acosta 2002, 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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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소련의 공식적인 관계는 예전과 같은 신뢰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카스트로는 안보와 불안정한 경제사정을 고려해 소련과의 우호관계를 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Diez Acosta 2002, 183,200). 소련은 쿠바가 수입하는 석유를 전량 공급했고 쿠바 사탕 생산량의 절반에 이르는 분량을 구입했다(Miller 1989, 89)

‘미사일 위기’는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허세를 부려선 안 될뿐 아니라 위기관리보다 위기회피가 훨씬 중요하다는 교훈을 각인시켰다. 그리하여 핵무기 취급방법에 대한 합의의 필요성을 인식한 미국은 대립 자체의 종식이라기보다 대립상태의 관리・규칙을 확립하려는 차원에서 소련, 중국과 핵무기 경쟁의 제한이나 군비경쟁 축소, 긴장완화(데탕트)를 추진하고자 했다(Garthoff 1989,185-186; Gaddis 2010, 118, 271). 곧이어 양국 간에 핵실험 금지, 긴급연락망(핫라인) 구축, 민간교류 증진 등이 논의되었다(Nathan1988, 328; Hershberg 2010, 85). 하지만 쿠바의 관점에서 볼 때 안보에 대한 위협은 중단되지 않았다. 달리 말해 초강대국과 제3세계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라틴아메리카는 긴장완화의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다(Diez Acosta 2002, 197, 201; Harmer 2011,39-46).
III 라틴아메리카의 군부독재와 국가폭력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4년 6월 중도좌파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과테말라 군부의 쿠데타를 지원하면서 종래의 라틴아메리카 개입정책으로 복귀했고 1958년 무렵까지 내부 안보를 유지하려는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의 군대에 연간 1억 달러를 투입했다(Joseph 2010, 405). 이런 상황 속에서 1954년 8월 쿠데타에 성공한 파라과이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Alfredo Stroessner) 장군은 향후 35년 동안 억압적인 통치를 전개했다.

미국이 20세기 내내 라틴아메리카 군부독재 체제의 지원본부 역할을 맡은 반면, 혁명 이후 쿠바는 ‘반제국주의 혁명의 수출 기지’이자 아메리카 전역의 긴장을 조성하는 동인으로 간주되
었다. 1980년대 이전 쿠바혁명 체제는 이상주의적 환상(1959-60), 갈등과 타협(1961-65), 국제적 연대(1966-67), 평화공존(1968-75)등 대외관계 전략의 네 단계를 거쳤는데, 쿠바혁명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게릴라전을 가장 중요한 혁명 실천전략으로 인식했다(Moreno and Lardas 1979, 40).

체 게바라의 게릴라전쟁론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성숙하기를 기다리기보다 과감한 결단력을 지닌 소수의 전위 집단이 혁명적 상황을 이끌어내고 “무장투쟁을 통해 제2, 제3의, 아니 수많은 베트남을 만들어내며 제국주의 세력의 전면적 파괴를 모색”하고자 했다(Harmer 2013, 63). 그리하여 쿠바혁명은 군부정권의 탄압에 반발한 과테말라의 일부 군 장교들과 저항세력이 1960년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산악지대에 거점을 마련한 뒤 1996년 말까지 장기내전을 전개하는 데 도화선을 제공했다. 또 1961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Frente Sandinista de Liberación Nacional)’과 1979년 엘살바도르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FMLN: Frente Farabundo Martí para la Liberación Nacional)’ 등 게릴라 단체의 출범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무장투쟁에 바탕을 둔 혁명전략은 각 지역의 조건에 따라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웠고 1960년대 일부 지역에서 소련의 평화공존론에 동조하는 공산당 지도부와 쿠바혁명의 지지세력 사이에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아울러 쿠바혁명은 대안적 발전모델을 제시하면서 세 대륙 연대(tricontinentalismo)의 증진에 기여했다.

1966년 1월 아바나에서 개최된 ‘아프리카ㆍ아시아ㆍ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세 대륙 연대회의’는 공식적인 식민통치가 끝난 뒤에도 지속되는 초국적 자본과 서양 열강의 사회경제적ㆍ문화적 지배에 대항해 반제국주의 투쟁을 위한 국제주의를 강조했다. 이 회의는 대체로 사회주의 진영에 우호적이었지만, 소련이나 중국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비동맹의 성격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Neuner 2004, 122).

반면, 쿠바혁명의 성공과 확산에 대한 우려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군부의 정치개입 형태는 뚜렷하게 바뀌었다. 예컨대 브라질의 군부는 1945년과 1954년 두 차례의 쿠데타를 통해 교착상태에 빠진 정국에 개입해 권력을 장악하는 대신 특정 민간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병영으로 복귀하는 전통적인 중재자의 역할에 충실했으나 1964년부터 1985년까지는 직접 정국을 통제했다. 앨프리드스테판(Alfred Stepan)에 따르면, 1964년 브라질 군부가 직접 통치자로 정치개입의 형태를 바꾼 것은 새로운 직업화, 즉 국가안보에 관한 직무 영역의 확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Stepan 1973, 52). 특히 쿠바혁명 이후 국가안보의 영역이 확대되어 외부의 적뿐 아니라 내부 급진세력의 위협을 차단해야 한다는 의식이 직업적 전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면서 군이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한층 더 높아졌다.

