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은 좌초입니다.
천안함 조사위원으로 참여한 선박 전문가 신상철의 비망기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
권력을 사익 확대의 도구쯤으로 여기는 오늘날 부패한 고위 관료들.. 김종익
도둑맞은 주권
18대 대선은 합법으로 위장한 부정선거였다. 김후용
진보적 글쓰기
우리의 글쓰기가 사회를 개선하는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김갑수
진보를 복기하다
국회의원으로서 내놓았던, 내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정책을 열한 가지의 주제로 묶어 정리했다. 이정희
천안함 7년, 의문의 기록
사건의 재구성과 57명의 증언 (미디어오늘 조현호 기자)
천안함의 과학 블랙박스를 열다
분단체제 프레임 전쟁과 과학 논쟁 (한겨레 오철우 기자)
논  쟁   문재인정부   천안함   세월호   최순실   검찰개혁   국방개혁   정치개혁   일반   전체 
군부 독재 시대에서 온 편지
  번호 130793  글쓴이 김종익  조회 274  누리 0 (0,0, 0:0:0)  등록일 2022-3-15 08:44 대문 0

군부 독재 시대에서 온 편지
지명관과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2-03-15)

오카모토 아쓰시岡本厚
1954년생. 1977년 이와나미서점 입사. 『세카이』 편집부 배치. 이후 편집장, 사장 역임


올해 1월 1일, 지명관 전 한국 한림대학 일본학연구소 소장이 아흔일곱의 나이로 타계했다. 고인은, 본지 『세카이』에 1973년부터 1988년까지 15년간에 걸쳐, 익명으로 「한국에서 온 통신」을 집필해 한국 민주화에 커다란 역할을 한 외에, 김대중 정부에서는 한‧일 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 그대로, 격동의 인생을 보냈다.

‘지식인의 시대’라는 게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민중의 대변자로서 지식인이 앞장서서 권력의 부정과 포학을 폭로하고, 추궁하며, 싸우는 시대였다고 한다면, 고인은 가장 지식인다운 지식인이었다.

나는 『세카이』 편집에 관여하는 가운데, 고인과 깊은 관계를 쌓아 왔다. 물론 1924년생인 고인과는 30년이라는 나이 차가 있어, 우러러보는 입장이다. 나는 편집자로서, 혹은 한일 심포지엄의 사무국 직원 신분으로 동행하며, 고인의 열기 넘치는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에 대해, 한․일 관계에 대해, 역사에 대해 배워 왔다. 고인의 둘도 없는 벗, 동지라고 해야 할 사람은, 내 전임자였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1935~1998년. 『세카이』 편집장 1972~1988년, 이와나미 사장 1990~1996년) 씨다.

한 세대 아래 세대의 한 사람으로, 나는 지명관이란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쓰고자 한다.

■ 지명관 선생과의 만남

선생과의 첫 만남은, 지금 생각하면 어떤 우연 때문이었다. 『세카이』 편집부에 들어와 몇 년이 흐른 1980년대 초반으로 기억된다. (교육 현장에 있는, 계절 학교와 교육 문제를 상담하던) 어떤 필자로부터 “오카모토 씨 참 재미있는 한국 분이 계세요, 만나 볼래요.”라는 말을 듣고, 이런 식의 소개는 드문 일은 아니었기에, 가벼운 기분으로 “좋아요”라고 답했다. 바로 그날, 신주쿠 찻집에 나타난 온화한 미소를 띤 아담한 체구의 신사가 지명관 선생이었다. 당시 도쿄여자대학 교수였다. 아직 환갑이 채 안 돼 보였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독재를 강화하는 군사 정권과 거기에 저항하는 지식인, 야당, 노동조합, 학생, 종교인, 언론인 등 민주화 운동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한국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허연 대낮에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한국의 자택 앞에 내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나서, 일본 전체가 난리가 났다. 학생이었던 나는 그 사건으로, 이웃 나라에서 뭔가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처음 알았다. 그리고 다양한 책, 잡지를 찾아 읽으며, 집회 등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세카이』이에 연재되던 T‧K生 「한국에서 온 통신」을 만나 매월 탐독했다. 거기에는, 신문이나 TV에는 나오지 않는 정보가 많이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인간적인 목소리, 눈물, 분노, 기쁨이 표출되어 있었다. 그것을 읽는 일본 독자 가운데 많은 사람은, 그들의 용기와 행동력, 희생적 정신에 마음이 흔들려서, 한국인들에게 깊은 경의를 품었는데, 나도 또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세카이』는,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논진을 펴고 있어, 한반도와 일본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잡지였다.

