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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옵티머스 사건, 윤석열 지검장은 감추고 싶었나?”
  번호 127049  글쓴이 아이엠피터  조회 357  누리 5 (0,5, 0:0:1)  등록일 2020-10-22 08:30 대문 0

김남국, “옵티머스 사건, 윤석열 지검장은 감추고 싶었나?”
(WWW.SURPRISE.OR.KR / 아이엠피터 / 2020-10-22)


‘옵티머스자산운용 펀드 사기 사건’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법제사법위원회 김남국 의원(안산시단원구을)은 “지난 2018년 서울중앙지검이 옵티머스 피해 사건을 ‘엉터리 봐주기 수사’를 하고, 불기소처분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으로 강한 의심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김 의원은 의심의 근거로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이하 진흥원)으로부터 받은 수사의뢰서와 서울중앙지검이 발급한 처분결과 증명서 등을 공개했습니다.

공공기관 매출 채권 투자한다던 ‘옵티머스’ 알고보니

진흥원은 지난 2017년 6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방송통신발전기금과 정보통신진흥기금 748억 5000만원의 자금운용을 위해 대신증권 및 한화증권, 옵티머스 자산운용 등을 통해 투자했습니다.

옵티머스는 공공기관 매출채권에 투자하여 연 3%의 수익을 보장하는 안전한 상품이라고 소개했고, 법인 고객들은 이를 믿고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진흥원은 투자금이 공공기관의 매출채권 매입이 아닌 성지건설을 인수하는 데 사용한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진흥원은 “판매사인 대신증권과 운용사인 옵티머스 자산운용이 진흥원을 기망하여 투자제안서 상 투자할 수 없는 엠지비파트너스 사채에 투자하여 제3자의 이익을 도모한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다”면서 서울중앙지검에 ‘대신증권 주식회사’와 ‘김재현 옵티머스 대표’, ‘정영제 옵티머스 대체투자 대표’, ‘박준탁 성지건설 이사’ 등에 대한 수사의뢰서를 제출했습니다.

사기 피해 막아 달라 수사 의뢰했는데, 무혐의 처분 내린 검찰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이 2018년 10월 의뢰한 옵티머스 수사의뢰에 대해 검찰은 2019년 5월 22일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진흥원 측은 2020년 10월 19일에 이 사실을 알았다. ⓒ김남국 의원실 제공

서울중앙지검은 진흥원의 옵티머스 사건 수사의뢰에 대해 지난해 5월 22일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습니다.

사건처분결과 증명서에 첨부된 처분결과 이유를 보면 대신증권에 대해서는 ‘범죄가 인정되지 않으며 혐의가 없으며, 성지건설 주식회사의 주금 납입을 가장하였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은 김재현 옵티머스자산운용 대표이사와 정영제 옵티머스자산운용 대체투자 대표, 그리고 박준탁 성지건설 이사 등에 대해 각각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습니다.

김남국 의원은 처분결과 이유에 이상한 대목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유서에는 ‘우리 청 수사사무관 작성 의견서 기재와 같다’와 ‘위 의견서 기재 수사결과 및 의견을 원용한다’등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 정작 의견서는 첨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진흥원 측도 해당 의견서를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무혐의 처분 통보하지도 않고 재수사하는 검찰

2019년 9월 진흥원 직원 1명은 서울남부지검에서 조사를 받습니다. 검찰은 올해 7월과 10월에도 진흥원에 수사협조를 의뢰했습니다.

진흥원은 당연히 자신들이 2018년에 수사의뢰한 사건이 중앙지검에서 남부지검으로 이첩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진흥원이 의뢰했던 사건은 이미 2019년 5월 22일에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고, 해당 사건을 다시 수사하기 위해 수사협조를 구한 것입니다.

검찰은 진흥원이 2018년 10월에 수사의뢰한 사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한 사실을 2020년 10월 19일에서야 알려줍니다. 지난해 9월, 즉 무혐의 처분이 내려진 뒤에 조사할 때도 검찰은 진흥원 측에 불기소 관련 통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현행 검찰사건사무규칙 제143조(내사·진정사건의 처리 등) 제5항에 따르면 사건사무담당직원은 처리결과를 진정인 등에게 통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진흥원 측 담당 변호사가 검찰에 수사 진행 사항을 문의했으나 무혐의 처분 결과나 재수사 여부 등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2018년에 제대로 수사했으면 큰 피해 막을 수도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이 2018년 10월 검찰에 제출한 수사의뢰서. 다수 선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어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남국 의원실 제공

김남국 의원은 “당시 중앙지검의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수사로 인해 옵티머스 사건 피해가 더욱 커진 측면이 강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진흥원 측이 검찰에 제출한 수사의뢰서에는 “불법행위 결과 판명 시 다수 소액주주 등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된다는 점에서 그 책임자를 찾아 응당한 법적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김 의원은 “무혐의 처분 과정이 문제 투성이라는 점에서 그 과정을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면서 “일련의 과정을 미루어 보았을 때 당시 서울중앙지검이 엉터리 봐주기 수사를 하고, 불기소처분을 한 뒤 의도적으로 숨긴 것은 아닌지 강한 의구심이 든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사건은 서울중앙지검이 담당했고, 현재 검찰총장으로 있는 윤석열 총장이 서울지검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였습니다.

http://surprise.or.kr/board/view.php?table=surprise_13&uid=127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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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장로교를 뒤흔든 3천만환 사건

사깃꾼 걸려 -신사참배 거부한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박형룡을 치리하려 들었는가?





3천만환 사건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4811

박형룡의 3000만환 사건을 다시 보다

WCC 논쟁 … 반세기 지나 되풀이 되는 갈등의 거울 삼아야




이범진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다루던지 긍정적으로 다루던 지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바’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은 -어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분열을 야기했다. 그러나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한 분열은 그의 믿는 바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었고, 최선의 방향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다는 데에서 그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믿음에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데에는 진정성이 보인다. ‘믿는 바’와 ‘행동’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유일한 ‘돌출’이 발견된다. 이른 바 3000만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의 ‘믿는 바’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룬다.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박형룡에게 있었던 3000만환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표현’과 ‘의미부여’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wcc 사건을 첨예하게 부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개인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다가 좌절한 단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살핌으로써,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는 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이른바 3000만환 사건

박형룡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이른바 3000만환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적인 평가를 하려는 이들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3』은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교장이던 박형룡은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다.(92쪽)



3000만환은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억원에 달한다.
한 학교의 교장이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3억 원을 ‘교섭비 명분’으로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은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58년 신학교 이사회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역사신학자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당시 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이신덕(1909-1994, 경성제대 법대)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박호근이었다. 박호근은 자신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기지 불하를 의뢰하고 총회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박교장의 결재를 받아 30,162,172환을 이사회의 승낙 없이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박호근이 사기를 친 것이었고, 그것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박용규는 3000만환 사건을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사기’를 친 박호근이라는 사람과, 그를 소개한 박래승과 이신덕의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순수함’은 이 사건에서 객체로 남고, ‘사기꾼’ 박호근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이 들었을 그 ‘말’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사회도 모르게, ‘3억원’을 지불하도록 결재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말이다.