미국 정부는 1964년 브라질 군부의 주앙 굴라르(João Goulart) 민선 정부의 축출을 방관하거나 1973년 9월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인민연합 정부를 무너뜨린 칠레 군부의 쿠데타를 후원했다. 게다가 일부 친미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으면서 여러 국가에서 1970-80년대에 억압적인 군부독재 체제가 지속되는 데 기여했다. 사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아옌데의 집권 이전인 1970년 9월 중순에 이미 “아옌데가 집권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든지 권좌에서 축출하려는” 중앙정보국의 공작을 승인했다(Kornbluh 2004, 37).

1970년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자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진기록을 남기면서 라틴아메리카 좌파에게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 준 아옌데는 쿠바혁명정부와 유사하게 단기간 내에 적극적인 소득재분배 정책을 추진했다. 또 칠레의 구리, 석탄,강철산업과 민간은행뿐 아니라 국제전화전신(ITT)이나 포드와 같은 외국계 회사의 일부를 국유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민간기업 부문의 불만이 고조되고 미국의 방해공작에 막혀 경제사정은 악화되었을 때 미국 중앙정보국과 초국적기업들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이 주도한 칠레 군부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했다. 이로써 쿠바혁명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성취하려던 아옌데의 희망은 무너졌다.

권좌에 오른 피노체트는 1990년까지 반대자들에게 가혹한 철권통치를 펼치는 동시에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로 알려진 미국 유학파 경제학자들을 등용해 대외개방과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옹호자들에게 피노체트는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칠레를 건져내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국가의 수호자였다. 하지만 피노체트의 군사독재는 초법적 살해를 포함해 3천 건이 넘는 인권침해 사례를 양산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위협’뿐 아니라 칠레 민주주의의 전통까지 파괴했다. 남아메리카 군부독재의 표본으로서 피노체트의 ‘공포통치’와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1976-83)은 믿을 수 없는 현실과 지우기 힘든 상흔을 남겼다.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는 수상 연설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에서 라틴아메리카의 “거대하고 고삐 풀린 현실” 탓에 자신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강조하면서 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적 단면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송병선 1997, 189-190).

약 2천만 명의 라틴아메리카 아이들은 채 두 살이 되기 전에 죽었고 이는 1970년 이후 유럽에서 출생한 모든 아이의 수효를 상회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정치적 이유로 실종된 이들은 12만 명에 육박합니다. 이는 마치 스웨덴의 웁살라 시에서 모든 주민의 행방을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임신 중에 체포된 많은 아르헨티나 여인들이 감옥에서 출산했지만 아직 아이들의 신원과 행방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칠레에서는 백만 명, 즉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이들이 조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문명국이라 자부하던 인구 250만 명의 작은 나라 우루과이에서는 다섯 명 가운데 한 명꼴로 망명을 떠났고 1979년 이래 엘살바도르의 내전으로 20분마다 한 명꼴로 피난민이 늘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강제로 이주하거나 망명한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노르웨이보다 인구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한편, 미국과 소련의 긴장완화 국면에 쿠바는 국가 간의 연계를 중시하면서 좀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을 선택하는 동시에 여전히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국제적인 혁명운동을 후원했다
(Gleijesus 2010, 343; Harmer 2013, 69). 이는 다른 제3세계의 운동을 지원하는 훨씬 더 공격적인 정책을 통해 독자적인 혁명의 원칙을 방어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Westad 2007, 175-176). 1968년 여름 소련의 프라하 침공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쿠바의 승인 탓에 이런 국제적 지원과 파병을 소련의 대리인 역할로 파악하는 경향도 있지만 이는 단순한 추정이다(Miller1989, 91).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신냉전’의 기류가 감지되기 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쿠바의 앙골라 파병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쿠바의 아프리카 개입은 쿠바의 독립성, 국제적 연대와 혁명적 이상주의의 표출로 보아야 할 것이다(Neuner 2004, 118, 121; Gleijesus2010, 343, 345).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서아프리카의 앙골라가 내전에 휩싸이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유지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군대가 루안다(Luanda)를 점령하고자 1975년 10월 내전에 개입해 국제분쟁으로 확대되었을 때, 쿠바의 혁명정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앙골라에 3만 6천 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1977년 3월 루안다를 방문한 카스트로가 선언했듯이, 이는 “라틴아프리카 국가”로서 쿠바의 임무, 달리 말해 쿠바와 아프리카간의 역사적 연대의 극적인 표현이었다(Neuner 2004, 124). 이들은 1976년 3월 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마지막 병사가 앙골라를 떠날 때까지 ‘앙골라민중해방운동(MPLA: Movimento Popular de Libertação de Angola)’을 지원했다.9


IV 장기내전과 내부냉전의 격화

1. ‘추악한 전쟁’과 ‘콘도르 작전’