나는 1977년에 이와나미岩波서점에 입사해 『세카이』 편집부에 배치되었다. 편집부에 들어가고 나서 알았지만, 「한국에서 온 통신」과 관련된 모든 것은 야스에 료스케 편집장만의 전권으로 다뤄지고 있어, 편집부의 다른 직원들은 아무도 몰랐다. 선배 편집자는 “한국 정보부원이나 일본 경찰도 눈을 부릅뜨고 있다. 어설픈 사람이 뭔가 알고 있으면, 어디선가 무심결에 말해 버릴지도 모른다. 모르는 편이 낫다”고 했다. 편집부에는, 짓궂은 말이나 협박 전화가 늘 걸려오기도 하고, 야스에 편집장의 집에는 심야에 전화를 걸어 말을 하지 않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 시대였다. 나도 모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선생에게는, 그런 경우가 있었던지, 몇 번인가 술잔을 나눈 다음, 나는 원고를 의뢰했다. 그러나 고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분명한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왜 그럴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며칠 후 야스에 편집장이 불러, “사실은”이라며 T‧K生에 관한 사실을 밝혔다. “선생이, 오카모토 씨에게 미안하니까, 그에게는 사실대로 밝히자고 한 거야”라고.

그 후, 일 년에 몇 번인가, 선생, 야스에 편집장, 내가 모여, 비밀회의를 했다(야스에 씨는 고인을 ‘선생’으로 불렀다. 원고의 수수와 보관 등을 돕고 있던 사내의 극소수 사람들은, 나중에 친근함을 담아 ‘지 선생’ 혹은 ‘치 선생’으로 호칭했다. 나도 이후 그렇게 쓴다). 물론 회사에서 만날 수 없어, 별채가 있는 음식점 같은 곳에서 만났다. 나는 다양한 논의를 하는 가운데, 지 선생의 미래를 향한 긍정적이고 풍부한 구상을 듣는 한편, 냉엄한 현실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전략을 들었다. 단기적으로는 비관적인 상황이어도, 선생은 장기적으로는 늘 낙관적이었다.

■ 밑바탕에 흐르는 휴머니즘

선생은 역사를 떠올리며, 세상사는 직선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비극이 새로운 전개를 준비한다, 오히려 좋다고 생각되었던 일이 다음에는 나쁜 결과로 이어진다는 역사의 역설을 설파했다. 예를 들면,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군사 정권이 이웃 나라의 주권을 침범하면서까지 정적을 없애려고 한 이상한 사건이지만, 그것이 일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일본의 대중 차원의 한국 인식을 크게 바꿨다는 사실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1980년의 광주 사건은, 군이 민중에 총을 겨누고 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비극이지만, 그 사건이 초래한 충격이 한국 사회의 시대적 흐름을 바꾸어, 그 후의 민주화를 불러왔다, 고 선생은 생각했다.
선생은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를 항상 질문하면서, 그런 와중에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할 수 있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묻고, 생각했다.

이런 발상도 들었다. 현실은 모순에 찬 다양한 측면이 있으며, 모든 것을 생각하면 꼼짝도 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면 ‘북한의 인권 문제’ 같은. 그때 선생은 “판단을 유보한다”라는 표현을 하셨다. 잊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을 과제로 삼을 수 있을 때까지 굳이 건드리지 않고 놔둔다는 의미다. 나는, 현실을 바꾼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했다. 선생은 늘 온화하고 겸허했지만, 내면에는 열정을 감추고 있었고, 말에는 힘이 넘쳤다.

나는 학생 시절, 독자로서 「한국에서 온 통신」에 느꼈던, 높은 정신성, 윤리성은, 민주화 운동 전체를 관통하는 것임과 동시에, 필자인 선생의 자세, 사상, 철학이 짙게 반영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밑바탕에 흐르는 것은 휴머니즘이었다. 기독교적 휴머니즘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 「한국에서 온 통신」의 탄생 배경

선생은 1960년대, 한․일 조약 반대 의견을 펴는 등으로 대학에서 내쫓겨 잡지 『사상계』 주간으로 군정에 저항하며 싸웠지만, 거기에 너무 지쳐 1972년, 망명에 가까운 형태로 일본에 왔다. 일본에서는 도쿄대학의 연구원이 되어, 정치사상을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 인간을 짓밟는 군부 독재 권력이라는 존재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옆 사람이 죽어 가는데 예술을 위한 예술, 학문을 위한 학문이란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인간적 자산이란 뭔가」)라고, 나중에 썼다.

1972년은, 당시의 대통령 박정희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 체제를 선언, 독재 체제를 강화한 때다. 「한국에서 온 통신」은, 1973년 5월호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편집부에 들어오고 나서도, 부산‧마산 민중 봉기, 박정희 대통령 피살, 서울의 봄(1979년), 전두환 일당의 권력 탈취, 광주 사건(1980년), 랑군 폭파 사건(1983년),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1983년), 6월 민중 항쟁(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1987년)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한국 안에서는, 때려눕히고 때려눕혀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 나날이 그야말로 숨이 막힐 듯한 시대였다. 통신은, 이런 나날을 뒤좇아 가며 썼다.