이에 대해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는 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장로 직함을 가진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교장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부지 불하, 건축허가, 학교의 대학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였다.(364쪽)



‘허풍을 떨면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숭의학교 교장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1953년 4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은 그녀에게 ‘사기꾼’ 박호근은 실력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형룡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은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은’ 그는 박호근에게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명목으로 불과 두달 만에 3000만환을 지불했다. 오늘 날 3억에 달하는 이 돈이 두 달만에 사라졌다.



물론 결과는 대지 불하, 건축 허가, 대학 인가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호근은 그 돈을 접대비, 교섭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받았다. 그 당시에 그가 대지 불하 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었다. 사용목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방법은 분명 불법적인 경로였다.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김인서,『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23-25쪽)



결과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박호근 자신도 그가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 방식을 박형룡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기’를 진행하는 데에 돈을 지불한 그 자신도 공범이 되어야 맞다. 아니면 불법적 방법은 그렇다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니 ‘사기’라는 말인가?



그런데 박호근의 반응이 흥미롭다. 보통의 다른 사기꾼들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형룡 박사를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결국 김인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 나가 심문 당하고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으면, 이 문제를 3억원대 ‘사기’와 맞바꾸어야 했을까? 1만 달러는 우리가 본 ‘3000만환’에 포함된 돈으로 보인다(3000만환중에서, 미국에서 온 ‘1만불’(8,800,000환)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북장로교 측 3,000불(2,500,000환), 특별비(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 30,162,172환이었다).



미국에서 온 1만불의 불법적 환전을 지시(실행)할 정도로 박형룡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체가 된 이 사건이 밝혀지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배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앞서 박용규가 주장한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적확한 평가를 덮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변화를 가져온, 세속적 사건



이러한 사건 정황에 빗대어 봤을 때, 박형룡의 사표 수리가 이루어진 1958년 3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충격적이다. 사표 건에 대해서 이사 38명중 20명이 찬성을 하고, 17명이 반대를 한 것이다(1명 기권). 적어도 17명은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이 계속 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사회가 “그것이 고의가 아닌 사기”라는 점을 감안해 “교장사표는 반려하고 대신 불법 지출한 삼천만환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파동 주택(당시 시가 800만환)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했을 때 박형룡의 측근들은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태의 매각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실책을 범한 박형룡을 끌어안은 이유는, 그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을 밀어내려고 하는 세력은 결국 보수, 정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장로교의 자유, 진보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설득전을 펴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를 들고 나왔다.(<기독공보>, 1959.10.5) ‘세속적’ 문제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이를 두고 이영헌은 『한국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면서도 박형룡 박사의 인책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323쪽)



물론, 박용규는 이를 부정한다. 3천만원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측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갈등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박형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동민의 생각은 좀 다르다. 3천만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전의 박형룡은 wcc에 대해서 부드러운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온건한 반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사기를 당한’ 이후에는 급격히 강경해졌다며, 신신학과 단일교회의 두 가지가 쟁점이었는데 ‘용공주의’ 하나가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글(『현대신학비평』제12장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 1972)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3천만환 사건이 있기 전 1958년 3월에 썼던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통일에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교리 무관심주의로 인하여 결국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변해가며, 심지어 이교도까지도 허용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의 글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되는 성명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wcc의 용공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81쪽)



그의 신학적 변화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3천만환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세속적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한 신학’으로 향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wcc논쟁을 보다



사회학자 노치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세속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 분열 현상은 세속화의 추세와 밀접하다는 주장이다. 즉 세속화의 추세에 대한 수용과 저항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고 말이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도, wcc를 지지하는 측은 세속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측은 세속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노치준은 wcc운동이 세속화의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세속화에 대해서 피터버거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요약하면, 제도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인간 의식의 측면에서 이 영역들이 교회의 통제, 권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박형룡은 1976년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아들 박아론의 글이 총신대 학장과 교수진에 의하여 거절된 사실을 접하고 “총신대학의 좌경화의 뚜렷한 징조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세속화를 거부했던 박형룡은, 박호근이 추진했던 세속적인-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역으로 그의 ‘믿는 바’ 신학마저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신학의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갔던, 큰 신학자 박형룡의 생애에 돌출 된 부분으로 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wcc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신학적 영역에서 보기 보다는, 지역적, 역사적, 당파적 영역에서 보아야 그 첨예하고 해묵은 갈등이 바로 보일 것이다. 해법은 물론, 그 안에 있다.







http://reformednews.co.kr/921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총회신학교(박형룡 박사) 3천만환 재정 사고와 그를 이용한 음모

소재열 | 기사입력 2009/08/09 [12:58]



금년 2009년 9월에 소집될 제9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꼭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리폼드뉴스>는 기획연재 시리즈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왜, 무엇 때문에 분열했는지,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입장에서 연재한다. 본 연재는 소재열 목사가 집필하여 곧 출간하게 될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의 일부 내용을 요약해서 연재하게 된다(리폼드뉴스 편집부).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1) 사건을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합동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이용한 W.C.C.측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총회 안에서는 W.C.C.와 NAE라는 두 세력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대립의 씨앗이 발아 되어 갈등관계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갈등과 대립은 이미 1959년 제44회 분열 총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 3천만환 부정지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본다.2) 이러한 시각이 W.C.C.을 지지하는 통합측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W.C.C.의 신학적인 문제로 반대했던 합동측에서는 W.C.C. 운동과 그 신학을 은폐하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3)



이 같은 두 대립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논리이며 분열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확보하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책임을 논할 때에는 양측이 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분열이후 정통성이 자신들의 총회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설명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역사는 주관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그 시대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배경을 살펴서 과거 치열했던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 받게 될 것인지 추적하게 될 것이다.