1970-80년대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브라질, 과테말라, 페루 등지의 군부통치자들은 기존 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국내 반대자들을 소련과 쿠바 같은 적대국의 사주를 받아 체제 전복을 노리는 ‘불순분자’로 규정하고 조직적으로 탄압했다. 재판에 회부하는 대신 혐의자들을 납치, 고문, 심지어 살해하는 등 초법적인 국가폭력을 자행하기도 했다. 예컨대 1976년 3월 아르헨티나 군부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재건과정’에 돌입했지만, 이는 잔혹한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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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98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군대가 앙골라에 다시 침입했을 때 5만 5천 명의 쿠
바 병사가 앙골라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1988년 12월 아프리카 서남부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1991년 5월에 마지막 쿠바군 병력이 앙골라에서 철수했다
(Ramonet and Castro 2008, 35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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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폭력의 대명사가 된 ‘추악한 전쟁’이었다. 대(對)게릴라 작전의 명목으로 공식 통계상 최소한 9천 명의 실종자를 낳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추악한 전쟁’은 내부냉전의 촉진제라 할 수 있는 국가안보론의 소산이었다. 라틴아메리카 군부독재 정권의 ‘불순분자’ 탄압은 매카시즘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적색공포 조성, 사회주의를 위협하는 ‘내부의 적’ 소탕을 표방한 스탈린의 정치폭력과 함께 대표적인 내부냉전의 사례였다(최승완 2009, 346-347). 라틴아메리카의 군부독재 정권이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순분자’로 지목한 이들은 주로 정치적 좌파 또는 급진적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였다(McSherry 2010, 112). 더욱이 이 ‘추악한 전쟁’은 국경을 넘어 대륙 차원의 공조 작전으로 확대되었다. 1970년 11월 남아메리카 각국의 군부독재 정권이 공동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콘도르 작전(Operación Condor)’은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들을 체포하며 고문하고 살해하기까지 하는 비밀정보ㆍ작전체제였다. 반공주의적 군부정권은 ‘콘도르 작전’을 통해 좌파세력의 위협에 맞서 ‘기독교적 문명’을 방어하고 ‘제3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자 초국적ㆍ전대륙적 차원에서 초법적 폭력의 기제를 확립하려 한 것이었다(McSherry 2005, 1). 이는 ‘내부의 적’에게 자행한 ‘산업적 탄압(industrial repression)’이었다. 즉 나치가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저지른 행위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미리 계획되고 체계적이며 오래 지속된 군사작전으로서 제노사이드로 규정될 만했다(McSherry
2010, 109).

또한 아르헨티나 군부는 1980년 7월 볼리비아의 군부 쿠데타에 대한 지원을 비롯해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국가안보론을 확산시키면서 얼마간 미국의 후원자 역할을 분담했다(Armony2008, 134, 143). 개입 사실을 인정한 호르헤 비델라(Jorge Videla)장군에 따르면, “남아메리카에 쿠바와 같은 실체가 등장하는 위협을 좌시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1981년 11월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제14차 아메리카대륙 군회의에서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레오폴도 F. 갈티에리(Leopoldo F. Galtieri) 장군은 모든 혁명세력을 ‘테러분자’로 규정할 것,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복행위에 맞서 백방의 수단을 강구할 것, 통합적인 정보센터를 설치할 것이라는 세가지 기본 방침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981년 파나마시에 소재한 아르헨티나 대사관은 정보와 군수의 핵심거점으로 기능했고 60명 이상의 무관이 상주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군부는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의 군 장교들에게 고문 기술을 전수하고 각종 훈련을 실시했으며 산디니스타 정권에 맞서려는 ‘니카라과민주연합-니카라과혁명무장군(UDN-FARN)’, 즉 일명 콘트라(Contras, 반혁명군)를 지원했다(Armony 1997, 129-130).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은 자국의 내전에 개입한 아르헨티나 군사고문 120여 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2. 장기내전과 제노사이드

1980년대 내내 코스타리카를 제외한 중앙아메리카 곳곳에서는 내전이 끊이질 않았다. 니카라과에서는 1979년 7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Anastasio Somoza Debayle)를 축출하고 40년 넘는 가족세습 독재정권을 타도했다. 이는 쿠바혁명 이래 라틴아메리카 게릴라 세력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지만, 옛 국가방위군의 잔존세력을 규합해 소모사의 아들이 주도한 작전에 미군과 온두라스 군이 개입하면서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의 국경지대에서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산디니스타 체제를 포위하고 그 영향력의 확대를 봉쇄하려는 미국과의 적대적 반목과 콘트라의 반혁명 시도는 니카라과의 혁명체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Grandin 2004, 187). 1990년 선거의 패배로 산디니스타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성공적인 문자해독 캠페인, 후속 교육 프로그램의 제도화, 실업률과 유아사망률의 감소, 평균수명 증가, 전염병 퇴치, 생활수준 상승 등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지만, 미국의 언론은 대체로 산디니스타가 이끈 니카라과를 빈곤에 허덕이는 국가로 묘사하곤 했
다(Randall 1995, i).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행정부가 인권외교를 내세우며 반공 독재정권에 대한 일방적 지원에 제동을 걸기도 했지만, 곧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강력한 반공정책에 자리를 내주었다.10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이 쿠바를 출발점으로 삼아 니카라과와 이웃 국가들에 침투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 밝혀진 정치적 추문대로 레이건 행정부 시절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85-87년에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던 무기수출 금지 대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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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한 라틴아메리카 정책의 청사진에 관해선 “아메리카 대륙이 공격받고 있다”는 산타페 위원회의 보고서를 참조하라(Holden and Zolov 2000, 289-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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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콘트라를 지원하는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레이건이 ‘자유의 전사’로 지칭한 콘트라는 미국의 자금 지원을 받아 내륙의 협동조합, 학교, 보건진료소와 기타 정부기관들을 파괴하거나 민간인들을 살해함으로써 산디니스타 정부가 효과적인 관리와 방어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농민들의 동요를 부추기려 했다(Grandin 2010, 28). 더욱이 중앙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과테말라는 1980년대 초 군부정권의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기 전부터 외세 개입과 군부 쿠데타, 그리고 군부와 반란세력 사이의 장기내전을 겪었다. 과테말라 군부는 엘살바도르의 경우와 유사하게 선택적인 암살과 납치, 고문, 성폭행, 마을 전체의 파괴와 강제이주 등의 전술을 구사했다. 여러 곳에서 수백 명의 학생, 노조 지도부, 지역 공동체 활동가들이 친정부 준(準)군사단체에 의해 희생되었다. 공식 통계만 해도 1960년부터 1996년까지 지속된 내전에서 5만 2천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전쟁고아는 약 25만 명에 이르렀으며 약 15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과테말라 군부는 ‘쿠바와 니카라과 공산주의 세력’의 간섭에 맞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고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면서 1980년대 초 농촌 지역에서 게릴라 세력의 지지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비무장 원주민들을 표적으로 삼았다(Sieder 2001, 164; Grandin 2004, 188, 193). 군부가 고지대의 원주민들을 게릴라 세력의 실제적 또는 잠재적 지지집단, 말하자면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면서 폭력의 성격과 강도가 뚜렷이 변했고 내전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CEH 1998, 39).

