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본모습 3 - ③
이상향과 정착촌의 종언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5-12-29)
요시가와 나기吉川凪
작가, 번역가. 인하대학 국문과 대학원에서 한국 근대문학 전공. 문학박사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제4회 일본 번역 대상 수상.
저서로 『초선 최초 모더니스트 정지용』, 『경성의 다다이스트, 도쿄의 다다이스트 ― 고한용과 동료들』이 있다. 역서로 최인훈 『광장』, 이청준 『소문의 벽』, 김원일 『마당깊은 집』, 박경리 『완전판 토지』 등 소설 외에, 정지용, 오규원, 신경림, 김혜순 등의 시집이 있다.
■ 영화 「황토기」
1962년, 주한 미국 공보원이 하운을 모델로 삼아, 65분짜리 흑백 영화 「황토기」(영어 제목은 「Litany of Hope」)를 제작했다. 각본과 감독은 양승룡, 주인공 하운 역은 김웅, 하운의 연인 역은 김선영이 연기했다. 의사와 선교사 등 영화 종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무보수로 다수 참가했다. 내용은 사실과 다르며, 한센병으로 고생하는 시인이 미국인 의사에게 신약 치료를 받고 회복해, 감사한다는 이야기다. 하운은 DDS를 선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서울 시민회관에서 출연자들이 무대 인사를 했을 때는, 하운도 무대에 올라가, 청중의 박수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미국 공보원은 이 영화로 1963년 제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았고, 영화는 같은 해 4월에 도쿄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 영화제(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 출품되었다. 비디오는 한국 영상 자료원에 보관되어 있지만, 현재는 열람할 수 없다.
■ 세계 나문학癩文學 소사小史
1964년 8월, 류준은 육영수의 도움을 받아 『새빛』을 창간했다. 이 잡지는 국내 한센병 치료와 예방에 관한 정보만이 아니라, 각국의 요양원 소개도 하고 있어, 일본의 요양원에 사는 재일 한국인 환자의 수기 등도 실렸다. 소설, 시, 의학 논문, 투병기, 독자 문예란도 있었다. 하운은 이 잡지에 「세계 나문학 소사」와 칼럼 「월평선」을 연재하는 외에, 시, 에세이, 한센병 환자를 위한 사업에 관한 논평 등 다양한 글을 기고한다. 문단에서 소외되어 있던 하운에게, 『새빛』은 자기실현을 위한 최적의 무대였다. 하운 외에도 심숭沈崧, 윤지영 같은, 한센병에 걸린 작가와 시인의 작품이 소개되었기에, 한국에 만약 ‘나문학’이라는 장르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잡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해도 되리라.
하운의 「세계 나문학 소사」는, 한센병과 환자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의 개요를, 생각나는 대로 소개하는 칼럼이다. ‘나문학’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만든 것으로, 도쿄 히가시무라야마東村山의 젠세이全生 병원(현 국립요양소 다마젠세이엔多磨全生園)에 입원했던 호조 다미오北条民雄의 단편소설 「생명의 첫날 밤いのちの初夜」(1936년)이 문학계상文學界賞(문예춘추사가 발행하는 문예지 『文學界』가 주최하는 공모 신인 문학상 - 역주)을 받고, 아쿠타가와상 후보에도 오르며 높이 평가된 때에 퍼졌다. 이병철은 『한하운 시초』 초판 발문에서 호조 다미오의 이름을, 재판에서는 조영암이 호조와 나란히 일본 나문학을 대표하는 단가短歌 시인 아카시 가이진明石海人의 이름을 거론하며, 하운의 시는 호조와 아카시의 작품보다 뛰어나다고 예찬했다. 이병철과 조영암은 일본 나문학을 강하게 의식하며, 하운을 한국 나문학의 기수로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듯하다.