통합측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으로 전개한다.4) 민경배 교수는 “분열의 기원이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 기금 유용에서 유래된 교장 사임과 관계가 있고 더욱이 에큐메니칼의 중상이라는 박형룡 일파의 소행에서 결국 왔다고 한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5)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에게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진현 목사의 말대로 역사를 그렇게 창작하면 안 된다.6)



조동진 박사는 ‘총회신학교 건축기금의 실체와 그 오용(誤用)에 관한 진상’에 있어서 그 헌금이 어떻게 박형룡 박사에게 전해졌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불법으로 지출했다는 신학교 건축기금 3천만 환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의 장로로 미국의 대 은행금용기업가가 개인적으로 친구로서 교장 박형룡에게 보낸 1만 달러 개인수표와 별도로 공식으로 보내진 10만 달러 중에서 지출한 것이었다. 제 십장로교회 장로의 이 특별헌금은 본래는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세속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불신하는 제 십장로교회의 미국 은행금융가의 거물 장로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통해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원하여 준비된 돈이었다.



1956년 “한국NAE” 총무였던 필자는 WEF 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헌금자는 자기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신학교 교육기금의 제1차 헌금액이 10만 달러였다. 필자는 이 신학기금이 한 교파의 신학교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보다는〈한국복음주의신학교 육재단〉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수령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재단기금으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수의 봉급 지원과 교수 양성 장학금과 건전한 신학 교재의 출판과 세계 수준의 신학도서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WEF 총무에게 보냈다.



그러나 WEF 국제총무의 견해는 달랐다. “이 돈이 장로교 장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신학교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인 박형룡 교장을 믿고 그에게 보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의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적극 만류하였지만 필자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헌금이 교장 박형룡을 통하여 총회신학교에 보내어진 것이다. 제 십장로교회는 끝까지 연합장로교회가 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는 탈퇴하여 지금은 70년대 후반부터 PCA 장로교회 총회에 속하여 있다.”7)



요약한다면, 그 특별헌금은 교장 박형룡의 총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지 그를 축출한 미국연합장로교회 산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장 박형룡이 남산에 있는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하여 3천만 환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지불한 것은 행정상 과오이기는 하지만 그 지불의 결과로 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 불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부터의 헌금이 선교부를 통하지 않고 교장 박형룡이 수령한 것부터 문제를 삼고자 했던 선교부로서는 그것을 교장 박형룡 축출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교장의 행정적 실수를 구실로 박형룡을 추방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는 새 교장을 세운 연합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책에 합치된 신학교로 개편하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박형룡 박사의 진술서를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 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같은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숭의학교의 기지 불하 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OOO불(환액 8,8OO,OOO 환), 북장로 선교부에서 5,OOO불(2,500,OOO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 산액 중 13,807,042환, 1958 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 사건을 추진 중 일부 이사는 격려로써 속히 추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계셨으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만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논하여 지출된 것이므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서 온 돈 10,OOO불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이므로 내 친구로부터 내게 보내 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 경상비에서 임시로 17,973,742환을 유용한 것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려고 생각하고 지불한 것인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8)



총회에 보고 된 이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박형룡 교장께서 교장직을 사임하셨음으로 이를 수리하였사오며”라고 기록하였고 “후임 교장이 선출된 때까지 교장 대리는 총회장으로 하되 이사장이 협동케 하였사오며”9)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박사 사표수리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바쳐 온 박형룡 박사의 사표가 이사회에 의하여 수리되었다. 이사회 전체 회의는 3월 10일 오후 3시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회되어 8일 오전 1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교장 사표수리는 7일 밤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다(밤 회의는 인톤 선교사 집에서 열림). 회의는 이사장 인톤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참석 이사는 42명 중 38명이고 가 부 투표에서 20:17 기권 1표로 수리되었다 한다.



동 회의에서 교장 사표수리에 대한 결정에서



① 1958년 3월 7일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대전제일교회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은 총 38표 중 가 20, 부 17, 기권 1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과장 박내승 씨도 역시 가 30, 부 7, 기권 1로사표가 수리되었다.



② 1958년 3월 8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장 인선위원 9인을 선임키로 하고 선교회 3인, 이사회 3인, 실행이사회 3인을 결정하기로 하고 후임 선정위원으로 선교사 대표 인톤 감부열 감의도 실행이사 대표 전필순(미참 경우에 노진현) 김윤찬, 김재석, 전체 이사 대표 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하였다.



③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박 박사가 계속 집무할 것



모 이사는 회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교장서리를 권세열 교감으로 추천하는 동의 제청이 있었으나, 총회 결의를 상기시키면서(초대 교장엔 선교사도 무방이나 2대 교장 이하는 한국인으로 할 것) 총회 결의가 번복되기 전에는 될 수 없다고 하여 선교사가 교장 사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한편 후임자 결정에는 전체 이사회의에서 2/3의 표를 획득하여야 하며 총회(금년 총회는 금년 9월에 회집 됨)에서 인준을 받아야 정식으로 교장으로 취임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취임은 일러도 10월 초순에야 가능.

한편 사무처장 박래승 목사의 후임은 4월 11일에 회집할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 하며, 총회 인준 여부에는 관계가 없다 한다.10)



제43회 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교장직 사표를 내고 명예교수로 있도록 하면서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 후 신학교에서 물러나서 쉬었고 그가 가르치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천만 환 사건은 수습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43회 총회는 신학교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조직케 하였다. 이를 위해 1959년 1월 20일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새로 조직되는 이사회가 모였다.11) 안광국 목사는 NCC측 인사로서 그가 집필한 「장로회신학대학 70년사」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NAE측은 신학교 3천만환 사건을 무마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재임케 하기 위하여 실행이사를 유리하게 선임코자 했다. 저희들의 비밀히 추천한 실행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환수, 정선득, 양화석, 송암석, 나기환, 노진현, 정일영, 황병혁, 김수영, 전제영, 김윤찬, 황득환, 김치선 등이었고 이사장으로 보이열 목사를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당선된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 안두화, 부 : 김석진

서기 : 안광국, 회계 : 위두찬

실행이사 : 안두화, 김석진, 권세열, 양화석, 보이열, 김재철, 노진현, 계창봉, 이환수, 김재석, 위두찬, 김윤식, 안광국, 황병혁



이상 14인 중 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외에는 다 탈락이 되고 말았음으로 이사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고, 저희는 박형룡 박사의 구명운동이 실패함을 느꼈다.”