어떻게 이 「통신」이 쓰이었는가, 오랫동안 비밀이었다. 2003년, 민주화 운동 성과로 집권한 김대중 정권이 끝나는 것을 계기로, 편집장인 내가 선생을 인터뷰해, 『세카이』 9월호에 그 실상을 밝혔다. 『세카이』 발매와 동시에, 한국에서도 「통신」과 관련된 인물들이 기자 회견을 했다.

나는 인터뷰 제목을 「국제 공동 프로젝트, ‘한국에서 온 통신’」으로 했는데, ‘집필자’인 선생만이 아니라, 한국, 일본, 홍콩, 미국, 독일, 캐나다 등에 많은 협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프로젝트였던 때문이다. 활용한 곳은 기독교 네트워크였다.

먼저 다양한 이유에서 일본에 있던 교회 관계자 몇 명이 모여,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인 오재식吳在植 씨는, 미국 기독교인들의 사회 운동을 공부해, ‘조직화의 달인’으로 불렸다. 지 선생이 분석하고, 고발하고, 쓰는 사람이라면, 오 씨는 그것을 지원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들이 한국 안의 교회 동지들에게 연락하고, 거기에서 모은 자료와 정보를 일본으로 보내오는 계획을 세우고, 만들었다. 자료란 지식인과 야당의 성명이거나, 집회나 대학에 뿌려진 전단이거나, 거리에 떠도는 소문이기도 했다. 우편물은 검열되고, 전화는 도청되기에, 자료는 사람이 직접 날랐다. 일본에서 자주 한국을 방문하고, 동시에 한국 교회를 돌아다녀도 의심을 받지 않는 선교사들이 그 임무를 담당했다. 만에 하나 체포되었을 때를 고려, 한국인이 아닌, 독일인, 미국인, 캐나다인, 그리고 많은 일본인이 한국을 왕복했다. 여성도 있었다.

그/그녀들이 가지고 온 자료를 기초로 해 일본에서 「통신」으로 집필한 인물이 지 선생이었다. 이른바 마지막 주자다. 「통신」은 군정이 물러난 1987년을 지나 1988년 3월호까지, 15년간 이어졌다. 매월 50~60매의 원고를 계속 쓴 정열에도 감탄하지만, 그 사이 다수가 관계해 몇 번이나 위기가 덮쳤지만, 비밀이 유지된 것에도 놀란다. 한국 군사 정권은 혈안이 되어 필자를 찾았다. 독일인 선교사는, 몇 번이나 일본과 한국을 오갔는데 군사 정권의 의심을 받아 입국을 거절당했다(그는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광주 사태를 주인공 언론인에게 알리는 선교사다).

당시는 워드 프로세스도 없어, 자필 원고를 편집부에 넘겨야 했다. 야스에 편집장은, 선생으로부터 원고가 도착하면, 그것을 자신이 혹은 시간이 없을 때는 신뢰하는 사내의 제한된 사람에 부탁해 필사해 편집부에 넘겼다. 인쇄소에서 필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경계한 조치였다. 그럴 정도로까지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선생의 원고는, 그 후 야스에 씨가 자택에서 소각했다고 한다. 야스에 씨와 선생의 연락도 공중전화에서 이루어졌고, 협의 장소에는 서로 다른 출입구로 출입했다고 한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세카이』는 금서 취급을 당해,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체포될 위험한 잡지였다. 그러나 다양한 루트로 비밀리에 가지고 들어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 많은 사람에게 건네져서, 읽혔다. 민주화 운동의 일익을 담당하던 목사는, 나중에 “「통신」은 깜깜한 어둠 속을 비추는 한 줄기 빛 같았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다”고. 「통신」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 학생도 있었다. 또 교회를 통해 전 세계로 「통신」은 확산되었다. 한국 안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세계 사람들이 아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민주화 운동과 세계의 네트워크는, 도쿄가 그 거점이 되었다.

자금 면에서는, 세계교회협회(WCC) 같은 곳에서 이 일을 지원했다. 선생의 생활도, 처음에는 WCC가, 이윽고 사정을 아는 교수들에게 초청되어 도쿄여자대학에서 가르치는 일로 유지되었다.

물론 다양한 위험을 인식하면서 『세카이』 편집부를 신뢰하고, 전면적으로 지원한 것은 미도리카와 도오루綠川亨 당시 사장을 비롯한 이와나미서점 경영진이었다.

■ 동지, 야스에 료스케

선생과 야스에 씨의 관계는, 우정과 신뢰로 맺어진 동지 관계였다. 이 동지 관계가 있었기에 「통신」은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었다. 선생은 늘 “「통신」은 야스에 씨와 내 프로젝트”라고 얘기했다. 우정과 신뢰는 평생토록 계속되었다.

