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되는 정의, 은폐되는 ‘국가범죄’
통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 피해자 개개인의 재심 문제
(WWW.SURPRISE.OR.KR / 강진욱 / 2026-01-27)
<1983 버마> 저자 강진욱(전 연합뉴스 기자), 2016.1.22
1. 잇단 ‘재심 무죄’
1974년 11월 육군보안사령부(현 방첩사령부)의 ‘통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으로 억울하게 사형당한(1976) 강을성(姜乙聲) 씨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2월 19일 재판부(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1부) 사형 집행에 따른 ‘불가역적인 피해’ 와 유족의 고통에 대해 사과도 했다(<동아일보> 2016.1.19).
검찰도 지난해(2025) 10월 29일 재심 결심공판에서 “원심에서 피고인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해야 하는 절차적 진실이 지켜지지 않았다”며 무죄를 구형하면서 사죄의 뜻을 밝힌 바 있다(<연합뉴스> 2025.10.29).
또 같은 사건 피해자들인 재일교포 진두현(陳斗鉉) 씨와 박기래(朴基來) 씨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어, 이 사건 피해자들의 원과 한이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다. 많은 이들이 재심 무죄 판결을 환영하는 이유다.
[‘통일혁명당(통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정부 시절 대표적인 공안 사건으로 꼽힌다. 1974년 11월 ‘재일거점 국내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됐으며, 당시 민간인 수사 권한이 없었던 육군 보안사령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통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며 강 씨 등 17명을 연행 ... 불법 체포. 구금과 가혹행위를 통해 허위 자백을 받아낸 뒤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 ... ] (「통혁당 사건 故강을성, 50년 만에 간첩 누명 벗어 - 재심 청구 3년만 무죄 선고」<연합뉴스> 2026.1.19)
문제는 이렇게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는데 만족한다는데 있다. 상호 면식은커녕 아무 관계도 없었던 이들을 한데 엮어 간첩사건을 조작한 이유와 그 내막을 밝히고 사건 조작의 주범와 종범을 단죄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통혁당 재건위 사건은 흔하디흔한 공권력 오남용 사건이 아니라,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육군보안사령관(강창성 姜昌成. 김종환 金鍾煥)을 시켜 자신이 하는 일(국가조작범죄)를 훼방한 이들을 ‘빨갱이 = 간첩’로 몰아 살해한 ‘국가조작사건’ 이다. 경찰(내무부 치안국)과 중앙정보부, 보안사가 경쟁적으로 - 박정희에 대한 충성 경쟁으로 - 대북사건을 조작하며 이남의 대북 적대감을 조장하던 때 벌어진 공안 사건 가운데서도 매우 악질적인 국가범죄였다.
2. 52년 전
1974년 11월 5일 당시 육군보안사령관 김종환은 ‘일본 거점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재일거류민단 동경본부 부단장 진두현(陳斗鉉, 46)을 두목으로 한 일본 거점 대규모 간첩단[?] 3개 망 일당 18명을 지난 10월 10일 서울, 광주 등지에서 일망타진했다고 떠벌렸다. 그러면서 ‘군부침투 간첩 = 강을성’ 운운했다.
[육군보안사령관 김종환 중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들 간첩단[?]은 일본 거류민단에 침투, ①국내 침투를 위해 재일거류민단에 위장 가입, 민단을 거점으로 국내 정치 분야로 진출, ②불평불만자를 포섭, 유언비어 유포 등으로 민심 동요를 꾀하고, 소위 인민혁명을 유발토록 획책했으며, ③학원 및 종교계 인사를 포섭, 도일케 하여 간첩 밀봉교육을 실시한 후 민주수호동지회를 조직, 반정부투쟁을 선동했고, ⑧군부 내에 침투, 군사기밀을 수집하고 군산업체에 지하망을 부식시켜 노조를 통해 군 장비 현대화계획을 탐지하여 이를 방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 이들의 망 조직은 군부침투간첩[?] 강을성(38) 방위산업체 담당 박주석(33) 학원 담당 황경주(42), 노동자 담당 장사랑(45), 혁신계 담당 임춘호 등으로 구성 ... ] (「일 거점 간첩단 3개 단 18명 검거 국군보안사 발표」<매일경제신문> 1974.11.5)
그런데 보안사가 ‘강을성 = 군부침투 간첩’이라고 떠든 것은 전 신민당 의원 이세규(李世圭)와 관련이 있었다. 보안사령관 김종환은 ‘일본 거점 국내 침투 간첩단’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이 씨는 일부 이 사건과 관련이 있으나 그밖의 문제에도 관련돼 있어 계속 조사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세규 씨가 일부 관련되었다는 부분은 간첩 강을성(38, 육본 부관감실 군속)이 지난 71년 5월부터 74년 8월 사이 10여회에 걸쳐 8대 신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이[세규] 씨 집을 찾아가 ①71년 9월 국회에서 56억 원의 국방추가경정예산 배정 ②실미도 난동 사건은 공군첩보대원에 의한 소행이라는 국회조사단의 결과라는 내용을 수집, 재일 진두현을 통해 북괴에 보고했다는 것이다.] (「일본 거점 간첩단 8명 검거 - 보안사 발표」<조선일보> 1974.11.6)