이렇게 역전 되기까지 NCC측의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 지휘한 결과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하였다.12)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 사표수리는 총 투표수 38표 중 가 20표, 부 17표, 기권 1표의 근소한 차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처장 박내성의 사표는 압도적인 가표로 가결되었고,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기 전에 신학교 이사회는 회합을 갖고 후임 교장을 선출키 위하여 투표에 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명되었다.



교장 지명투표 - 게일승 19표, 명신홍 17표, 기권 2표

교장 선거투표 - 계승일 가 18표 부 19표 기권 1표



교장 선임에 실패한 이사회는 다시 인선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안두화, 김석진, 노진현, 권연호, 김재석, 안광국, 김윤찬. 그러나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시비로 인하여 비상정회가 되자 교장선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이것이 분열 전의 마지막 이사회였다.13)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으로 처음에 준비한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였다.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지도 과정에서 본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논문을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이 더 권위있는 논문이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지도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장로교회 분열사>가 탄생되었다. 본 논문은 공적 문서를 기준으로 신국판 500여 페이지로 준비된 논문이다. 곧 출판된다.









치마를 벗고 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오늘의 사태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이 되어야 한다...



[7/7] 눈팅1 IP 121.254.16.x 작성일 2009년1월11일 09시49분

제가 써프에 자주 들어와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님의 글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자료 첨가해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그 노고와 정성에 감사드리며....



귀하가 서프라이즈에 올리는 기독교 신사참배 문제와 여러 목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서프에서 귀하가 올린 글만 수십차례(우연히 클릭)해서 읽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님이 이상한 글을 올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정독한 결과 내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나는 교인인데 평소에 교회의 죄악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고 신사참배 건도 문제가 있는 것만 피상적으로 알았지, 귀하가 올린 내용처럼 그렇게 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 백정짓이 해방 후에 자행됐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노하였습니다.



나는 귀하의 글 애독자가 되었는데 서프에 들어와서 귀하의 글을 어떻게 찾냐면 자극적인(?) 제목을 우연히 클릭하면 귀하의 반가운 글이 있고, 예전에는 귀하가 ★▶ 이런 찐한 별표, 화살표 문양을 제목에 넣어서 제가 얼른 알아차리고 클릭해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서프에 와서도 시간을 많이 쓸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글이나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귀하의 글을 찾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부디 귀하의 글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직 귀하가 링크한 파일은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클릭해서 다운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내 조심성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어떤 경건한 개혁목사이자 신학자는 당시의 썩어빠진 사이비 목사들을 향해 "잡종 성직자" "우상의 목자" "바벨을 사랑하는 자"라고 격하게 비판하였더군요. 나는 이 말이 오늘의 많은 사이비 목사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진실하게 믿어보고 이웃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부족한 저에게는 한국교회의 과거 어두운 역사와 현재 많은 목사들의 더러운 행태를 알려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그럼...





출옥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신사참배 찬성파들이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면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예측 대비할 수 있고, 잘못된 미래를 막기 위한 예방 효과를 갖는다. -김두식 교수





아래가 어느 분이 여러해전 "성경 다음으로 보관 하겠습니다!!"라고 댓글을 올린 글



치마를 벗고◆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수치의 순간



◆강조점들을 컬러처리하여 기억하기에 좋게 만들었사오니 저장해 두시어 여기저기 게시판들에 푸기 등 많은 이용바랍니다. 서문은 맨뒤로 옮겼습니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숫처녀가★갈보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났습메

한국교회는 이 공적인 불경건 죄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교단적으로 회개를 한적이 없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교 총회가 일본 우상에 절하는 것에 찬성을 가결하였는데 여기에 맹렬히 반대한 소수의 목사님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평양의 주기철 목사(1897-1944, 경남)는 양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남출신인 한상동 목사(1901-1976)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이고 다녔다



한상동 목사(평신, 고려파 총수, 고신대학장)

그리고 만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메이쳔파 선교사인 한부선 선교사(1903-1992년, 나중 고려파에 가담)가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2차대전 발발후 귀국보다는 감옥행을 택하였다가 나중 포로교환 때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지도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옥중 교인들의 특별기도회의 결과 1946년 9월 20일 개교했다. 고려학교를 설립한 후 앞줄 왼쪽부터 한부선, 주남선, 박윤선, 한상동. ⓒKPM



이러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닌 목사, 전도사들의 숫자는 많지는 않다. 현재 충현교회 원로 목사인 김창인 목사의 경우는 반대하다가 만주로 도망을 가서 신앙적인 정조는 지킨 셈이다. 신학교는 1950년대 말에 가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고 있는 바는 목사는 당연히 이러한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에스겔 3 :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에스겔 3 :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일본우상에 절하는 것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순교자의 수는 약 50명이고 고문과 옥중기아와 추위(영하 40도)를 견디어내고 출옥한 성도들의 숫자는 20여명이다. 그래서 이들을 “옥중성도(獄中聖徒)”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고 부른다.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출옥성도들, 유명한 사진인데 구하기 힘든 고화질 저장바람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다.)



해방이 되자 일본우상에 절한 목사들은 면목을 잃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옥중성도들은 배도한 한국교회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2천명 정도 되는 장로교 목사들은 자신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이에 대하여 반발하고 저항을 하게 되었다. 출옥성도들이 제출한 회개법안이란 것은 단 2개월의 자숙기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반발 한 것이다. 만주로부터 귀국한 평신교수였던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졸업, 평신, 고신초대교장, 총신 교수 역임)가 수양회 도중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자 다음날부터 강사자격을 박탈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평신교수, 고신교장, 총신교수)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습격되어 구타 고문 당한 후 해산된 것같은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벌어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3년동안 목회를 못하고 그 동안에 지하에 있던 목사들이 교회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아마도 99.9%가 넘는 양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편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50대의 목사들조차도 자세한 얘기는 거의 모른다. 아니, 아예 관심 대상조차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식(歷史意識)의 결여(缺如)를 볼 수 있고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가 있는 것이다.



1951년에 6.25중 부산에서 장로교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배도한 목사들이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제명해 버렸다. 그리고 시무중인 예배당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요새 어느 토론장에 어떤 분이 “■나성한인교회 속보” 하고 올려놓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출옥성도중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저항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대부분의 성도들 약 4백명과 예배당을 내주고 나와 맨땅 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때 초량교회를 접수한 목사가 년전에 세상을 뜬 1958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한 노진현목사이다. 당시 초량교회에 남아서 예배당을 차지한 교인들 수는 구영기 목사, 양성봉장로 등 20명 정도이다.



