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과 해리 트루먼 ①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7-16)
아베 고다이阿部幸大
1987년생. 도쿄 대학 문학부 학사, 석사. 뉴욕 주립대학 박사 학위 취득. 쓰쿠바 대학 인문 사회계 조교, 미일 문화사 연구자.
『완전히 새로운 아카데믹 글쓰기 교과서』 『내러티브 피해학』 등의 저서가 있다.
*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3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 The ‘Forgotten’ War
1951년 10월 5일, 『U.S. 뉴스 & 월드 리포트』에 실린 「Korea : The ‘Forgotten’ War」라는 제목의 기사는 한국 전쟁의 운명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며 언제 끝날지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한국에서의 전쟁을 미국인들은 점차 잊어 가고 있다고, 기사는 진단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한국에서의 전쟁은 아직 ‘기억’과 ‘망각’이라는 이분법으로 논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었다. 그 전쟁은 종결되기는커녕,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 기사로부터 2년 뒤인 1953년, 한국 전쟁은 남북 분단을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러한 결말을 낳은 것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 협정(armistice)이었다. 한국 전쟁은 끝나기도 전에 ‘잊힌 전쟁’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했고, 결국 ‘잊힌 전쟁’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것이 어떤 전쟁이었는지조차 정작 잊히고 만다.
사실 이 전쟁은 미국의 군사사에서 가장 이야기하기 곤란한 전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굳이 한국 전쟁을 이야기하려는 사람이라면, 화려한 ‘좋은 전쟁(Good War)’으로 기억되는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역사에서 ― 군사사가 아니라 미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 최대의 오점으로 남은 베트남 전쟁 사이에 끼인, 이 낯선 극동의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의 ‘희미한 존재감’을 으레 언급하게 마련이다.
3만 명 이상의 미국인과 100만 명 이상의 한국인․중국인 사망자를 낸 이 전쟁은, 결국 개전 전과 거의 같은 북위 38도선이 휴전선이 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고, 그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연히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이를 축하하는 사람들이 타임스스퀘어에 모이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곧 ‘휴전’을 의미했으며, 이 전쟁에서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한국 전쟁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이 ‘잊힌 전쟁’이라는 호칭이, 마치 미국인들이 한국 전쟁을 한때는 기억했다가 훗날 망각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며 비판한다. 커밍스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전쟁을 한 번도 기억한 적이 없다. 그것은 ‘잊힌’ 전쟁이 아니라, ‘아무도 몰랐던’(Never-Known)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를테면 Good War라는 호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왜곡된) 기억을 형성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Forgotten War라는 호칭 자체도 한국 전쟁의 (왜곡된) 기억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 전쟁은 ‘잊힌’ 전쟁으로, 망각해야 할 전쟁으로,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는 전쟁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실제로도 바로 그런 전쟁으로 기억되어 온 것이다. 우리는 한국 전쟁을 새롭게 이야기할 방식을 마련해야 한다.
■ 전쟁에서 방위로
한국 전쟁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제2차 세계대전 말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45년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은 대통령직을 승계하지만, 루스벨트 집권 3기였던 1944년, 미주리주 출신 상원의원이자 부통령 후보였던 그는 주간지 『Collier's』에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신의 섭리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그러나 “1941년 12월의 사건”(진주만 공격)이 그 신념을 근본부터 뒤흔들어 놓은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우연과 행운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일본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도 진주만 공격을 막지 못한 원인은 군 지휘 계통의 책임 분산과 육․해군의 협조 부족에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Our Armed Forces Must Be Unified」(군은 통합되어야 한다)고 붙였다.
전후 트루먼은 대통령이 되어 이 구상을 실현한다. 1947년 국가안전보장법에 서명하고, 미군의 각 군을 국가군사기구(NME: National Military Establishment)라는 이름 아래 통합했다. 육군성, 해군성, 새로 창설된 공군성, 그리고 합동 참모 본부는 모두 국방부 장관 제임스 포레스탈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다. 또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 National Security Council)와 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도 신설되었다.
그리고 2년 뒤, 국가안전보장법 개정으로 NME는 오늘날의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로 개칭된다. 여기에는 중대한 레토릭 전환이 있었다. 이 일련의 개편은 150년 이상 존속해 온 미국의 전쟁부(Department of War)를 폐지하고, 이를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로 재편하는 과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사이에 미국의 ‘전쟁’은 ‘방위’로 전환된 것이다.