14만 건이 넘는 살인과 실종 사건의 73%, 희생자의 80%가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Romeo Lucas García)와 호세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José Efraín Ríos Montt) 장군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때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은 카터 행정부의 무기판매 금지조치를 해제하면서 제노사이드를 자행한 리오스 몬트 장군의 반공정권에게 경제ㆍ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행정부 차원의 상이한 정책 기조와 더불어 미국 정부 기관간의 상충하는 지원정책이 과테말라 내전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중앙정보국은 과테말라 군부의 게릴라 진압 작전을 지원하면서 원주민 농민들의 정치 활동을 억압한 반면, 개발원조 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는 더 많은 정치적 발언권을 갖게하고자 농민 지도자들의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했다(Easterly2011, 490).

과테말라 내전의 희생자 중 83%가 마야 원주민이었고 나머지 17%는 라디노(ladino, 혼혈인)였다. 이는 냉전시대의 정치적 이념이 어떻게 생물학적이면서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지녔는지, 그리고 냉전의 정치사와 끔찍한 대량학살의 역사를 왜 분리할 수 없는지 입증했다(권헌익 2013, 57). 이 제노사이드는 군부의 억압적인 반공정치가 대다수 원주민들을 ‘비(非)시민’의 지위로 강등시킨 인종차별과 배제의 산물이었음을 알려 준다(권헌익 2013, 188). 평화협
정이 체결된 뒤 조사활동을 벌인 역사규명위원회(CEH: Comisio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orico)의 보고서는 마야 원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인종차별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겪어 왔고 그런 내부 식민지에 대한 배제의 역사가 장기내전의 핵심적 요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V 민주화 이행기 내부냉전의 잔존과 미국-쿠바 관계의 변화

1. 1980-90년대 내부냉전의 여파

1980년대 초중반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잇단 민주화 이행에 이어 1990년대 초중반에 과테말라, 니카라과, 엘살바도르의 내전 종식을 위한 중앙아메리카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과 ‘파라분도마르티민족해방전선’은 게릴라 단체에서 합법적인 정치세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냉전 종식의 서막으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예컨대 콜롬비아는 현재까지 50년 넘게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랜 기간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그동안 약 60만 명의 사망자와 5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강제이주민이 발생했고 마약거래 관련 활동과 자금이 정부와 반란세력 모두의 토대를 뒤흔들며 공공영역을 지속적으로 무너뜨리고 있다(Adelman 2002, 66). 1960년대 중반에 창설된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de Colombia)’은 1990년대에 접어들어 정부군이나 우익 준군사단체에 맞설 자금을 확보하고자 마약거래, 불법 금 채굴, 요인 납치에 가담한 뒤 부유하지만 악마적 속성을 지닌 반정부 게릴라 세력이 되었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2001년 9월 11일 이전부터 미국중앙정보국에게 국제 테러조직으로 낙인찍혔으나 인구가 많지 않은 동남부 농촌지역을 여전히 통제하고 있다. 6개월에 걸친 평화회담 끝에 2013년 5월 말 정부와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이 토지개혁을 통한 농촌의 발전 방안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반란세력의 무장해제와 정치참여 보장, 불법 마약거래 근절, 평화협정 이행 등 중요한 협상 의제가 산적해 있다.

1990년대 민주화 이행을 겪은 칠레에서 피노체트 정권이 남긴 악명 높은 내부냉전의 후유증과 상흔은 어떻게 후속세대에게 갈등과 분열을 대물림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피노체트 정권은 정치적 탄압으로 강력한 반대자들을 양산해낸 반면, 1970년대에 일찍 도입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경제실적의 호조 때문에 국내외 기업계의 지지를 받았다. 퇴임 후 육군 총사령관직과 면책특권이 보장된 종신 상원의원직을 유지한 피노체트가 집권기의 인권유린 혐의로 1998년 런던에서 연행되어 조사를 받다가 500여일 만에 칠레로 돌아왔을 때, 공항에서 그를 맞이한 두 집단의 대립적인 양상은 칠레가 겪어야 할 숱한 논란과 갈등을 예증했다.