위에서 구영기 목사는 예배당을 내주고 나온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스스로 말하기를, 인간취급을 못 받았고 경남지사로 이승만 박사의 총애를 받던 양성봉 장로는 훗날 60년대에 세상을 뜰 때 당시의 잘못을 회개(悔改)하고 한상동 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 탈취한 당시 장로교 총회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출옥성도는 내주고 나왔으나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교회는 그렇게 탈취가 용이하지 않았다. 피땀 흘려 세운 예배당을 쉽게 내주리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약신 목사(1952년 고려파 1대 총노회장, 이효재 교수 부친)등이 시무하던 교회 등은 탈취할 틈새가 없어서 탈취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총회측(당시에는 합동과 통합측이 나뉘기 전)에서는 법정에 소송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고소할 것을 금지하는 유명(有名)한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6 : 1-7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위 총회측의 “법정 고소”에 대하여 “응소”한 분이 1930년대 한국교회에서 주초문제 등 절제운동을 하기도 한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1897-1978)이다. 그래서 장장 10여년 세월에 걸쳐서 대법원에까지 올라가는 법정 공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1896-1980, 고신의 행정지도자, 속칭 ‘부곡사단’ 총수)

총회측에서 출옥성도측을 고소한 이유는



☆ 재산이 탐나고 또 교인 이탈을 막고자 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다음과 속셈이 있었다.



☆ 즉 “출옥성도라는 사람들이 뭘 세상 재산에 관심을 갖느냐?”는 식으로 망신을 주고자 하는 비열한 계산.



☆ 또 고소한 인간보다는 고소를 당하는 쪽이 시달린다는 것을 이용하고자 아는 속셈과



☆ 고려파 내부를 흔들어 놓고자 하는 교활한 착상.



아닌 게 아니라 우선 고려파 내부에서 논란이 심하게 일게 되었다. 즉 박윤선 교수가 응소를 극력 반대하여 송상석 목사와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윤선 교수(1905-1988, 평북 철산, 고신교장, 총신교장, 합신교장)

박윤선 교수는 앞서의 ‘고린도 전서 6장’을 들어 여기에 위배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하였고 이에 항거하는 송상석 목사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고소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응소한 것이다.



* 위 구절은 같은 형제간의 문제이다. 갈려져서 서로 “치리기관”이 다르니 총회측과 고려파측이 서로 잘못이 있을 때 내부적인 치리를 할 수 없으므로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10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의 항거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런데 1960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갈릴 때 합동측 목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과거 출옥성도들을 쫓아낸 것을 사과하고 하나가 되자 했을 때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한국 보수신앙의 위기였기 때문에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내세우고 합동하게 되었다. 이때 합동총회의 사회를 본 분이 바로 송상석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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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총회장을 한상동 목사가 연임했으니 처음 약속과 달리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나가므로 부득이 다시 분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상동 목사의 1962년 ‘복교선언’이다. 이때 경남노회 소속의 고신측 교회는 송상석 목사의 탁월한 행정력에 힘입어 거의 다 환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로 이북출신의 목사님들로서 고려파에 가담했던 분들은 환원하지 않고 합동측 교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주요한 분들은 나중에 1980년대에 합동측의 총회장을 역임한 세사람 김창인, 최훈, 김현중 목사(2001년 소천)등이다. 이 세사람은 모두 신학교는 1950년대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면 그 대법원까지 올라간 “예배당 양도 소송”의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1965년 판결은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응소한 처음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의 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응소항전이 계속 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로(출옥성도 지지측이 예배를 못 드리게 막거나 시간을 갈라서 예배를 보게된 일) 많은 교인들이 여러 교회를 만들어 나가거나 이웃 다른 교파의 교회로 옮기거나 하게 되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교인들 알박기 등 그래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숫자가 적으므로 예배당은 통합측에 내주고 교육관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응소에 반대하는 박윤선 교수는 고려파 탈퇴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3. 결언



위같은 이러한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난후 교회간에 분쟁이 있을 때 처리는 쉬워지게 되었다. 즉 송상석 목사의 소신이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나중에 심판하실 것인가?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의 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신자들은 앞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다면 어떡할 것인가?



* 고소를 한 총회측 목사들이 잘한 것인지?

* 응소한 송상석 목사도 잘 한 것인지?

*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가 잘 한 것인지?



한상동 목사가 잘했고 송상석 목사 박윤선 목사도 각각 잘 한 것인가?

대법원에까지 가서 예배당 탈취에 성공한 총회측 목사들이 “승리(勝利)의 기쁨”을 누렸으니 신나는 일인가?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목사의 처신은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바 있지만 ▼“사람이 패거리를 이루어 환장을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게시판에 들르는 여러분들은 각별히 이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 탈취하고 천당 안가기로 작정한 다음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회개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게 아닌 다음에야 기독신문 주필인 한명수 목사의 다음 말을 빌어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경직 목사님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63빌딩에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신사참배에 대해 자숙한다고 해서 상당히 그 자리가 엄숙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투옥되고 순교한 사람들 앞에 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멘~~~~~~~~~~~~~~▶









사진첨부 추악한 한국장로교회사

내일의 교훈



사진 & 추악한 한국장로교사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만석 간사--(맨 뒤 추가 설명)





●한국장로교의 추악한 역사를 밝힌다●



* 성경에 더러운 얘기는 감추고 기술이 안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다 모두 기술했지요. 그러한 추악한 얘기들을 왜 읽습니까? 후세에 교훈을 삼았지요! 과거에 눈감으면 현재에도 봉사가 됩니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오늘 바로잡지 아니하면 밝은 내일은 없습니다.



* 다른 교파들은 더 했으면 더해서 아예 바르게 살아보자는 분들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오해는 마십시오.



*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아직도 장로교 각교단들이 교단적으로 회개 선언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언한 것은 있습니다.(●부록1) 맨뒤에 붙입니다. 회개할 때까지 회개를 촉구하는 게 성경적이며 이제 사회가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때입니다.(●부록2) 건전한 상식부텀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RE;[질문]합동.통합.... : 아주 자세한 설명 1



* 계속 주요 내용을 추가 개정하고 있으니 참고 하실 분은 다운로드 해놓으시면 좋습니다. 성경공부 백번 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가치가 훨씬 더 있습니다.





맑은 새벽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곳의 글을 읽다가 보니 기독교에 '합동' , '통합'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장로교나 침례교와같은 교파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미국이나 외국에도 합동파, 통합파등이 있나요?