이제 미군의 군사 행동은 ‘전쟁’이 아니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다양한 레토릭으로 잇달아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작은 전쟁’(small war)이었으며, ‘한정 전쟁’(limited war)이었으며, ‘실험 전쟁’(experimental war)이어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진정한’ Big War와는 차원이 다른 작은 전투에 불과했다. ‘냉전’(Cold War)이라는 명칭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이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군사 행동에서는 아시아에서 아무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전쟁조차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Good War인 것을 마음으로부터 믿을 수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Goodness’라는 정당성이 갈수록 흔들리게 된 전쟁 국가 미국에, 그것은 더없이 편리하면서도 꼭 필요한 레토릭 전략이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선전 포고를 하지 않는다. 다만 윌슨도 루스벨트도 그랬듯이, 군사 행동에는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트루먼 정권은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를, 자국의 전쟁을 평화와 동일시하는 미국 특유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평화를 침해하는’(breach of the peace) 침략국으로 규탄하는 결의를 채택하게 하고, 유엔군 창설을 결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군사 행동의 주체는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유엔군으로 전환되었고, 한국 전쟁은 의회의 승인을 요하는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유엔의 평화 유지 활동이 되었다. 윌슨이 제창하고 루스벨트가 발전시킨 국제 평화를 위한 조직인 유엔이 미국의 전쟁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새삼 놀라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 끝없는 전쟁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의 덕을 봤다. 유럽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있었고, 그 파시스트 정권들과 손잡고 태평양에서 날뛰던 극동의 섬나라는 진주만 공격이라는 폭거까지 감행했다. 전쟁 국가 미국은 이후 자국 군사 행동의 윤리적 정당성을 보증해 줄 이처럼 명료한 ‘악’으로 여겨지는 적을 계속해서 찾게 된다. 그 악으로서의 적은 세계의, 정확히는 미국이 규정하는 세계의, 공통의 적이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파시즘에서 찾을 수 있었던 악으로서의 적이, 냉전기에는 공산주의가 되고, 21세기에는 테러리즘이 된다. 이리하여 적은 국가가 아니라 이념이 되었고, 적이 이념인 이상 그 패배의 기준 또한 불분명해졌다. 따라서 거기에는 승리도 없고 끝도 없다.
트루먼 정권이 한국 전쟁을 ‘경찰 행동’(police action)이라고 정의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미국은 세계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 활동에는 당연히 끝이 없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세계 각지에 군사 기지가 필요하며, 평화의 방위가 본연의 임무인 이상, 미국이라는 경찰은, 길을 가는 수상한 사람을 검문하고, 필요하면 심문하며, 때로는 고문할 권리와 책임을 지닌다.
여기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 대두한 preparedness라는 논리는 비로소 세계적 규모로 완성된다. 이것이야말로 라틴어로 ‘미국의 평화’를 뜻하는 ‘Pax Americana’라 불리는 시대의 구조였다. 그 ‘평화’의 실태는 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영속 전쟁’(permanent war)이었으며, 그 토대를 마련한 것이 바로 아직 끝나지 않은 한국 전쟁이었다.
■ 대리전쟁과 내전
그런데 유엔 안보리가 북한을 ‘평화를 침해하는’ 침략국으로 규정했을 때, 실제로 북한은 사실상 국경 역할을 하던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승인과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통상적인 역사 서술에서는 이 침공을 한국 전쟁의 시작으로 본다.
어쩌면 오늘날 일본 대중의 상상 속에서 러시아․중국․북한이라는 이 트리오는 가장 ‘세계의 악’에 가까운 조합일 것이다(최근에는 여기에 이스라엘이 첨가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역사 이해에 따르면, 북한이 ‘치안’을 교란했고, 그 피해국인 한국을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이 지원했다. 한국 전쟁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애초에 북한이 넘었다는 38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어 놓은 경계선에 불과했다. 그런데 미국은 왜 그런 선을 그었을까. 제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전후 처리를 미국이 사실상 단독으로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남으로 ‘침공’했을 때, 그것은 과거 일본에 침략당했던 하나의 국가였던 조선 땅에,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선의 지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미국인이 그어 놓은 ‘국경’이라는 허구를 넘어섰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이 목표한 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하나였던 조선이라는 조국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것이 침략 행위가 되어 버린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미국의 분할이라는 외적 요인 때문이었다. 냉전기의 미국 전쟁 대부분은 대리전쟁이었다. 다시 말해, 각 전쟁 지역의 당사자들에게 동족을 죽이도록 강요한 내전이었다.
이 일을 일본인들이 좀처럼 상상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후 일본이 다행히도 분할 통치를 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이 경험한 것은, 비유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이 동일본과 서일본으로 분할되어 각각 소련과 미국의 점령을 받고, 자유로운 왕래가 금지된 가운데, ‘이렇게 가족과 생이별한 채로 있을 수는 없다’라며 일본을 되찾고자 한 세력이 군사 행동에 나섰다고 상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또는 통일을 위해서는 동포를 죽여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심정은, 한국 전쟁의 ‘특수’ 덕분에 대부흥을 이룬 구제국 일본으로서는 아무리 애써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탄생한 북한이라는 국가가 세계의 악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