야스에 씨는 이와나미서점 입사 후, 미노베 료키치美濃部亮吉(1904~1984년. 일본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정치가. 제6・7・8대 도쿄도 지사) 도쿄도 지사 비서로 한때, 이와나미서점을 떠난 때를 제외하고 일관해 『세카이』에서 활약했다. 1972년에 편집장으로 취임, 창간 이후 요시노 겐자부로吉野源三郞 씨가 육성한 『세카이』를, 아시아 특히 한반도와의 관계를 크게 다룸으로써 일약 주목을 모으는 잡지로 만들고, 나아가서는 일본인의 한국관을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든 출중한 저널리스트, 편집자였다.

그는, 『세카이』에서도, 그리고 많은 자유주의적 논자에게도,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전후 오랫동안 조선에 대한 멸시, 차별, 성가셔 하는 시선이 계속되는데 충격을 받아, 「통신」을 계속함으로써 “한국의 상황을 밖에 호소하는 교두보”로서 『세카이』를 유용하게 써야만 한다, 그것으로 “근대사 속에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사실에 대한 속죄 행위의 첫걸음”(『경계선을 넘는 여행』 - 지명관 자서전)을 삼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러한 편집 활동에서 얻고 싶었던 것은, 한마디로, 한국 혹은 북한, 또는 재일조선인․한국인과의 진정한 화해”라고 하며, “한국의 군사 정권에 대해 강한 비판적 논조를 전개하면서도, 언젠가 한국 전체, 그리고 그것이 남북한과의 화해가 될 날을 소원했다”(『세카이』, 1995년 임시 증간 「패전 50년과 해방 50년」). 야스에 씨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도 다섯 차례 단독 인터뷰를 했다.

“일본에서는 어쨌든 자유로운 언론이 보장된다. 일본 언론은, 한국 등 자유로운 언론이 허용되지 않는 나라의 상황을 밖으로 알릴 의무가 있다”고 야스에 씨는 늘 말했다. “다만, 우리는 안전지대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고도. 한국에서 『세카이』에 개재하기 바라는 논문이나 시가 오면, 싣게 되면 반드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다고, 경솔하게 게재하지 않았다. 야스에 씨의 강한 책임감과 지 선생의 휴머니즘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통신」은 이어졌다.

선생과 야스에 씨 두 사람의 대화 가운데 잘 기억하는 것은, 선생은 자국인 한국의 군사 정권과 사람들을 비판하고, 야스에 씨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 비판을 입이 닳도록 했던 사실이다. 이런 자국 비판이 상대편의 자국으로 바뀐 적은 없었다. 자기비판 정신, 그리고 상대편의 민족, 국민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때때로 선생은 “한국 사람들을 과도하게 영웅화해서는 안 된다, 일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약한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야스에 씨는 그렇게 말해 일본인을 칠칠치 못하다고 하시지만, 이 만큼 일본인이 관여하고 있는데(「통신」의) 비밀이 새지 않는다는 것은, 일본인은 신의가 두텁다는 게 아닐까요”라고 해서 야스에 씨를 쓴웃음을 짓게 만든 적도 있었다.

■ 한․일 심포지엄

지 선생은, 1924년, 평안북도 정주(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어났다. 성인될 때까지 일본 통치 상태였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고, 극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에서 자랐다. 빈곤과 강화되는 일본 군국주의 교육으로 고생했다. 교회와 젊은 교사의 애정만이 구원이었다고 자서전에 기술했다(『경계를 넘는 여행』). 「통신」은 능숙한 일본어로 쓰였는데,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있다. 일본인으로서는 죄송한 마음이지만, T․K生 시대는 아직 식민지 지배 상태에서 성장한 사람이 많아, 소통은 일본어로 이루어졌다. 1945년의 해방은 초등학교 교사로 맞이했다. 1947년, 자유로운 체재가 찾아 남으로 월남, 1948년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했다. 1950년 한국 전쟁에서는 육군으로 징병되어, 통역 장교 등으로 1955년까지 종군했다. 동족이 서로 죽이는 잔혹한 현장과 그런 가운데 발휘되는 휴머니즘이라는 쌍방을 전쟁터에서 목격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고민하면서, 아도르노, 아렌트, 베냐민, 토인비 등을 공부했기 때문이었을까, 선생의 내면에 철학자들의 언어는, 냉엄한 현실을 다시 해석해, 사람들을 격려하고,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하는 언어가 되었다.

선생은 가족을 한국 안에 남겨둔 상태에서, 귀국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가 20년에 이르렀다. 1987년에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나서, 마침내 군사 정권이 물러나고,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부활했다. 민주화와 자유화가 서서히 달성되어 가고, 그것을 보고 선생은 1993년에 귀국을 결단하셨다.