기독교에도 종류가 많은것 같아 헷갈리네요? 잘 알고 있는 분 계시면 간단한 설명 부탁합니다.



안녕히...



[ 김 형석 : ]





자세한 설명: 우선 쓴 것을 올리고 몇시간후 나머지 부분들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장로교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도적인 교파로 전개신교인의 70% 정도를 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242개 장로교 교단들이 있습니다.



해방전까지는 장로교파는 한 개였습니다. 미국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등 여러나라 장로교선교부에서 왔지만 협력하여 전도했기 때문에 교파는 하나였고 신학교도 1908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로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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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설립 (1901)된 장로회신학교는 이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사진은 1908년에 건축된 초기 교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장로교가 1938년도에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고 그 이후 예배당안의 강대상 전면에 일본 우상신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먼저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끔찍한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악질목사들의 주도로 일본중이 주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의식을 한강이나 혹은 추운겨울에 바다에 나가 완전 나체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감리교파나 성결교, 카토릭은 등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섰기 때문에 뭐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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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선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가장 강력히 저항한 교파가 장로교파였는데 그 저항을 한 목사님은 약 천명 가까운 평양신학교 졸업생인 목사들중 겨우 20여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다수가 감옥에서 순교하고 일부가 살아서 해방후 출옥하였는데 이들을 “옥중성도”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 부릅니다. 약 20여 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전도사였던 분도 있고 여전도사도 몇분 있었습니다.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계신 분이 두어분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이분들을 이름을 아는 분이 0.01%나 제대로 될까요? 놀랍지요! 영양실조 기아로 여러분들이 줄줄이 순교하셨는데...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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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 평양)

-위 쪽에 더 고화질로 나와 생략-



해방후 신사참배에 나섰던 목사들은 참으로 면목이 없게 되었는데 나치에 협력했던 도이치 기독교단에 소속되었던 독일의 목사들은 종전후 3년간 목회를 안하고 자숙을 하고 그동안 나치치하에서 지하교회로 있었던 고백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일제에 아부하려고 신사참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혹은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끔찍한 고문을 받게한 목사들이 속을 못차리고 교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고 또 많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지지하여 주었으니 문제였습니다. 요사이 김홍도 목사 사건 때 교계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김목사를 지지하는 걸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기득권 즉 밥그릇을 놓칠까 바 혈안이 되어 그러는 겁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안을 제출하고 단2개월간의 자숙기간을 갖자고 하였는데 이것조차도 거부하고 1951년 그 출옥성도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려신학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출옥성도들은 경남출신들이 많아 신학교도 부산에 있는데 고려신학대학이 그것입니다.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교수를 교장으로 하여 1947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고려파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후 그들이 시무중인 예배당을 소송을 걸어서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출옥성도들은 두말 않고 내주고 나왔습니다. 이 교회당을 피땀흘려 가꿔온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을 버리고 빈손으로 출옥성도들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에 분개하여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친일파목사들의 총회에서 소송을 걸어서 10년간에 걸쳐서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제치고 예배당을 탈취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항거한 분을 지지하는 성도가 대다수였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고로 제2문창교회, 동광교회등 새교회를 세워 나기도 하고 다른교회로 옮기거나 하여 예배당은 결국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고신측 송상석목사의 소신대로 “교회건물은 교인의 총유”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분쟁시 문제가 없습니다. 숫자적으로 우세한 측이 처음부터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식으로라면 맨처음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교회는 출옥성도를 따라서 그 교회를 나온 교인이 90%가 넘었으므로 그 예배당은 출옥성도측 교인들의 것인셈입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차대전후 결성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도 참여하고 노선이 불분명하고 불교 마호멧교와도 짬뽕을 하려고 논의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48년인가 장로교가 아직 하나일 때 몇몇 정치목사들이 가서 무조건 가입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국장로교는 WCC 소속이 된 겁니다. 여기에 옥중성도측은 처음부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에는 국회에서 감리교목사이자 독립투사인 국회의원 이규갑(1887-1970, 충무공 이순신 9대손, 사모인 이애라도 독립투사)외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WCC를 용공이라고 성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 것이 전선에서는 공산군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장로교대표들은 방콕에서 열리는 WCC 총회에 공산당들과 같이 참석했거든요. 그리고 6.25 때도 공산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지금도 살아 있는 모모 목사가 대표들로 나서는둥 수백명의 기독교 인사들이 YMCA회관인가에 모여서 소위 “인민군환영대회”를 “김일성 장군... 운운” 하며 열었습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반대한 장로교총회측에서 김재준이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쳐 그에 반대하는 학생들 수십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항의 했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1952년 자유주의자들이 분리되어 기독교장로회 즉 기장교단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합니다. 여기에는 우두머리들이 주로 자유주의적인 캐나다 선교부가 맡아 선교한 함경도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재준 강원룡 조향록 등...



그때 김재준의 자유신학에 51명의 학생이 항거하였는데 일제말 설립된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전학의 이유는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좌경화 되기 전에 유학을 다녀온 박형룡박사가 만주의 봉천신학원으로부터 귀국하여 고려신학교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34명의 학생들 주요한 인물은 지금도 교계원로로 활동하고 있는 정규오, 김준곤, 박창환, 신복윤 등등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안에서는 50년대에 NAE라는 보수적인 복음주의동지회측에서 세력이 매우 컷습니다.. 그당시 총회장은 명신홍(일제말 칼빈신학교유학, 나중 합동), 한경직(친일경력), 전필순(친일행각으로 반민특위에까지 체포된 자) 목사 등이 하고 있었습니다.



위 기장을 포함한 당시 총회측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회개를 하기보다는 1938년의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한 결의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즉 원인무효시켰는데... 그리고 신사참배를 안했다면 취소가 가능합니다. 다 신사참배 하고서 회개를 안하고 가결시킨 옛날 것만 취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여러번에 걸쳐서 취소하고 또 취소하고 그랬습니다. 장난도 아니고 이거...



그런데 신사참배 회개를 거부한 자들이 무슨 보수 자유를 따지는 게 의미가 별로 있었는지 서로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NAE 측의 우두머리가 지금 ‘합동’에서 나온 ‘개혁’의 정규오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고문이 박형룡박사입니다. 박박사(평북)는 1897년생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기 직전에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1920년대부터 신학교육을 시작한 당시 최고 교수였습니다.



이 박형룡박사가 1947년 중반 고려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있다가 외국선교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신학교의 위치가 부산인 점 그런 것 때문에 서울로 가버리고 서울에서 전학온 34명 학생 전원은 박형룡박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불과 두어달 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실한 거지요.



