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를 살아서 견디며
‘재일 유학생 날조 간첩 사건’ 반세기 여행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2-03)
나카무라 일성中村一成
1969년생. 재일 한국인. 전 마이니치 신문 기자. 자유 계약 저널리스트.
『목소리를 새긴다 : 재일 무연금 소송을 둘러싼 사람들』 『르포 교토 조선학교 습격 사건 : ‘혐오 범죄’에 맞서서』 『르포 사상으로서의 조선적朝鮮籍』『영화로 보는 이민/난민/인종 차별』『우토로 여기서 살고, 여기서 죽는다』『오늘에 저항하며 :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등의 저서가 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한강)
군사 정권하였던 1970년대부터 1980년대 한국에서, 재일 한국인 유학생과 상공인이 ‘북의 간첩’으로 되어 검거되는 ‘조작 간첩 사건’이 계속 벌어졌다.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1975년 ‘11.22’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되는 이정표를 새기는 연속 집회가 지난해 11월 21일과 22일 이틀간,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에서 민주화와 평화 통일, 일본의 조선학교 지원 등에 열중하는 19개 단체가 주최하고, 재일 교포 피해자로 구성된 ‘재일 한국 양심수 동우회’ 등 8개 단체가 주관했다. 국가 폭력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대다수는 재심 무죄를 이뤘다)이 한국의 활동가와 다른 곳도 아닌 한국에서 함께 자리한다. 게다가 윤석렬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령’(내란)을 시민의 힘으로 저지한 지 곧 1년이 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집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위로’와 ‘경사’로 한결같이 진행되지 않았다. 저류에 있는 것은, 오히려 ‘이제부터가 중요한 고비’라는 기개와 긴장감이었다.
그것은 집회 종료 뒤, 재일 교포 전 사형수 강종헌(1951년생, 재심 무죄)의 말로 상징되고 있었다.
“정권을 타도하는 시민 사회의 힘은 고귀하지만, 방심하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우리는 근본 모순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척도로 삼아 ‘현재’를 끊임없이 갱신해 나가는 실천 위에서만 사회는 ‘진보’한다. 이 보편적 진리를 몸으로 살아낸 사람이 발한 ‘사상의 언어’였다.
■ 한국 군사 독재 정권하의 재일 유학생
‘조작 간첩 사건’이 한국에서 급증한 시기는 1972년 이후이다. 사회에 ‘북의 위협’을 선전하고, 군사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노림수였다. 38선이 없는 일본에서, 재일 교포가 조선총련 관계자와 관련을 맺는 일은 일상이다. 한국의 사정에 어둡고, 한국인과의 연결고리가 약하다는 점마저 이용당했다.
피해자의 대다수는 차별 사회 일본에서 정체성으로 고민하다, 마음을 굳히고 ‘조국’으로 건너간 ‘유학생’이었다. 영장도 없이 구속하고, 그다음은 고문이다. 심한 구타, 주전자로 억지로 물을 먹여 불룩해진 배를 밟는다. 얼굴이 위로 향하게 묶어 놓고 얼굴에 물을 계속 끼얹는다. 성기에 고압 전류를 흘려보낸다…. 대개의 고문 수법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 독립운동가에게 사용한 수법이었다.
당사자에 대한 폭력만이 아니다. 동우회 대표로 전 사형수였던 이철(1948년생, 재심 무죄)은 증언한다. 고문에 굴하지 않고 ‘혐의’를 부인하는 이철에게, 취조관은 “‘그러면 네 약혼자와 그녀의 어머니를 끌고 와서, 네가 보는 앞에서 강간하겠다’라고. ‘그것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간첩’이 조작되었다.
그것을 상징하는 사건이 1975년 11월 22일에 당국이 발표한 ‘재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11.22)이다. 재일 교포 13명을 포함한 2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일련의 사건에서는 강종헌과 이철 등 모두 9명이 사형, 19명이 무기 징역 판결을 받았다. 10년 이상의 형기를 받은 사람도 29명에 이른다. 이철에 따르면 재일 교포 피해자는 73명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전체 피해자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공안 당국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국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한 사람들에 대해, 한국 사회의 시선은 냉담했다. 조작은 한국의 학생 운동, 민주화 운동을 깨부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좌다. 검거된 사람과 친구나 지인이었던 한국인이, 당국이 작성한 ‘간첩 인맥 관련도’에 끼워 넣어져서, 미래를 봉쇄당했다. ‘재일 교포이기 때문에 이런 꼴을’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리라. 권력의 천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행태다.