그 후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소장이 되고(2004년까지), 김대중 정권(1998~2003년)하에서는 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을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실현시켰다. 또한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귀국 후, 이와나미서점 사장이 되었던 야스에 씨와 마지막 공동 작업으로, 1995년, 이와나미서점과 한국 크리스천 아카데미 주최 「한․일 심포지엄 – 패전 50년과 해방 50년」을 서울과 도쿄에서 개최했다. 한․일의 지식인, 종교지도자, 저널리스트 들이 참가해, 그때까지 직접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처음 만나 서로 논의하는 마당이 되었다. 서울 심포지엄에는, 바로 전해에 노벨상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 씨가 참가해 한국 언론이 크게 보도했다. 나는 사무국 직원으로 심포지엄 운영에 관여했는데, 오에 씨가 다른 장소에서 한 강연에는 사람들이 강연장 안으로 다 들어갈 수 없어, 입장을 못한 사람들이 닫힌 문의 손잡이를 두드리는 땅울림 같은 소리가 들려온 것을 기억한다. 열광적인 환영 모습이었다. 그리고 서울 참가자 가운데 많은 ‘T․K生’ 그룹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심포지엄 중에, “저는 일본인과는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1970년대, 1980년대에 한국 민주화 운동에 연대하려고 하는 일본인이 있는 것을 알고, 화해할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을 바꿨다”고 토로했다. 또한 심포지엄을 들은 한국의 어떤 식자는, “철두철미, 자기 성찰에 힘쓰는” 일본인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고 그 놀라움을 잡지에 썼다. 정말 이제까지 없었던 한․일 관계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야스에 씨는, 이 한․일 심포지엄에 이어서, 북한도 포함한 한․조․일 심포지엄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1996년, 강연 중에 쓰러져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 민주화 후의 한국 사회에서

사형수였던 김대중이 한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이라, 어떤 의미에서 한국에는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선생은 이 ‘혁명’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연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귀국 후 특히 김대중 정권 이후, 만년의 선생은 깊은 고독 속에 계셨다는 생각이 든다.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나는 현장에 없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식인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민주화 후, 오히려 대중 소비 사회라는 커다란 파도가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삼켜, 곧바로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같은 무렵에 민주화를 실현한 동구 등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보다 풍요롭게, 보다 편리하게, 보다 즐겁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지식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덮쳐 왔다.

선생은 사이드의 『만년 스타일』을 인용하면서, “화해와 결론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으로 절망을 느낀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절망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대에 내 자신은 속해 있지 않다는 것. 자신은 여기에서 사라져 가는데, 지금 전개되고 있는 시대가 자신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T․K생 시대와 ‘지금’」이라고 하셨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까’를 주제로 삼아 살아온 선생에게, ‘이 시대’에 자신은 어느새 속해 있지 않다는 자각은 가혹한 것이었으리라.

2003년에 북한을 방문하고, 그곳의 실태를 본 충격도 있었다. 우연일까, 정해진 길을 벗어나 농촌으로 차가 잘못 들어섰다고 한다. 거기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빼빼 마른 유령 같은 모습으로” 방황하고 있었다고 내게 얘기해 주었다. 엄청난 충격에 “호텔로 돌아와 쓰러지고 말았다”고. “일본 식민지 지배 상황에서도 이 정도로 비참하지는 않았다”라고. 북한 정부 비판을 시작한 선생은, 민주화 그룹에서도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 일본에 대한 강한 관심과 사랑

선생은 야스에 씨 앞에서는 일본 비판, 일본인 비판은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물론 식민지 지배 상황에 억압된 민족의 일원으로 복잡한 심사를 계속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자주 듣는 것이지만, 일본의 사상 풍토 안에 깊은 시니시즘이 있다, 민중이 사회를 바꿔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고, 그것이 일본인의 한국 인식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이 시니시즘은 일본 언론을 덮고 있다, 라고. 어떤 잔혹한 탄압을 당해도, 반드시 다른 내일이 있다고 믿고 일어서 간 한국 민중과의 다름. 그런 견해는 현재 나는, 점점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은 일본 속에서 희망을 보려고도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년. 미술평론가),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1883~1966년. 철학자, 정치가), 난바라 시게루南原繫(1889~1966년. 정치학자) 등, 자신이 얼마나 그들의 말에 용기를 얻고, 살아가는 양식으로 삼아왔는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미키 기요시三木靑(1897~1945년. 교토학파의 철학자)를 인용해, “대상에 대한 강한 관심, 그리고 사랑 없이는 상대를 알 수 없다”고 토로했다. 선생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일본에 소개하는 책과 함께, 『저고리와 갑옷』(1988년), 『한국에서 본 일본』(1993년), 『서정과 애국』(2011년) 등, 일본론도 다수 출판했다. 선생에게는, 일본에 대한 강한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 돌아보면, 우리 일본인에게는, 남․북한에 대한 강한 관심과 사랑이 있을까. 선생의 생애를 더듬으며, 자주 떠올랐다.
(『世界』, 202203월호에서)