십몇 회에 걸쳐 연재된 「세계 나문학 소사」는, 예를 들면 그레이엄 그린의 『소진된 케이스A Burnt-Out Case』, 구약성서 『욥기』, 밀로반 질라스의 『나환자와 다른 이야기들The Leper and Other Stories』 등을 다루고 있다. 한국 편에서는 경상남도에서 전해지는 가면극 오광대, 서정주의 시 「문둥이」, 김동리의 단편소설 「바위」 등에 대해 기술한 뒤, 하운은 자신의 업적을 소개하며, “이 땅의 나환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전기를 만들고, 이 땅에 나문학을 탄생시켰다”라고 자화자찬한다.
특히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일본 편이다. 제8회째 연재에서 하운은, 나문학의 종주는 일본이라고 하며, 일본 각지의 요양원의 문예 운동을 기술한 뒤, “우리나라의 요양원과 그곳의 직원은, 문화 운동은커녕, 책 한 권도 환자들에게 사 준 적이 없다”라고 탄식한다. 호조 다미오에 대한 기술은 짧지만 ‘젊은 천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아카시 가이진의 경력은 상당히 상세하게 적고 있어, 같은 병으로 고통을 당하며 성과를 남긴 선배에 대한 공감과 경의가 느껴진다. 제9회에서는 의사 오가와 마사코의 『작은 섬의 봄 ― 어느 여성 의사의 수기』(1938년)를 소개했다.
■ 최후
1967년에 간경변이 발병해 입원한 이후, 하운은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어 죽을 수 없다고 하며, 좋아하는 술도 끊었다. 1968년 12월, 익산, 칠곡, 부평에 있던 한센병 병원을 소록도 병원에 통합하게 되어, 국립 부평 나병원(성혜원 후신)은 해체되고 이백몇십 명의 회복자가 사는 정착촌, 부평 농장이 되었다. 회복자 가운데 개신교 신자는 인천의 청천 농장, 가톨릭 신자는 부평 나병원에서 몇 킬로 떨어진 십정十井 농장(경인 농장으로도 불렀다)으로 옮겼다. 하운도 십정 농장에 살았다.
같은 해 7월, 하운은 횡령 혐의로 20일 가까이 구속되었다. 기독교계 구호 단체에서 십정 농장에 선물한 옥수숫가루와 밀가루 등 원조 물자를 처분해, 농장의 다른 용도로 사용한 혐의를 씌웠다고 한다. 오소백이 서명을 모아 탄원서를 내는 등으로 석방되었지만, 몸 상태가 악화하여 들것으로 데려왔다. 오소백이 집을 방문하자, “저의 부덕의 소치입니다”라고 하며 감사를 할 뿐, 일절 변명하지 않았다. 며칠 뒤, 골절해 수술을 받았는데, 사망할 때까지 완치되지 않은 모양이다.
박정희 정권의 한센병 대책 사업에는 류준과 의사이기도 한 보건사회부 장관 정희섭, 한센병 환자의 복지에 관심을 쏟은 육영수의 존재가 큰 영향을 끼쳤다. 하운은,
“…유달리 사람들이 꺼리는
문둥이 촌을 찾으시며
나환자의 손을
손을 잡고
뻔질나게 보내는 편지에 일일이 답을 쓰시고
성가시게 달라고만 하는 나환자들의 염치없음에도
언제나 미소로서 도와…”(「추모시 ― 곡哭 육 여사님 영전에」) 주었던 육영수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1974년 8월 15일, 대통령 암살을 노린 재일 교포 문세광이 쏜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하운은 틀림없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가 공적 자리에 나온 것은 새빛사 주최 고 육영수 여사 추도회가 마지막으로, 그때 사진이 남아 있는데, 하운은 마치 노인처럼 보인다. 몸 상태가 나쁜 데 무리해 참석했던 것이리라.
하운은 그다음 해 2월 28, 인천 자택에서 간경변으로 타계했다. 영결식은 3월 2일 아침 십정 농장에서 이뤄지고, 전국의 정착촌 대표와 십정 농장 사람들, 한센병 대책 사업 관련 인사 등 200명 이상이 참배했다. 가족은 내연의 아내, 유임수와 그 동생뿐. 시인 한하운의 죽음은, 문단에서는 거의 화제가 되지 않았다. <끝>
※ 한하운 연구에 대해서는 한국의 대산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았다.
(『세카이』, 202512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