가장 큰 요소는 반공 국가 ‘한국’에서, ‘간첩’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였다. 민주화와 통일 운동 종사자도, 간첩이 된 ‘재일 교포’에는 거의가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북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불신이다. 옥중에서 한국의 정치범으로부터 ‘빨갱이’라고 욕을 먹은 경험은, 여러 명의 재일 교포에게서 들었다.
이런 ‘편견’들은, 피해자 가족의 운동 등으로 서서히 개선되었지만, 인식의 변화는 눈에 확 띄지 않았다. 이번에 민주 단체가 함께 주최․주관한 의의는 거기에 있다. 그래서 한국으로 가는 공항에서 이철은 말했다. “이제서야 우리도 민주화와 통일 운동을 함께 하는 동료로 인정받은 느낌이 드네요.”
강종헌과 이철 등 사형수는 감형, 석방되고, 두 사람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출소 뒤, 일본으로 돌아왔다. 1990년에는 이철이 호소해 동우회가 결성되었다. ‘그 시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 그리고 ‘서로를 돕는’ 게 목적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회생활에 지장을 겪는 사람도 있었다. 도쿄와 오사카 등 일본 각지에서 한국 양심수의 서화전을 열어, 그 부당함을 널리 알렸다.
‘과거 청산’을 내건 노무현 정권이 2005년에 ‘진실 화해 위원회’를 발족시키자, 이철 등은 ‘재일 교포 간첩단 사건’의 진상 조사를 요청하고, 그 흐름에서 2010년에는 교토시 재일 교포 2세가 처음으로 재심 무죄를 쟁취했다. 한국에서는 재심 변호인단이 결성되어, 2025년 12월 단계에서, 45명의 재일 교포가 원심을 뒤집고 무죄 판결을 받아 억울함을 풀었다. 군사 독재 시절의 사법 권력의 잘못을 묻는 일은, 민주화 운동의 일단이었다. 재심 실현은 정의에 이르는 사법을 구현하기 위한 길이다. 제국 일본 시대의 무고한 죄 ‘대역 사건’과 치안 유지법에 따른 언론 탄압인 ‘요코하마 사건’의 재심 무죄에 퇴짜를 놓아 온 일본의 사법 정의는, 그 훨씬 뒤쪽에 있다.
■ 과거 청산은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
일련의 행사 개최에 분주했던 한 사람은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1972년생)이다. 기획이 구체화한 시기는 2025년 6월이다. 치안 기관의 고문 거점이었던 남영동 대공 분실이, 군정 시대의 치부를 기록하고, 민주화의 역사를 기록하는 ‘민주화 운동 기념관’으로 개관하게 되어, 개관식에 ‘동우회’ 멤버도 참가했다.
간담회 자리에서 “오사카에서 50주년 개최” 계획을 제의한 동우회에, 한국 측에서 다른 의견이 나왔다.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한국에서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개최되어야 합니다”라고.
김영환은,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그 분기점을 한국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이철 씨 일행의 마음도 느끼고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먼저 피해자와 일본의 구원회 분들의 반세기에 걸친 투쟁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체로서, 그들을 정확히 자리매김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만들어낸 여러분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것이 주된 생각이었습니다.”
한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위기감도 김영환을 밀어붙여 움직이게 했다. 2024년 12월의 ‘쿠데타 미수’에서 밝혀졌던 것은, 시민 사회의 저력만이 아니다. ‘싸우지 않으면 암흑시대로 되돌아간다’라는 현실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조선족과 탈북자를 표적으로 하는 형태로 간첩 사건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존속하는 한, 언제든 민주화 운동이 탄압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가 ‘과거 청산’이라는 운동을 인식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국가 폭력의 피해를 그들에게 알리고 싶은 겁니다. 4․3 항쟁부터 한국 전쟁 때의 민간인 학살, 한국사란 국가 폭력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과거 청산’은 그 극복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이며,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입니다. 최악의 예는 전두환입니다. 그는 사면으로 출소하여, 사죄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에게 책임을 지게 했더라면, 윤석렬의 내란은 없었겠지요.”