198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민주화 이행과 ‘추악한 전쟁’의 청산 과정에서 되살아난 ‘두 악마론’ 역시 내부냉전의 여파를 여실히 드러냈다. ‘두 악마론’은 국가폭력과 좌파 테러리즘을 등치시키면서 군부독재 지속에 대한 책임의 절반을 게릴라 세력에게 돌렸다. 이에 따르면, 좌파 게릴라집단의 테러행위가 ‘아르헨티나반공동맹(AAA: Alianza Anticomunista Argentina)’과 같은 극우단체들의 폭력을 부추겼고 이런 충돌과 혼란이 군부의 정치개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군부는 국가안보의 수호를 위해 3만 명에 이르는 ‘불순전복세력’을 응징해야 했다고 역설한 반면, 인권단체들은 게릴라 대원의 수를 200명 이하로 추산하고 이들이 아르헨티나 사
회를 크게 위협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두 악마론’은 군부독재와 인권침해의 책임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지연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민선정부는 여전히 강력한 군부의 반발을 의식해 사법적 심판 절차를 서둘러 마무리하거나 사면법을 제정함으로써 가해자들의 집단면책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게릴라 세력의 과오 역시 엄격한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론을 존중하더라도, 실제 엇비슷한 두 세력 간의 전쟁이아니라 초기 단계부터 군부의 비대칭적 타격과 진압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화 이행기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정책의 만조기와 일치했다. 미국과 유럽의 탈냉전 국면에 앞서 라틴아메리카에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열풍이 밀려든 까닭은 무엇보다 대공황 시기 이래 국가관리 경제체제의 적폐와 심각한 외채위기 탓이었지만, 군부독재 시기 좌파의 파괴와 분열 탓이기도 했다. 1980-9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유행, 범죄와 사회적 폭력의 만연은 냉전시대의 역류이자 정부의 전통적인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어 지배층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탈바꿈한 결과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Joseph 2010, 410; Brands 2010, 6-7).

2. 쿠바혁명 체제의 내핍과 미국-쿠바 관계의 전망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는 1980년대 초부터 이념적ㆍ정치적 이탈자뿐 아니라 생활고에서 벗어나려는 평범한 이들의 대규모 탈출을 지켜보아야 했다. 탈출의 물결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 뒤 1992년 1월 1일에 쿠바정부가 선포한 ‘평화 시의 특별시기’에 더욱 거세졌다. 1989년 81억 달러에 이르던 쿠바의 국내소득은 ‘특별시기’에 크게 감소해 1993년에는 20억 달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무역거래와 원조가 뚜렷이 감소함에 따라 생필품의 부족이 심각해지고 국가 자원의 개인적 유용같은 불법적 생존 방식과 암시장이 출현했을 때, 쿠바정부는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유인책 제공, 달러화의 합법적 유통, 관광 활성화, 대규모 국가농장의 협동조합화, 완전고용 정책의 중단, 제한적 범위의 상품 판매 허용, 자영업과 농민시장의 확대 등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 관행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단교 조치 이후 쿠바는 동서 대립의 단층선이 되었고 1959년 이래 쿠바를 이탈한 바티스타 일파와 군장교 같은 반혁명 세력, 수십만 명의 중상류층, 전문직업인들은 미국 플로리다 남부에 집단 거주지를 조성하고 쿠바의 혁명체제와 ‘장거리 내전’을 벌여왔다(Jatar-Hausmann, 1999, 132). 1962년 4월 민주당 상원의원 제임스 W. 풀브라이트(James W. Fulbright)는 카스트로가 이끄는 체제를 가리켜 “미국의 골칫덩이(몸에 박힌 하나의 가시)일 뿐이지 심장에 겨누어진 대검이 아니다”라고 언급했지만(스미스 2010,219), 미국 정계의 보수 강경파는 국가안보를 내세워 ‘뒷마당’에 있는 적대세력의 위협을 과장해왔다. 이에 따라 쿠바 이탈 망명자들은 확고한 정치적 지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Neuner 2004, 125). 그동안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적성국가에 대한 미국의 강공책은 지속되었고 포용정책은 요원해 보였다.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은 실제 소련이 해체된 뒤 더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2년 토리첼리 법과 1996년 헬름스-버튼 법은 쿠바혁명을 뒤집으려는 마지막 시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쿠바민주주의 법’으로 알려진 토리첼리 법은 제3국에서 설립된 미국계 자회사들이 쿠바와 교역할 수 없다는 것, 국적에 관계없이 교역을 목적으로 쿠바에 입항했거나 쿠바의 항구를 떠난 선박에 대해 쿠바 출발일로부터 180일 동안 미국 입항을 금지한다는 것 등을 명시했다. 또 헬름스-버튼 법은 쿠바혁명으로 손해를 입은 이들, 즉 쿠바의 현 정부가 몰수한 재산의 옛 소유자인 미국 시민들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두 법 모두 쿠바 출신 미국인들의 이해관계를 적극 반영한 것이었다(Jatar-Hausmann,1999, 136).

소련 해체 뒤 ‘특별시기’에 극도의 내핍생활에 적응해야 했던 쿠바인들은 정부를 지지하면서 미국에 대한 불신감을 키웠다. 하지만 금수조치가 발효되는 가운데 2003년에 미국이 쿠바의 최대 식량 공급국이 되는 역설적 상황이 펼쳐졌고 쿠바에 대한 미국의 농산물 판매는 2004년과 2005년에도 지속되었다(Ramonet and Castro 2008, 379). 또 미국인의 70% 이상이 경제봉쇄에 반대할 뿐 아니라 유엔총회에서 쿠바에 대한 봉쇄정책에 반대하는 국가가 점점 더 많아져 2005년에 180개국을 넘어섰다.