박정희가 유신계엄을 선포한(1972.10.17) 뒤 일곱 차례나 보안사령부에 끌려와 고문을 당했던 이세규가 또 보안사에 끌려와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김종환은 “이 씨가 이번에 검거된 간첩 강을성. 이대봉 등과 10여 례 만나 군기를 누설했으나, 그것은 군기법이 통과된 72년 이전의 일로 법을 소급시키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이상한 일이다. 강을성을 군부침투 간첩으로 조작하려 하면서, 그에게 실미도 사건 등에 관한 ‘군사기밀(?)’을 넘겼다는 이세규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이는 강을성과 이세규의 폭로로 ‘실미도 사건’ 조작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강을성 간첩 조작 사건이 실미도 사건 조작 실패에 대한 박정희(와 육군보안사령부)의 사적 보복인 까닭이다. <2편 계속>
3. 실미도 사건은 제2의 무장공비 청와대 기습 조작 음모!
실미도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김신조 사건(1968.1.21)’을 재연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1971년 8월 23일 낮 라디오방송은 일제히 ‘무장공비 서울 출현’이라고 보도했고, 이날 석간인 <중앙일보> 1면 톱기사 제목도 「공비 20여명 경인가도 따라 서울 침투」였다. 이들이 청와대까지 가려했다는 말을 만든 것도 제2의 김신조 사건 조작의 정황이다. 이들이 속한 공군본부(서울 대방동) 앞까지 데려와 ‘공비 사살 쇼’를 벌이면서 그런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거창하게 제2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 기도’ 사건을 만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이세규 의원이 “무장공비 침투가 아니고 공군 특수군 난동”이라고 발설했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사건 당일 오후 3시쯤 그 사실을 - 아마도 강을성으로부터 - 전해 듣고 국방부에 통고했다고 밝혔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971년 8월 24일 국회 국방-내무위 질의.
[▲이세규 의원(신민당) = 나는 사건 당일 하오 3시쯤 난동자들의 소속 부대까지 상세히 알고 국방부에 알려줬는데 국방장관은 정정할 때까지 3시간 동안이나 이들을 공비라고 우긴 이유는 무엇인가. 대방동 현장에 출동한 수도경비사 소속 모 대위가 아직 꿈틀거리는 생존자에게 권총을 난사해서 숨지게 했다는데 알고 있는가.
▲정 국방 답변 = 그날 하오 2시쯤 합참의장으로 부터 난동자들이 공군관리하의 특수범일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현장확인이 중요했다. 그래서 현장으로 달려가 공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곧 청와대에 보고했다. 발표가 늦은 것은 문구를 수정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모부대 대위가 생존자에게 권총을 난사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이며 조사 후 밝히겠다. 현장출동이 늦은 것은 사실이며 그 이유는 비공개회의에서 밝히겠다. 생존한 김종철은 장교로 임관된 사실도 없으며 군인이 아니다. 공항입구를 차단한 일은 있으나 공항을 폐쇄한 일은 없다.] (<조선일보> 1971.8.25)
“수도경비사 소속 모 대위가 아직 꿈틀거리는 생존자에게 권총을 난사해 숨지게 했다는”는 전언은 이들을 현장에서 모두 사살하려는 계획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대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정래혁은 8월 24일 사표를 내야했다. ‘무장공비의 제2차 청와대 기습 기도 실패 사건’으로 웅장하게 전개됐어야 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거창한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이들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4. 박정희의 보복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프레시안>에 연재한 ‘현대사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세규는 ... 10.17쿠데타 다음 날 밤 10시, 영등포에 있던 구 6관구[사령부] 헌병 중대로 끌려갔다. ...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 뭇매도 때렸다. 고문 목적은 ‘군 내부의 조직 관계를 털어놓아라. 실미도 사건 발생 직후 그 진상을 발표했는데, 어떤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 이런 것을 캐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이세규는 ... 10.17쿠데타 지지 성명을 내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고 .... 