http://surprise.or.kr/board/view.php?table=surprise_13&uid=130793
최근 대문글
- 김종익
- 신상철
- 임두만
- 김종익
- 김종익
IP : 122.167.46.x
닉네임
번  호 제        목 글 쓴 이 조  회 누  리 등 록 일
이명박, "BBK는 내가 설립했다" (6) 편집국 237944
10
35
07-05 14:24
[법원제출] 프로펠러 손상 관련 검증에 대한 의견서 (4) 신상철 494877
95
205
06-13 07:16
[법원제출] '제3의 부표'관련 UDT 대원 증언에 대한 의견서 (6) 신상철 565228
70
145
06-30 21:18
[검증] 천안함 '1번 어뢰'는 고철 덩어리 (6) 신상철 474739
91
45
10-28 09:10
[단상] 신에게는 아직 12번의 재판이 남았습니다 (9) 신상철 334678
40
80
07-13 13:35
[공지] 2021. 9. 1일부로 서프라이즈 로그인제를 실시합니다 (0) 서프라이즈 8205
5
25
04-03 20:17
130902
재일 코리언의 삶, 증오에 저항하는 길 ③ 김종익 13
0
0
07-05 09:25
130901
[신상철TV] 주권(主權)을 빼앗긴 국민-재검표? 본질은... 신상철 74
0
0
07-02 10:14
130900
[칼럼] 사진으로 보는 국가원수, 권위는 상대가 인정... 임두만 108
0
0
07-02 10:12
130899
재일 코리언의 삶, 증오에 저항하는 길 ② 김종익 86
0
0
07-01 09:50
130898
재일 코리언의 삶, 증오에 저항하는 길 ① 김종익 169
0
0
06-29 11:22
130897
[신상철 TV] [경찰의 아들] 함안정기편 신상철 126
0
0
06-28 11:28
130896
[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32 강진욱 115
0
0
06-28 08:47
130895
“천안함사건 진실규명은 현재진행형” 사람일보 165
0
0
06-24 15:45
130894
천안함사건, 대법원 판결과 또다른 시작 신상철 158
0
0
06-23 11:54
130893
[신상철TV] [경찰의 아들] 함수편 신상철 108
0
0
06-22 13:51
130892
비난과 찬사 강기석 134
0
0
06-22 10:51
130891
TOD 영상은 이스라엘 잠수함이 아니다 - 신상철 오류 (16) 아이에스2 701
0
0
06-21 12:58
130890
[신상철TV] [경찰의 아들] 함미편 신상철 103
0
0
06-21 10:17
130889
민주당의 성기 정치학과 짤짤이-딸딸이 논쟁 kenosis 36
0
0
06-21 09:33
130888
Rent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 ② 김종익 131
0
0
06-20 09:08
130887
정봉주와 이종원이 열린 심장에 칼을 꽂고, 침을 뱉는... kenosis 53
0
0
06-19 07:33
130886
[신상철TV] 대한민국 경찰여러분! 신상철 140
0
0
06-18 11:27
130885
Rent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 ① 김종익 133
0
0
06-17 14:07
130884
[동영상 칼럼] 한동훈은 성역? 누가 ‘내로남불’을 ... 임두만 153
0
0
06-16 08:15
130883
오늘은 6·15 남북 공동선언 22주년입니다 김용택 121
0
0
06-15 10:03
130882
[신상철 TV] ‘不便한 眞實’의 歷史 신상철 152
0
0
06-14 14:09
130881
[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31 강진욱 123
0
0
06-14 10:30
130880
[동영상 칼럼] 윤석열 공격, 가짜뉴스로는 안 된다 임두만 112
0
0
06-14 10:13
130879
농담과 맷집의 거리, 폭력과 고통에 관한 고찰 김종익 159
0
0
06-13 10:35
130878
교육은 상품(商品)인가 공공재(公共材)인가 김용택 117
0
0
06-13 09:28
130877
정봉주가 열린공감이 돈가지고 싸운다네 kenosis 58
0
0
06-11 08:30
130874
신상철 전 위원 천안함 좌초충돌 주장 명예훼손 무죄... 미디어오늘 213
0
0
06-09 15:21
130873
[속보] ‘천안함 좌초설 명예훼손’ 신상철, 대법원서... 머니투데이 199
0
0
06-09 11:47
130872
[신상철TV] 다음 단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신상철 183
0
0
06-08 09:44
130871
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10억 달러 재정지원을 중단... 시골목사 73
0
0
06-07 19:07
130870
[신상철TV] 최선을 다한 당신! 힘내시라! 신상철 210
0
0
06-03 09:25
130869
진보의 참패… 보수교육 어디로 가나? 김용택 230
0
0
06-02 09:52