쿠바 정부가 외국인 투자, 달러 유통, 자영업 허용 등 제한적인 국가자본주의 단계를 거쳐 2008년 이후 전면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복귀하는 동안 미국에서도 협상을 통한 쿠바문제의 해결책이 선호되었고 200만 명에 가까운 쿠바계 미국인 사회의 인구 구성 비율이 변화함에 따라 예전과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쿠바계 미국인 사회에서 헬름스-버튼 법에 대한 관심과 이해관계가 덜 중요한 젊은세대의 비율이 늘었고, 미국의 제한적인 송금조치와 쿠바정부의 여행자유화 정책에 힘입어 쿠바를 떠난 이들과 쿠바에 남은 이들의 뚜렷한 경계가 좀 더 흐려졌다. 향후 쿠바의 자유화가 좀 더 진전되고 망명자들의 보복욕구도 약해지면서 언젠가 모두 ‘장거리 내전’을 끝낼 방법을 모색하게 되리라 예견되는 가운데 2014년 12월 17일 미국과 쿠바의 대통령은 양국에서 동시에 TV생방송을 통해 54년 가까이 지속된 적대관계의 극적인 전환을 공표했다.

양국 정부는 관계개선의 걸림돌로 작용해온 정치적 수감자 문제를 맞교환 방식으로 처리하고 외교관계의 정상화를 전격 선언한 뒤 현재 정부 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1961년 1월에 양국 관계가 단절된 뒤 태어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수십 년의 고립정책이 민주적이고 번성하며 안정적인 쿠바의 출현을 촉진하려는 미국의 지속적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고 밝혔다. 친형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게릴라 대원으로 출발해 혁명정부의 요직을 거친 쿠바혁명의 1세대 지도자 라울 카스트로(Raúl Castro) 대통령은 봉쇄조치가 조속히 끝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역사적인 양국 관계의 정상화 조치에 대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는 기꺼이 환영하고 있다. 쿠바계 미국인 가운데 65세 이상은 41%가 외교관계의 재개에 찬성한 반면, 18-29세의 찬성률은 88%에 이른다.

2013년 초부터 캐나다 정부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중재 아래 바티칸에서 진행된 비밀회담의 성과로 알려진 이 역사적 전환은 라울 카스트로가 지적한 대로 양국 간의 큰 차이를 인정하는 첫 걸음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오바마 행정부는 이 전환을 미국의 패배 인정으로 여기는 플로리다 출신 쿠바계 상원의원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와 차기 대통령 선거에 관심을 보이는 젭 부시(Jeb Bush) 등 공화당 의원들의 공세를 비롯해 외교관계 정상화를 ‘불량국가 쿠바의 잔혹한 독재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배신’으로 비난하는 보수적 여론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VI 결론

라틴아메리카의 냉전시대는 미국과 소련 양국 간의 차가운 이념대립이나 군사적 현상유지와 거리가 먼, 기나긴 내전과 격렬한 내부냉전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동서 진영의 이념 대립과 반목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무장투쟁으로 비화되어 결국 냉전시대를 부전 상태가 아닌 장기 실전의 시기로 바꾸고 취약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물어뜨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냉전시대의 동서 갈등과 외세의 개입은 라틴아메리카가 겪은 기존의 정치적ㆍ사회적 긴장을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20세기 초 이래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적 팽창과 신식민지적 대응, 불안정한 지역정치는 냉전시대의 이념 대립을 계기로 더 치열하고 복잡한 양상으로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미국과 유럽의 냉전 종식은 라틴아메리카의 장기적이고 복잡하게 얽힌 갈등을 끝낼 수 없었다. 이런 점을 감안해 그랜딘과 조셉은 라틴아메리카의 장기냉전을 1898년 미국-에스파냐 전쟁이나 1910년 멕시코혁명 무렵까지 끌어올려 ‘혁명의 세기’로 재인식할 것을 제안한다(Grandin and Joseph 2010).

미국과 유럽의 냉전, 긴장완화, 1979년 이후 ‘신냉전,’ 그리고 탈냉전 국면을 관통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는 군부쿠데타, 게릴라 세력의 무장저항, 군부의 게릴라 진압작전이 그치지 않았다. 그 중심에 라틴아메리카의 소국 쿠바가 있었다. 쿠바는 베스타가 강조하듯 냉전이 없었더라면 현재와 매우 다른 면모를 갖추게 되었을 가능성이 큰 본보기로서, 성공적인 반식민적 저항과 미국의 개입이 어떻게 뒤얽히는지 잘 보여주었다(Westad 2007, 6).

쿠바혁명 체제의 존재는 실제보다 부풀려져 냉전의 발화점으로 여겨졌고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최근까지 장기지속적인 냉전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미국과의 단교 이후 쿠바가 단지 소련의 대리인이나 종속국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쿠바의 혁명체제는 미국의 봉쇄정책이나 소련의 국제주의 노선 수정에 직면해 경제 모델의 수립이나 대외정책에서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했다(Miller 1989, 103; Nuener 2004, 112, 118). 예컨대 1970년대 중반 앙골라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쿠바의 개입은 이상주의와 국제적 연대에 근거한 자발적 결정이었다.

미국의 노골적인 콘트라 지원으로 혁명체제의 안정화를 이루지 못한 채 1990년 권좌에서 물러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향후 행보 역시 1979년 이래 니카라과혁명의 성격뿐 아니라 냉전시대의 특성을 면밀하게 되돌아 보길 권고한다. 1990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니카라과 정계에서 야당으로 자리매김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2006년 선거를 통해 재집권했다. 오랜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호세 다니엘 오르테가(José Daniel Ortega) 대통령은 1980년대에 비해 훨씬 더 온건하고 다양한 정치이념을 포용하려고 했다. 이런 행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정치적 전략과 접근방식의 수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지만, 냉전시대의 대립지향적 인식과 관행 탓에 민족주의적이고 자주적인 정치세력에 부과된 지나친 이념적 덧칠이나 왜곡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이래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전략은 라틴아메리카 내부의 좌우 분열과 정치적 불안정성이 장기 내전으로 확대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냉전시대 미국의 개입 근거는 식민 제국의 팽창 논리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랜딘은 이를 ‘마지막 식민주의적 학살’로 파악한다(Grandin 2004).