5일간 고문을 당하다가 풀려나는데, 그 후에도 6번이나 더 끌려갔다. ... 김충식 기자가 쓴 책에 의하면, 1972년 9월 2일 ... 대통령이 강창성을 불러서 ‘이제 유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알려주고 ‘그때 가만 놔둬서는 안 될 자들, 질 나쁜 야당 의원’이라고 본 15명의 명단을 넘긴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쓴 명단이라고 하는데, 강창성은 ‘15명은 좀 많다. 윤길중, 박한상, 이기택, 김상현, 이세규는 제외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강창성이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박정희가 ‘이세규는 안 돼’라고 했다고 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6> 유신 쿠데타, 열아홉 번째 마당」<프레시안> 2015.11.12)
박정희는 유신 계엄(1972.10.17) 한 달 보름 전, 이세규 등을 조직 사건으로 엮으려 단단히 마음먹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약 2년 간 무려 7차례나 이세규를 보안사로 끌어가 고문과 회유를 반복하면서 그에게 실미도 관련 정보를 넘겨준 이가 육군본부 부감관실에서 근무하는 군무원(민간인) 강을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10월 그를 포함한 여럿을 보안사령부에 끌고 가, 역시 갖은 고문으로 그에게서 ‘간첩’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 ‘일본 거점 간첩단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이때 육군보안사령부 수장은 - 1973년 윤필용 모반 조작 사건의 후폭풍 속에 - 강창성에서 김종환으로 바뀌었지만, 박정희가 직접 보안사령관을 불러 ‘누구누구를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는 관행이 바뀌었을 리 없다. 강창성에게 내린 지시가 그대로 김종환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박정희는 아마도 김종환에게 직접, 강을성 등을 “반드시 죽여!”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통혁당 재건위 사건’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국가범죄의 내막(內幕)을 품고 있다. 사건의 피해자들 개개인의 재심 청구를 시작으로, 긴긴 시간을 허비한 뒤 무죄 판결을 얻어내는 ‘파편화되는 정의’로는 국가범죄의 심연을 들춰낼 수 없다.
죄 없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상하던 이승만네 특무대(대장 김창룡)가 박정희네 육군방첩대(대장 정승화.윤필용), 국군보안사령부(초대 사령관 김재규)가 되는 동안 온갖 끔찍한 대국민 사기극과 조작질을 일삼았다. 그 범죄의 내막을 품은 조직이 기무사.군사안보지원사령부를 거쳐 방첩사령부로 간판만 바꿔 달았지만, 결국 12.3 계엄내란에 동원됐다.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는 파렴치한 종북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여,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 ... ”(전 대통령 윤 모, 2024.12.3)
새 정부는 저들이 저지른 추악한 대북공작과 내수공작(정치테러)의 내막이 밝혀내는 대신 방첩사령부 간판을 내리려 한다.
<보론> 박한상 테러의 배후 = 보안사 ‘이 대위’
이세규 전 의원이 박정희의 미움을 산 것은 박정희네의 실미도 사건 내막을 폭로한 것 외에, 신민당 의원 박한상 린치 사건(1966.6.8)의 배후를 지적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계속 의원 배지를 달고 활동하게 했다가는 자칫 박정희 정권이 일상으로 저지르는 ‘내수 공작(정치테러)’의 실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보안사령관 김종환은 ‘일본 거점 군부침투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면서, “이[세규] 씨는 이와 별개의 사건에도 관련되어 있어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경향신문> 1974.11.5). 이 ‘별개의 사건’이 바로 박한상 의원 테러와 그 배후와 관련된 이세규 의원의 대담한 국회 질의였다. 실미도 사건의 내막을 폭로한 지 두 달만인 1971년 10월 8일,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의 고대 난입 사건 경위를 추궁할 때, 그는 또 누구도 하지 않을 이야기를 발설했다.
[신민당 이세규 의원은 8일 국회 국방위에서 “신민당 박한상 의원의 테러범은 당시 군 특수부대에 근무하던 당수 5단의 김 하사가 하수인이고, 이 대위가 지휘자였다”고 주장, “이 대위는 CIC, 월남 근무를 거쳐 현재 육군 중령이며, 김 하사는 제대하여 현재 서울 한강로에서 택시업을 하고 있는데, 김 하사는 보복이 두려워 자수는 못 하고 있으나 상사의 명령대로 행한 테러 행위의 죄책감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세규 의원 주장 “박한상 의원 테러범은 특수부대 두 장병”」<동아일보> 1971.10.8)
박한상 의원을 백주에 테러한 ‘이 대위’가 누구일까? 두 달 전, 이세규 의원이 정래혁 국방장관에게 실미도 사건 관련 질의 도중 언급했던 ‘모 대위’가 그일까 아닐까.