박형룡박사도 해방후, 평북, 전주 집회 등에서 수차에 걸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때마다 목사들이 들고 일어나 반발하고 집회강사를 못하도록까지 저항하는 고로 회개 보다는 후진양성에 주력하자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1978년경 세상 뜨실 때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님의 말대로 “회개를 우선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WCC를 찬성하는 우두머리가 한경직 목사(1902-2000, 평북, 숭전, 좌경무렵의 프린스턴졸)이고 WCC 즉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측의 우두머리는 박형룡박사였습니다. 이 두사람이 직접 치열하게 싸운 것은 아니고 그 아래사람들이 붙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1958년경 신학교부지를 구입하려는데 박박사가 외국선교부의 원조금 3,000만환을 박호근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날려버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WCC 찬성측에서는 “이때다!” 하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한편 정규오목사(해방후 신학교 1회 졸업생)를 우두머리로 한 NAE측에서는 자신들의 고문이자 스승인 박형룡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WCC 찬성측을 뒤늦게 용공으로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기노회에서 총회에 보낼 총대를 뽑는데 이때 NAE측 목사들이 총대로 많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만 WCC측 한명이 누락되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유리하게 뽑혔으므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발표하면 될 것인데 그냥 넘어가서 이게 나중에 싸움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싸움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WCC에 찬성하는 파들(통합)은 저들끼리 따로 모여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도 있었던 친일파 전필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선교부들의 원조 등 때문에 목사들이 많이 쏠렸을 거는 당연합니다. 당시엔 태반의 사람들에겐 미국이 천당 가는 거였으니깐요. 기독교 학교 등 재산 등은 통합으로 남았지요. 평신도들은 합동측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한편 위기에 몰린 NAE측 목사들은 박형룡박사와 자기들도 한패가 되어 내쫓은 출옥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총회에서 축출한 것을 사과하고 하나로 합칠 것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출옥성도측에서는 자신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고 예배당까지 탈취한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쉽게 화해 할 일은 아니지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데 거절하면 교만하다는 비난을 모면키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고 한편 위기에 몰린 한국보수신학을 살려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게 되었습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촐옥성도측 즉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얘기가 점점 흥미 진진하게 전개 되는데...



NAE측과 고려측이 합하는 과정, 다시 분리하는 과정, 그후 전개 되는 상황, 그리고 1979년부터 시작된 합동측이 수십개로 분리되는 과정을 기술하자면 도저히 한두번에 끝내기는 힘들고 앞으로도 여러번 나누어 계속해야 할 것같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그치고 내일부터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나중에 위의 것을 다시 보충 정리하고 맨나중에 최후로 정리하여 한번에 시리즈로 올리겠습니다. 다운로드하여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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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선교위원회가 마련한 오찬에 참석한 교계지도자들(1960.2.18). 지금도 알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위 내용은 많은 교회사 책들을 참고로 하고 여기저기 오랜기간 읽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구두로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도 합했습니다. 자세히 쓴 교회사책이라도 한두권만 읽어서는 위같이 객관적 종합적으로 기술된 것을 찾기는 힘들것입니다.









위글을 가져오게 된 성경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이라는 게 물질입니까?)



에스겔 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현실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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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당하고도 말못하는 충격사연 심층취재**

사진첨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 당하고도 신고하는 율이 2% 정도밖에 안된다고 언론들에 보도된 바가 있다. 법정에 서는 것조차 수치스런 일이지만 그 재판 진행과정에서... 한국의 성폭행은 세계 1위라고 한다. 얼마나 썩은 나라인지 미국은 인구 10만명당 몸파는 여자가 23명인데 우리나라는 몸파는 여자가 무려 1백만명이 넘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몇 cm를... 몇분동안...” 하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 게 진행된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잡아 죽일 것같지만... 재판정에서서 호소하렵니까? 그렇게 “몇 cm를... 몇분동안...” 재판관에 호소하렵니까?



한국의 여성단체에 신고되는 여신도 성폭행 숫자는 엄청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단 1년만에 47건이 신고되었는데 실제 100배에 이르고... 교회의 특성상 모호하게 진행되는 점도 많고... 그런점을 감안하면 성가대원 50명 성폭행등 헤아릴수 없이 많이 여신도들이 교역자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근데 위와같이 당하고도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 모교수가 쓴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이란 책이 있다. 본문과 현장사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현재 한국교회 실정과 교단간 눈치보기 때문에 얼마나 솔직하게 쓰여있나 의심스러웠는데 예상보단 신랄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통합측과 한신대 즉 이른바 진보(내지는 자유)와 그 아류교단의 과거사를 상당부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먹사가 신사참배에 항거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들었고 어느 먹사가 주기철 목사의 노모 등 가족을 목사관에서 끌어내어 탈취했느냐는 등은 언급이 안되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못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이자들이 해방후 한국교회를 주름 잡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최고 지도자로 행세하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위 책의 점수를 매긴다면 한 70점이나 될까? 위 책에 비하여 성결교 소속의 이선교 목사님이 쓴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는 신랄하게 까발긴 점으로 보아 한 80점은 된다. 하기야 이선교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를 검찰청에 반란방조혐의로 고발하여 신문에 보도되고 한동안 그것 때문에 지하언론이 무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 두책이 최초라 할만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친일 친독재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부정 사기 협잡들을 노출시킨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예상보단 불과 몇 개월 사이에 4판까지 나온 것을 보아 그것도 반가운 일이고.





통합측이나 한신측 그리고 합동측에서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출옥성도 성자란자들이) 예배당 쟁탈전을 벌였다...” 즉 자세한 서술도 없이 무조건 소위 성자들이 세상 재산에 탐이 나서 혈안이 된 인간들이라고 하는식으로 매도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출옥성도측에서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 이 문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출옥성도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과 두말없이 피땀흘려 가꾼 교회를 내주고 나와 맨땅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배당을 내놓으라고 총회측(통합과 합동이 분리되기 전)에서 소송을 걸자 그걸 항거하는 성도들이 응소를 하여 장장 10년간에 걸쳐 대법원에까지 가서 판결이 난 것이다. 즉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이다. 그러면 위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은 교인들 90% 이상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니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이다.