미국의 개입이 유발한 긴장상태는 여러 지역의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불거진 갈등을 군사적 충돌로 상승시켰다. 과테말라의 내전은 1960년부터 36년 간 지속되었고 콜롬비아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오늘날까지 50년 이상 게릴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70년대 미국 정부는 ‘콘도르 작전’이라는 ‘추악한 전쟁’의 초국적 확대 공작을 음성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아르헨티나 군부는 국가안보론의 대외 수출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미국의 후견 역할을 얼마간 분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냉전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여긴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의 반공주의적 군부정권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해 이념적 억압을 강화하면서 반인륜적 국가폭력을 자행했다. 아르헨티나 군부의 ‘추악한 전쟁’이나 과테말라 군부의 원주민 학살은 냉전의 이념적 대립과 내부 식민지에 대한 차별이 결합된 최악의 국가폭력이었다. 실제 비대칭적인 타격에 가까웠던 내부냉전의 상흔은 심각했다. 게다가 1980년대 중반 이래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유행하면서 범죄나 사회적 폭력이 줄어들지 않은 것은 예전 정부의 광범위한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어 지배층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변모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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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구병 Park, Koobyoung
아주대학교 사학과(Department of History at Ajou University) 교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학사, 미국 LA 소재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역사학 박사
논저 「살리나스의 네오포퓰리즘: 멕시코의 신자유주의 전환과 국민연대프로그램(PRONASOL)의 특성」, 「아르헨티나와 과테말라의 과거사정리 현황과 시사점」.
이메일 kbpark@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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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개는 몽둥이로 ! > - 대구박씨 -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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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2-27 19:45
201698
중남미 전선에 새겨진 조선 / 통일담론자료12 (1) 개굴이네 집 288
35
5
02-27 18:17
201697
(만적+反놈 필독) 전작권 논리면 유럽은 미국의 괴뢰... (19) 강먹척결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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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02-27 17:42
201696
< 공병호tv에 공병호였읍니다 > - 대구박씨 -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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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2-27 16:10
201695
북 "조선 동해 심층수 산업적 가치 높아...현대해양산... (2) 와룡잠호 12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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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 16:05
201694
4성 장군의 대저택이라는데..박탈감 쩌네요.. (2) 별4개 43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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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 13:01
201693
바이러스로 겁 에 질린 멍청이들은 불쌍한 양들이다 (3) 팩트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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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02-27 12:31
201692
ㅌ.ㄷ의 외연 / 통일담론자료11 (2) 개굴이네 집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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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02-27 10:45
201691
우한폐렴과 대구코로나 (5) 김동지 567
30
19
02-27 07:33
201690
조선소년단 그리고 조선인민과 녀성들의 정의의 위업 매국노처단국 12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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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 03:39
201688
사회주의 우리 국가의 불패의 위력 만방에 떨치리 매국노처단국 10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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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 03:27
201686
코로나로 "하나" 된 한중일 moreno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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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02-27 02:00
201685
제8장 반일의 기치높이 5. 마촌작전 매국노처단국 68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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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 01:20
201684
< 박인수, " 노인과 개는 어디로 떠났을까 " > - 대구박씨 - 51
0
4
02-27 00:30
201683
미국, 생물무기연구와 인간에게 생체실험 진실을 캔다 (3) k1 754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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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18:59
201680
유엔사 "코로나19에도 북측과 24시간 직통전화 유지" (5) moreno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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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14:30
201679
북 “자력갱생,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선... (1) 와룡잠호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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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14:07
201678
시진핑 주석, 빌 게이츠에 회신 “코로나19 지원에 감... (1) moreno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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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10:56
201677
< 선사시대의 관점에서 론해 봄 > - 대구박씨 -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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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06:54
201676
제8장 반일의 기치높이 4. 극단적군사민주주의를 론함 매국노처단국 113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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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06:43
201671
중국의 일대일로전략과 러시아의 관세동맹 구분 8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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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02:13
201670
< 헛껍떼기들에 불과 ! > - 대구박씨 - 6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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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02:08
201669
일대일로전략/통일담론자료10 (3) 개굴이네 집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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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02-25 23:20
201668
모세의 십계명 (1) 구분 102
5
24
02-25 21:29
201667
북한 노동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씹대 원칙 (2) 구분 86
5
29
02-25 21:27
201666
김형직은 아편상이었을 수밖에 없다. (129) 강먹척결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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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5 21:25
201664
중국, "한일과 코로나 19 다국적 확산 저지 원해" 北 ... moreno 109
0
9
02-25 20:32
201663
김일성+김정일도 클린턴+부시한테 속았다 아이가? (9) 反코딱지아재 9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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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5 16:30
201662
[펌] 평양은 지금 손전화·택시·쇼핑 붐 (구분+대위+... (6) 反코딱지아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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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5 16:15
201661
신천지교회, 전광훈먹사에게서 주 예수를 만날수 있나 (1) 막차 207
20
9
02-25 15:43
201660
트럼프+오바마 출생지 논란 / ‘수령 김성주’는 평양... (55) 강먹척결 333
0
49
02-25 13:02
201659
제네바 UN군축회담, 한-미 찰떡 공조와 조선의 결심 (4) 개굴이네 집 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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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02-25 09:29
201658
반드시 대학살 동반한다 - 대구박씨 - 191
0
4
02-25 08:58
201657
제8장 반일의 기치높이 3. 동녕현성전투 매국노처단국 8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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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5 05:54
201656
베네수엘라의 배고픔과 이스라엘의 굶주림 (1) 개굴이네 집 381
45
5
02-25 03:28
201655
주체사상이 내세운 <철학의 근본문제> (2) 나침판 18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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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5 01:11
201654
북한 핵은 전쟁용이 아니고 김씨보호용이다!!! (5) 구분 107
0
34
02-25 00:21
201653
미국을 대신해 시리아 내전의 정리에 매진하는 러시아 (2) moreno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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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21:59
201652
친미극우 북빠척결 아재가 놀라 자빠질 얼굴 사진들 (19) 反對강먹척결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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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21:58
201651
코로나는 문통 말대로 종식 되었다,...그런데 (1) 알아서뭐하게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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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21:10