[▲이세규 의원(신민당) = 대방동 현장에 출동한 수도경비사 소속 모 대위가 아직 꿈틀거리는 생존자에게 권총을 난사해서 숨지게 했다는데 알고 있는가.] (<조선일보> 1971.8.25)
“CIC, 월남 근무를 거쳐 현재 육군 중령”인 이 대위는 이진삼(李鎭三) 대위가 아니었을까. 박한상 의원 테러 한 해 전인 1965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관계자들을 백주에 두들겨 팬 테러 실행조 지휘자가 바로 그였다. 검경합동수사반에 불려갈 때 ‘라이방(썬글라스)’을 쓰고 수사반장(검사)에게 권총을 내던지며 “선의의 보복을 하겠다”고 협박했던 ‘북파공작의 전설’, 훗날 정보사령관(1988)이 되고 육군참모총장(1990.6~1991.12)이 되고 체육부장관(1991.12~1993.2)이 되는 이다.
그가 정보사령관으로 재적하던 때 <중앙경제신문> 사회부 오홍근 부장 식칼테러 사건(1988.8.6)은 유명하다. 그랬던 그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자유선진당 의원 배지를 달고 나타나 국방장관(김관진)을 세워 놓고 “내가 예전에[1967.10] 인민군 33명을 죽인 사실을 아는가?”라고 뻐겼다. 그렇게 38선을 넘어가 전대미문의 무공을(?) 세웠다는 그는, 불과 석 달 뒤에는 김신조와 한 편을 먹고 ‘공비 퇴로 차단 작전’을 나갔다고 우스댔다. 온통 조작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일련의 보안사.정보사 관련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이가 바로 ‘이 대위’였다.
(1965.10.5 경향신문)
박한상 의원 테러의 흑막을 고백한 이가 있다.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었던 방준모 씨. 1971년 중정을 그만둔 뒤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얻어 살고 있던 그는 자로 살고 있는 방준모씨가 문일석 전 <브레이크뉴스> 발행인과의 인터뷰에서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방 씨는 1996년 <KCIA>(한솔미디어)를 출간했으나 안기부의 방해로 서점 유통이 안 됐다.
이 책에는 방 씨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받았다는 세 건의 암살 명령 가운데 하나였던 ‘박한상 의원의 암살 지시’의 비화가 들어 있다. 방 씨는 도저히 암살 명령을 이행할 수 없어 ‘이 모 소령’을 불러 테러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형욱 부장으로부터 ‘박한상을 해치워라’는 명령을 받은 나의 심경은 ... 감찰실 직원인 이 수사관과 이 모 소령을 불렀다. 박 의원에게 신변이 위험하다는 불안감을 심어주기 위한 공작 ,,. “이 씨는 소매치기가 되고, 이 소령은 돈을 빼앗긴 피해자가 되시오. 소매치기인 이 씨가 돈을 빼앗아 도망가다가 박한상 의원을 붙들고 빙빙 돌 때 이 소령은 소매치기를 때리는 척 하면서 박 의원에게 한방을 먹이시오. 그리고 이 씨가 도망가면, 이 소령은 쫓아가시오. 이것이 상황 끝이오.”] (「“나는 세 번의 암살 지시를 받았다” ... 김재춘, 박한상 씨 등 암살 지시」<프레시안> 2001.12.13)
방 씨의 증언은 사실에 부합한다. 박한상 의원 테러 사흘 뒤 신문 기사.
[속보=박한상의원 피습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종로경찰서는 사건 발생 이틀째인 11일 사건 당시 박 의원과 함께 가던 홍순기 (64) 씨등 2,3명의 목격자 증언만을 듣고, 자기들끼리 싸우다 뛰어 온 두 괴한의 틈새에 박 의윈이 우연히 끼어들어 폭행당한 것이지 정치적 「테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①괴한들이 각각 반대방향으로 사라졌다는 점 ②쓰러진 박 의원에 계속 발길질을 했다는 점 ③폭행을 가할 동안 괴한들이 아무 말도 없었다는 점 등으로 보아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잘못 얻어맞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의문점을 남겨주고 있다.] (「정치적인 것 아니다 ... 경찰, 박한상 의원 피습에 주장」<중앙일보> 1966.6.1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