그런데 ‘민주주의’란 뭔가라고 묻자, 김영환은 말했다.
“역시 평등이지요. 모두가 인권을 누리는 주체라는 점에서의 평등입니다. 한국 헌법의 근거인 ‘3.1 독립 선언’의 근간도 평등에 있습니다. 독립 선언은 독립만이 아니라 공화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천황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의 주권자 의식이 취약한 점도 거기에 있겠지요.”
■ 국가 폭력을 꿋꿋이 견디어 낸 부부
그런 마음을 담은 최초의 집회가, 서울 향린교회에서 11월 21일 개최된 ‘대화 한마당’이었다. 11.22 사건의 피해자와 일본인 지원자는 물론, ‘연루’되었던 한국인들, 재심 변호인단의 변호사, 그리고 한국 내의 공안 사건 피해자도 단상에 올랐다.
연사의 한 사람이 오사카에서 참가한 김영희(1956년생)다. 250명 정도의 참가자 앞에서, 의자에 앉아 발언 순서를 기다리는 표정에는 긴장이 스며 있었다.
바로 보름 전, 오사카시에서 김 씨가 남편 유영수(1949년생)와 운영하는 한국 요리점 ‘샘터’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왜 하필 내가 해야 하나 하며 난감해하고 있어요”라며 김영희는 쓴웃음을 비치며 이야기했다.
한국 남서쪽의 가난한 외딴섬, 거문도에서 살고 있던 김영희가 당국에 구속된 것은 1976년이다. 어느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김영희의 어깨를 어머니가 흔들었다. 앉은 자세를 바로 한 김영희의 앞에, “점퍼를 입고, 신발을 신은 채 정좌한 남성이 있었다.”
그는 한국 전쟁으로 생이별하게 되어, 그대로 북쪽에 남아 있었던 숙부의 아들이었다. 당국의 명으로 동료 두 사람과 함께 배로 월남한 그는, 한번 만나보고 싶어 김영희 일가를 찾아온 것이다. “눈이 또렷하고, 쌍꺼풀만 빼면 우리 오빠와 쏙 빼닮았다.”
몇 시간 뒤, 경찰이 들이닥쳤다. 지방 파출소 앞으로 붙잡혀 간 김영희가 목격한 것은 남성 두 명의 사체, 한 사람은 지난밤 만났던 사촌 오빠였다. 동료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사살하고, 한국 경찰에 자수한 것이다. ‘거문도 간첩 침입 사건’이다.
“눈을 부릅뜬 채 … 너무 무서워서, 눈을 감을 수 없었어요. 지금도 그 얼굴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손바닥을 얼굴에서 30센티 정도 앞에 가리듯 내밀고 김영희는 말했다.
김영희 일가는 ‘간첩 협력자’가 되어, 당시 19살의 김영희와 부모 등이 체포되었다.
“무서웠던 건 구타 소리와 절규, 물소리였어요.”
아버지가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견디지 못한 김영희는 당국이 만든 이야기를 인정했다. 지금도 가장 뉘우치는 일이 있다.
“네닷새 뒤 차로 부모님과 함께 끌려갔어요. 아버지는 양쪽 귀에서 나온 피가 말라붙어 있는데 … 그런데 나는, ‘아버지’라고 감히 부르지도 못했어요. ‘괜찮으세요’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어요. 피도 닦아드리지 못했어요. … 경찰이 무서워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아버지는 옥중에서 병사했다. 김영희도 4년 실형 판결을 받았다. 출소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직접 만든 아기 옷을 시장 변두리에서 팔면서, 근근이 살았다. 형기를 끝내고도 보안 당국에 정기 출두와 보고를 하는 사회안전법이 적용되었다. 주변에서도 김영희의 동향을 당국에 전달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대한민국이 싫어졌다. 어쨌든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유영수가 김영희의 등을 슬며시 쓰다듬는다. 재일 교포 2세인 유영수 자신도, 1977년에 간첩으로 몰리어, 무기 징역 판결을 받은 경험을 지녔다. 리쓰메이칸대학 재학 중 서울대학에 유학, 부산대학 대학원에 재적할 때, 친구의 숙부가 육군포병학교 교장(준장)인 것을 알고, 북측과 진지한 대화와 통일 촉진을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이것이 공작으로 조작되었다.