130868
[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30 강진욱 199
0
0
05-31 15:22
130867
선관위, 국민의힘 김은혜 후보 ‘재산 축소 신고’ 투... 신문고뉴스 174
0
0
05-31 09:40
130866
[심춘보 칼럼] 참모 뒤에 숨지 않겠다던 윤 대통령은 ... 심춘보 230
0
0
05-28 09:27
130865
[신상철TV] 춘몽, 그는 왜 그곳에 12시간 서 있는가 신상철 198
0
0
05-28 09:10
130864
윤대통령이 만들겠다는 ‘시장경제’의 실체를 벗긴다 김용택 184
0
0
05-27 10:29
130863
[신상철TV] 문꿀오소리들 봉하마을 갔을까? 신상철 246
0
0
05-25 09:11
130862
최강욱 의원에 대한 항소심 선고를 보며 권종상 268
0
0
05-23 09:57
130861
우크라이나 침공의 역사적 문맥과 정치적 논리 ② 김종익 264
0
0
05-19 09:09
130860
[신상철TV] 알면 알수록 화가 나는 전북·남원 신상철 279
0
0
05-18 08:53
130859
피의 역사... 5·18광주민중항쟁 김용택 238
0
0
05-17 09:27
130858
우크라이나 침공의 역사적 문맥과 정치적 논리 ① 김종익 268
0
0
05-16 08:43
130857
식량안보를 위해 우리나라 최대 농경지 천수만 소각장... 시골목사 88
0
0
05-14 13:44
130856
[신상철 TV] 이해학 목사님과의 대화 - 호남은 한반도... 신상철 240
0
0
05-14 11:38
130855
윤석열대통령 ‘반지성주의’ 말할 자격이 있나 김용택 263
0
0
05-13 09:23
130854
[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29 강진욱 239
0
0
05-11 09:59
130853
언론이 오도하는 우크라이나 사태 ② 김종익 250
0
0
05-11 08:36
130852
[신상철TV] 경남 통영 미분류표 어떻게 분류됐을까? 신상철 188
0
0
05-11 08:32
130850
언론이 오도하는 우크라이나 사태 ① 김종익 300
0
0
05-09 11:25
130849
정경심 교수 사면복권을 요구함 강기석 263
0
0
05-06 08:30
130848
문재인대통령님, 대한민국 역사에 오명을 남기십시요. kenosis 80
0
0
05-06 08:13
130847
[민주당] 감동이 사라진 곳에 권력투쟁만 남았구나. kenosis 69
0
0
05-06 07:53
130846
[신상철TV] 전북의 무소속바람 태풍된다 신상철 208
0
0
05-04 14:02
130845
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법률 공포안 의결 사람일보 192
0
0
05-04 09:52
130844
[동영상 칼럼] “검수완박? ‘검찰권력제한법’이라고... 임두만 185
0
0
05-04 08:42
130843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끼워넣기’ ‘먹튀사면’ 안... 김용택 207
0
0
05-02 09:02
130842
우리는 왜 우크라이나 10억 달러 지원을 반대하는가? 시골목사 84
0
0
04-30 11:37
130841
오지라퍼의 한숨 권종상 269
0
0
04-29 08:56
130840
문재인 대통령 비판자들을 비판함 강기석 284
0
0
04-27 11:08
130839
[신상철TV]여러분의 지지와 공감이 필요합니다 신상철 217
0
0
04-27 09:06
130838
한번만 더 사과하라고 하면 니 아가리를 찟어 놓겠다. kenosis 113
0
0
04-25 11:16
130837
미군기지 자주평화 원정단 소식 조헌정 목사 237
0
0
04-25 11:03
130836
조민을 노래하다. kenosis 87
0
0
04-25 10:54
130835
민주당비대위에 피가 꺼꾸로 솟는다. kenosis 265
0
0
04-25 10:07
130834
“자정능력 없는 것이 검찰의 현실” 사람일보 221
0
0
04-25 09:42
130833
강동원 남원시장 예비후보 총 66편의 유튜브 정책홍보... 이주연 211
0
0
04-22 10:11
130832
[신상철TV]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 신상철 253
0
0
04-21 09:17
130831
[데스크에서] 윤석열엔 ‘신속’ 조국엔 ‘하세월’ ... 임두만 241
0
0
04-20 08:29
130830
왜 우리는 ‘생각’을 하고 투표해야 하는가 권종상 256
0
0
04-19 10:32
130829
4·19혁명 62주년을 통해 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김용택 208
0
0
04-19 10:17
130828
[심춘보의 노변정담] 문재인 정부와는 다르다면서요. ... 심춘보 254
0
0
04-18 09:59
130827
[신상철TV] 세월호 8주기 특별방송-급선회, 사고의 ... 신상철 255
0
0
04-17 09:30
130826