201650
< 박인수, " 특정 력사의 누락에 대하여 " > - 대구박씨 -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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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20:39
201649
‘수령 김성주’가 강반석+김형직 아들이 맞아? (28) 강먹척결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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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16:12
201648
1,2차 인혁당 사건 / 통일담론자료9 (3) 개굴이네 집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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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12:02
201647
우한 코로나 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 압박용 저먼곳에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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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12:00
201646
[개벽예감 383] 평화통일과 무력통일의 갈림길 지났다 (1) 와룡잠호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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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11:58
201645
조선의 대구경 조종방사포는 핵탄두와 고폭탄두 겸용... (3) 막차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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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09:59
201644
코로나 는 언론 플레이 저먼곳에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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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09:51
201643
김일성을 키운 손정도가 건국할 기독교 나라 그리고 ... (18) 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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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09:37
201642
일본과 김일성 사이의 이중 스파이 지순옥 입을 통해... (4) p 13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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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09:29
201641
2020년에 세계를 뒤흔들 조선의전망 매국노처단국 507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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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08:00
201640
제3세계 눈으로 미제패권 파헤친다 매국노처단국 17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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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07:32
201638
제8장 반일의 기치높이 2. 오의성과의 담판 매국노처단국 5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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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 04:11
201637
개한미국의 역사는 ??? 개쌍도 89
5
5
02-24 04:08
201636
< 박상후, " 지금 이스라엘에서는 " > - 대구박씨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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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2-24 03:16
201635
김일성이 씹쌔끼가 공화국을 다 말아처먹었다 (17) 구분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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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3 23:38
201633
아마디네자드의 귀환 갈리바프 (1) 개굴이네 집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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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3 22:50
20163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개조지나 공화국이다~ 씨팔... (2) 구분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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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3 22:48
201631
<특별 기고> 한미동맹, 이제는 끝내야 한다. 매국노처단국 12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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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3 21:07
201630
< 유전자제거법 발포 > - 대구박씨 - 76
12
4
02-23 18:11
201629
제8장 반일의 기치높이 1. 리광 매국노처단국 112
55
4
02-23 09:18
201627
코로나 19, 미국과 중국이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바이... (1) 와룡잠호 469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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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3 09:12
201626
한미조약과 북소,북중조약에 관한 단상 (4) 구분 152
0
49
02-23 02:54
201625
< 박상후, "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쳐나온다." >... - 대구박씨 -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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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02-23 02:32
201624
자력갱생을 고수하는 한 불법벌목은 계속된다 (2) 구분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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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3 01:03
201623
5.18 광주/통일담론자료8 (16) 개굴이네 집 457
40
10
02-22 22:45
201622
WHO 코로나 바이러스,,,북한 보건성과 긴밀히 협력” (2) moreno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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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16:41
201621
< 축처라 하지 않고, 축첩이라 하였다.> (1) - 대구박씨 -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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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16:07
201620
미국, 그 입술에 묻은 피 (3) 개굴이네 집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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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02-22 13:21
201619
유엔, 한국NGO 대북 의료지원사업 제재 면제 (2) moreno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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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13:19
201618
김동진 판사? (k1+막차+moreno+종북참수 필독) (10) 反對극문꼴통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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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13:01
201617
북조선 賃金+物價 미스터리? (음+구분+대위+882 필독) (11) 反對종북참수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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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12:51
201616
북 노동신문, 불법 벌목·상행위 공개비판…"간부들 ... (3) moreno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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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09:53
201615
이란의 코로나 발생 소식을 듣고 (1) 와룡잠호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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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09:12
201614
민족해방전쟁과 분단고착화기도/통일담론자료7 (5) 개굴이네 집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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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08:10
201613
Norman fucking Rockwell (1) greater blue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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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
She's A Rainbow (2) 경칩속도위반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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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
<개벽예감 382>무혈속결전의 새로운 전술이 완... (2) 매국노처단국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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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
< 박인수, " 너희들은 헛것을 보고 있다 ! " > - 대구박씨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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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회고록-제7장 인민의 세상 5. 백마에 대한 추억 매국노처단국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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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 박인수, " 력사는 반복된다." > - 대구박씨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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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01:06
201606
한·미 상호 방위 조약 (3) 구분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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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구분 4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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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00:24
201604
조·소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구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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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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