엉뚱한 행동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준장의 한 계급 위인 소장 시절이다. 통일을 소망하는 젊은 재일 교포가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공안 당국에 연행되었다.
“전기 고문도 당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휘청거렸다. 여러 가지를 조작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미리 짜놓은 각본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진술해 버리게 된다.”
유영수에게 연좌되어, 유학 중이던 동생도 체포되고, 다른 재일 교포가 주범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김대중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는 근거가 되었다.
김영희와는 광주 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사귀어, 결혼하고 일본에서 살았다. 트럭 운전사 등을 하면서 2002년에 개업한 식당이 ‘샘터’다. 음식점 이름은 ‘샘이 솟아나는 장소’를 의미한다. 국가 폭력 속에서 소생한 두 사람의 모습이 겹친다.
전환점이 된 계기는 20년 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였었다.
“다시 또 그 장소에 가야만 했다. 계속 거절했지만, 워낙 열성이어서…”
그대로 재심 청구에 이르렀다.
“취조를 받을 때는 하라는 대로 했어요. 내 이름과 날짜, 이름을 쓴 것만 기억납니다. 자신에 관한 것을 적는 일은 처음이어서, 진술서를 작성하며 쩔쩔맸어요.”
여러 재심을 지원해 온 성공회대학 이영경 연구 교수는 얘기한다.
“모든 것을 당국에 의해 지배당한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진술서를 작성하는 일은 삶을 다시 사는 것입니다.”
2013년에 재심 무죄를 쟁취했다. 사실 재심의 큰 이유는 아내 일가의 원통한 사정을 풀어 없애는 거였다.
“‘부모의 한을 푼다’라고 아내에게 약속했었다.”
진보 정권하에서 ‘재일 교포 간첩 사건’에 대한 당국의 조작이 속속 판명됐지만, 한편으로 ‘북의 공작원’과 접촉 자체는 사실인 거문도 사건에는, 진보적인 변호사들도 떨떠름해 했었다.
“내 재판에서 변호사를 만날 때마다, ‘그녀야말로 무죄가 되어야 한다’라고 거듭해 설득했어요.”
사법부가 김영희 일가 전원의 ‘무죄’를 인정한 것은 2023년이다. 무죄 판결을 하면서 재판장은, 국가 폭력을 인정한 데 더해 이렇게 말했다. “희생된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이야기가 이쯤에 이르자, 김영희는 유영수가 내민 손수건으로 눈을 닦는다.
“그때는 무엇보다도 부모님께 알리고 싶었어요. 자신 때문에 딸이 이런 꼴을 당하게 됐다고 생각하실 테니까. ‘이제 무죄니까 괜찮아요’라고”
그런 가운데 맞이하는 50년이었다.
“저는 11.22 피해자도 아니고…”
주저하는 김영희에게 유영수가 얘기했다.
“재일 교포와 한국의 동료가 같은 자리에 할 수 있는 것이 이번 50주년이라고 생각한다. 통일과 민주화를 향한 염원을 지닌 사람들의 희생 위에 지금이 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11·22를 중심으로 주변까지 아우르며 진행한다. 그래서 엄마(김영희)가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50명이나 참가한 사람들 앞에서, 김영희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절절히 이야기했다. 몇 번이나 눈물이 쏟아져서, 사회를 맡은 김영환이 마이크를 잡은 김영희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이 회한을 언제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청중에게 물었던 김영희는, 이렇게 얘기했다.
“민주화가 더욱 확대되어,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면, 우리의 소원 … 통일은 이루어질까요? 그런 날이 오면, 앞서가신 분들의 혼도 편안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깊은 상처도 조금씩 치유되겠지요….”
■ ‘국가보안법’의 굴레를!