[신상철TV] Tracking the Truth of Sewol USA 2 신상철 238
0
0
04-16 08:58
130825
한동훈 뿐이랴. 기대한 것 이상을 보게 되리라 권종상 465
0
0
04-15 10:04
130824
[신상철TV] Tracking the Truth of Sewol USA 1 신상철 221
0
0
04-15 08:50
130823
[연재]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28 강진욱 243
0
0
04-13 10:48
130822
[신상철TV] 2022 대선 선거무효소송 접수 신상철 296
0
0
04-13 09:45
130821
“ ‘법치’는 윤석열 가족에게도 적용되어야” 사람일보 273
0
0
04-08 13:47
130820
무엇을 기대해도 그 이상을 보여줄 굥산군과 언... 권종상 323
0
0
04-08 08:58
130819
[신상철TV] 주권(主權)을 스스로 포기한 국민. ‘나라... 신상철 314
0
0
04-07 12:33
130818
6.1 지방선거 여론조사 방식 문제 심각 진실의길 263
0
0
04-06 13:36
130817
조민이 입학 취소된 날, kenosis 143
0
0
04-05 22:57
130816
[신상철TV] 개딸들, 참 이쁘다. 허나 대깨문 팬덤현상... 신상철 268
0
0
04-05 14:28
130815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권종상 278
0
0
04-05 08:32
130814
‘약자 배려’는 헌법의 기본가치입니다 김용택 205
0
0
04-04 09:21
130813
[신상철TV] 이재명 후보님께 드리는 말씀 신상철 283
0
0
04-01 09:39
130812
천안함 침몰사건 12년 지났는데도 논란 해소되지 않은... 미디어오늘 444
0
0
03-30 15:51
130811
[신상철TV] 청와대 비서실장께 보낸 서신 - 이것은 ... 신상철 262
0
0
03-30 14:01
130810
[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27 강진욱 243
0
0
03-30 09:53
130809
정경심을 노래하다 kenosis 136
0
0
03-29 13:26
130808
천안함 사건 이후 12년 (1) 권종상 419
0
0
03-29 09:40
130807
文 긍정평가 46.7% 윤 당선자보다 높아… 정당지지도 ... 임두만 208
0
0
03-29 09:27
130806
문재인 대통령께 드리는 여덟 번째 브리핑 신상철 289
0
0
03-26 10:58
130805
[신상철TV] 이재명 후보님 이의신청해 주십시오 2 신상철 331
0
0
03-24 13:26
130804
5년 임기 위해 1조원 이게 국민을 위하는 일인가 김용택 326
0
0
03-24 13:19
130803
[신상철TV] 이재명 후보님 이의신청 하십시오 신상철 396
0
0
03-23 12:38
130802
[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26 강진욱 257
11
0
03-23 08:57
130801
[신상철TV] 개표부정의 핵(核) - 미분류표 신상철 289
0
0
03-22 14:31
130800
판문점선언 완수하는 민생통일 대통합정권을 향하여 ... 박해전 229
0
0
03-22 14:03
130799
[연재] 지금, 이 혹성에서 일어나는 일 27 김종익 206
0
0
03-22 09:22
130798
[데스크에서] 尹 용산 집무실 선언, ‘후보공약과 당... 임두만 262
0
0
03-21 10:12
130797
[신상철TV] 수개표에 준하는 시스템 제안 신상철 281
0
0
03-18 09:20
130796
아이들에게 ‘욱일기’와 ‘야스쿠니’를 꼭 가르쳐야... 아이엠피터 247
0
0
03-17 09:46
130795
[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강진욱 279
0
0
03-16 08:34
130794
[신상철TV] 합리적·합법적·합헌적 선거시스템 하에... 신상철 249
0
0
03-15 12:54
군부 독재 시대에서 온 편지 김종익 275
0
0
03-15 08:44
130792
‘윤석열·김건희 의혹’ 조사청원 20만 넘어 사람일보 283
0
0
03-14 13:53
130791
연예인급 미모? 한국 언론 극찬 ‘대만 김건희 기사’... 아이엠피터 338
0
0
03-14 09:45
130790
미국이 보수정권 당선시킨 증거와 부정선거 아고라 50대... 190
8
0
03-14 01:23
12345678910 ..1137
버그신고,시스템문의 | 오픈개발
민진미디어소개 | 개인정보취급방침 | 회원약관 | 광고문의 | Copyright ⓒ 민진미디어.
운영문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3 진미파라곤 930호 T. 02-761-1678 F.02-6442-0472 poweroftruth@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