앞으로의 과제를 지적하며, 함께 연대하자는 호소도 잇따랐다. 「동우회가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한 이철은, 함께 걸어온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말을 또박또박, 이 순간 마음에 새겨 넣듯이 전했다. 그리고 문재인, 이재명 두 대통령의 사죄를 언급한 뒤, 더욱 힘차게, 재일 교포 사건 피해자를 일괄 구제하는 「재일 교포 관련 특별법」 제정 및 후속 조치의 실현을 촉구했다. “다음은 사죄에 혼을 불어넣을 차례다.” 그런 열정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넘치고 있었다.
세션에서 발언한 강종헌은, 사형수로 사회에서 소거된 자신이 견디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양심수의 대열을 옥중에서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모순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개인의 행복과 안락을 추구하기보다, 더 나은 사회,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함께 구축하려는 청년 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습에, 조국의 미래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했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헌법의 영토 조항(한반도 전역을 한국으로 규정한다) 개정을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읍시다. 그것이 ‘야만적 시대’와 ‘잔혹한 세월’을 견디어 낸 사람들의 사명이 아닐까요?”
그 말을 이어받은 사람은, 한신대학의 피해자 김명수(1948년생)였다. 그는 친구였던 재일 교포의 ‘종범’으로 1975년에 연행되었다. 친구와의 대화는 ‘사상 교육’, 식사를 대접받은 일은 공작금 제공이 되었다. 국가보안법 등으로 무기 징역을 구형받고, 10년의 형이 확정되었다. 1980년에 출소했지만, 김영희와 마찬가지로 사회안전법이 적용되어 감시하에 놓여서, 취직도 해외 유학도 막혔다.
불을 토하는 기백으로 그가 호소한 것은,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11.22’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의 사회적 치유를 실현하는 특별법 제정이었다. 그는 한강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가 된 미래를 구하는 것은, 지금이라는 과거이다. 어린이들,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자.”
■ 과거 극복의 활력과 역사 기념 시설
집회에 흘러넘쳤던 사상은, 이번에 방문한 역사 기념 시설에 구현되어 있었다. 하나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다. 1908년에 독립운동에 대한 대책으로 개설된 이 시설은,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는 민주화와 통일 운동을 탄압하는 장으로 가동되었지만, 민주화 11년째인 1998년, ‘기억의 장’으로 재창조되었다. 시설명 옆에 부기한 것은 ‘독립과 민주의 현장’이다.
붉은 벽돌 담 안에는 1910년 전후에 건축된 단층의 사형장과 옥사가 보존되어 있다. 예전의 소장실은 ‘민중 저항실’이 되어,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2013년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전시실이, 2016년에는 재일 교포 전시실이 개설되었다. 이철과 약혼자 민향숙이 옥중에서 주고받았던 묵주와 강종헌의 대법원 상고 이유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 남성의 역사’였던 독립과 민주화의 주체가 여성, 재일 교포로 확대되었다. 그것은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소수파와 약자(여성, 마이너리티, 빈곤층 등) 등에 대한 폭력을 자각하고, 대치해 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역사관 북쪽, 옥사와 처형장 사이에 있었던 추모비(2010년 설치)다.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 165명의 이름을 새긴 은색의 위패를 방사상放射狀으로 조합한 오브제다. 사발 형태는 목숨을 걸고 계승해 온 ‘자주 자립의 혼’을 담아낸 그릇을 의미하리라. 안내역의 젊은 활동가가 얘기했다.
“그런데 이 인원이 전부가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의 전진은 다음 과제를 눈앞에 드러낸다. 그것을 더욱더 투쟁으로 극복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운동의 역동성이다.
다음 날, 방문한 곳은, 앞에서 말한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였다. 서울 중심부에, 거대한 묘석을 연상시키는 짙은 회색의 7층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11.22’ 다음 해에 착공된 이 시설은, 1980년대에 걸쳐서, 고문의 일대 거점이었다.
거기서 자행된 만행은 1985년의 ‘김근태 고문 사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용의자’는 눈가림을 당한 상태로 연행된다. 전동차가 움직이는 듯한 굉음을 발하는 철문을 지나서, 세로로 긴 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나선형 계단을 따라 5층으로 올라간다.
‘조사실’의 벽은 빨간색이나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어, 정신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방에는 침대가 있는데, 침대는 수면 박탈 고문Sleep Deprivation Torture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고문 도구다. 욕조는 얼굴을 담그기 위한 고문 시설이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자신의 잔학한 행위를 ‘예술’이라 일컬었다. 물고문으로 서울대생 박종철이 살해된 것이, 1987년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일은 영화 『1987』(일본 제목, 『1987 어느 투쟁의 진실』)에도 묘사되고 있다.
신설된 별관은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다양한 미디어로 전달한다. 당시의 사진과 해설문, 몇몇 애창곡, 국내외 저명인의 ‘민주주의 어록’이, 터치패널을 많이 쓴 전시물로 나란히 위치한다. 지하에는 운동가들의 유품 같은 것도 있다.
방문 때에는 댄스 퍼포먼스도 있었다. 남녀 두 사람이 군사 정권부터 현재까지를 몸으로 표현한다. 점점 숨이 거칠어지고, 가빠진다. 땀과 냄새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배경에는 댄스로 표현되는 시대의 영상과 사진, 신문이 쉴 새 없이 비친다. 2차원 영상과 3차원 무용을 조합해, 사회의 초석과 현재 지점, 지향해야 할 사회란 뭔가를 생각하게 한다. ‘사회’와 대면하는 과정에서 표현이 직조되듯 길어 올려지는 것이다. Installation에서는 젠더와 장애도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출구로 향하는 통로 오른쪽에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금속 아치가 물결치듯이 배열되어, 몇 미터의 회랑을 형성하고 있었다. ‘기억의 통로’라고 이름이 붙여진 오브제다. 사람들의 연속, 기억의 연속이 ‘길’이 되고, ‘전망’이 되는 것이다. 왼쪽 벽에는 ‘민주화 운동 관련 사망자’ 13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를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일도 민주주의의 전진인 거지요.”
김영환의 말이 꽂혔다.
■ ‘야만적 시대’를 꿋꿋이 견딘 사람으로서
마지막 집회 「치유와 평화 한마당」이 열린 곳은, 국회의 국회의원 회관이었다. 국가에 유린당한 사람들이 정부의 중심 건물에서 집회를 연 것이다. 인사에 나선 김원중(1951년생)은 11.22로 징역 7년의 형을 받은 재일 교포 2세다. 빼앗긴 시대의 무거움을 이야기한 다음, 김원중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복역 생활은 헛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당사자의 박수는 찬성이었으리라.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그 뒤의 살아가는 방식으로 의미는 바뀐다. 그들의 인생은 그런 실천이었다.
이어진 콘서트에서는 여러 예술가가 시대와 투쟁을 상징하는 몇몇 노래를 선보였다. 「아침 이슬」「바위처럼」…. 재일 교포 2세 가수로, 구원 운동에도 참여한 이정미가, 피해자 가족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른다. 객석을 바라보다, 크게 손뼉을 치며 노래하는 김영희와 눈이 마주쳤다. 마지막은 당사자와 지원자 전원이 등단해, 「아침 이슬」 등을 합창했다. 가운데에서는 감격에 겨운 이철이 손수건으로 눈을 닦고 있었다.
“집에 있어도 편안히 있을 여유가 없다.” 아도르노의 말이다. 자기 집에 있어도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지향해 가는 태도. 여기는 ‘어두운 시대’를 산 작가의 중요한 말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확실히 ‘안주하지 않는 집’이었다.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종료 뒤, 이철은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에게 ‘연좌’되어 쓰라린 고통을 맛본 사람들도 와줬어요. 구원받은 기분입니다. 이번에 동우회는 해산할까 했지만, 향후 과제도 잔뜩 있습니다. 60주년을 위해, 아니 우선은 55주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게요.”
강종헌은 강하게 말했다.
“저는 형무소에서 여러 선배가 처형되는 것을 지켜보았어요. 그들이 바란 조국, 더 나은 사회를 실현하는 일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야만적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의 최저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삼겠습니다.“
(『세카이』, 202602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