사기꾼 먹사와 교회사가중 대부분인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즉 “하나님만이 누가 뭣이 옳은지 아신다”는 것이다. 미친넘들! 성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고 설교까지 하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알 것 아닌가? 일반계시인 양심으로도 판단 할 수가 있는 문제이고. 잘 몰랐다? 그럼 아래 태만의 죄에 해당한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리고 또하나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단순히 신사참배만 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친일하며 갖은 악행을 다하고 동족을 못살게 군 목사들에게 맞는 소리인가? 성경은 치리의 의무성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Y 신과대학 명예교수란 또라이 교회사가는 “그 말에는 반박못할 논리와 신학이 있다”고 하는데 그럼, 컨닝하다 걸린 신학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하고 반발한다면 어떡할 셈인가? 공적인 죄는 공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위에 대한 참고문은 다음 “몸버린시골처녀를” 클릭하며 자세한 것을 읽을 수 있다.



(3-2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자가 속한 교단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까지 체포된 바 있는 일경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추악한 악질 한국교회 지도자를 읽고 싶으면 아래 “치마를 벗고” 안에서 나오는 “최고악질”을 클릭하시면 자세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총회측(합동과 통합, 기장)이 출옥성도들을 독선주의자 분리주의자들로 매도하니 그것을 방어하기에 급급한데 과연 성경신학적으로 그게 옳은 태도인가? 자의적으로 분리했나 쫒겨남을 당한 것인가 하는 사실확인을 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론 아예 맞받어 쳐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실제 처음부터 그런 교단도 두 개나 있다.



아래를 “치마를 벗고” 클릭하면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3-1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왕따 당하는 게 두려웠던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말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하라”(잠 31:8)



당시 응소한 목사는 출옥성도는 아니고 해방후 출옥성도편에 선 1930년대에 한국교회에서 절제운동(주초문제)을 하던 송상석 목사(1897-1977)이다. 이분이 행정능력이 탁월하여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해방후 당시까지 만주봉천신학원에 머물던 한국보수신학계의 거성 박형룡박사(1897-1978)를 배를 전세내어 타고 만주에 가서 비밀리에 모셔온 분이다. 즉 오늘의 총신이 있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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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IP 192.241.172.x    작성일 2020년10월22일 12시19분      
1958년 장로교를 뒤흔든 3천만환 사건

사깃꾼 걸려 -신사참배 거부한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박형룡을 치리하려 들었는가?





3천만환 사건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4811

박형룡의 3000만환 사건을 다시 보다

WCC 논쟁 … 반세기 지나 되풀이 되는 갈등의 거울 삼아야




이범진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다루던지 긍정적으로 다루던 지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바’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은 -어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분열을 야기했다. 그러나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한 분열은 그의 믿는 바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었고, 최선의 방향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다는 데에서 그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믿음에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데에는 진정성이 보인다. ‘믿는 바’와 ‘행동’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유일한 ‘돌출’이 발견된다. 이른 바 3000만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의 ‘믿는 바’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룬다.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박형룡에게 있었던 3000만환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표현’과 ‘의미부여’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wcc 사건을 첨예하게 부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개인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다가 좌절한 단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살핌으로써,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는 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이른바 3000만환 사건

박형룡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이른바 3000만환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적인 평가를 하려는 이들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3』은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교장이던 박형룡은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다.(92쪽)



3000만환은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억원에 달한다.
한 학교의 교장이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3억 원을 ‘교섭비 명분’으로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은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58년 신학교 이사회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역사신학자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당시 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이신덕(1909-1994, 경성제대 법대)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박호근이었다. 박호근은 자신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기지 불하를 의뢰하고 총회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박교장의 결재를 받아 30,162,172환을 이사회의 승낙 없이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박호근이 사기를 친 것이었고, 그것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박용규는 3000만환 사건을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사기’를 친 박호근이라는 사람과, 그를 소개한 박래승과 이신덕의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순수함’은 이 사건에서 객체로 남고, ‘사기꾼’ 박호근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이 들었을 그 ‘말’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사회도 모르게, ‘3억원’을 지불하도록 결재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말이다.



이에 대해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는 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장로 직함을 가진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교장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부지 불하, 건축허가, 학교의 대학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였다.(364쪽)



‘허풍을 떨면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숭의학교 교장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1953년 4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은 그녀에게 ‘사기꾼’ 박호근은 실력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형룡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은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은’ 그는 박호근에게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명목으로 불과 두달 만에 3000만환을 지불했다. 오늘 날 3억에 달하는 이 돈이 두 달만에 사라졌다.



물론 결과는 대지 불하, 건축 허가, 대학 인가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호근은 그 돈을 접대비, 교섭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받았다. 그 당시에 그가 대지 불하 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었다. 사용목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방법은 분명 불법적인 경로였다.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김인서,『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23-25쪽)



결과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박호근 자신도 그가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 방식을 박형룡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기’를 진행하는 데에 돈을 지불한 그 자신도 공범이 되어야 맞다. 아니면 불법적 방법은 그렇다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니 ‘사기’라는 말인가?



그런데 박호근의 반응이 흥미롭다. 보통의 다른 사기꾼들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형룡 박사를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결국 김인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 나가 심문 당하고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으면, 이 문제를 3억원대 ‘사기’와 맞바꾸어야 했을까? 1만 달러는 우리가 본 ‘3000만환’에 포함된 돈으로 보인다(3000만환중에서, 미국에서 온 ‘1만불’(8,800,000환)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북장로교 측 3,000불(2,500,000환), 특별비(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 30,162,172환이었다).



미국에서 온 1만불의 불법적 환전을 지시(실행)할 정도로 박형룡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체가 된 이 사건이 밝혀지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배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앞서 박용규가 주장한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적확한 평가를 덮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변화를 가져온, 세속적 사건



이러한 사건 정황에 빗대어 봤을 때, 박형룡의 사표 수리가 이루어진 1958년 3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충격적이다. 사표 건에 대해서 이사 38명중 20명이 찬성을 하고, 17명이 반대를 한 것이다(1명 기권). 적어도 17명은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이 계속 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사회가 “그것이 고의가 아닌 사기”라는 점을 감안해 “교장사표는 반려하고 대신 불법 지출한 삼천만환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파동 주택(당시 시가 800만환)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했을 때 박형룡의 측근들은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태의 매각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실책을 범한 박형룡을 끌어안은 이유는, 그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을 밀어내려고 하는 세력은 결국 보수, 정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장로교의 자유, 진보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설득전을 펴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를 들고 나왔다.(<기독공보>, 1959.10.5) ‘세속적’ 문제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이를 두고 이영헌은 『한국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면서도 박형룡 박사의 인책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323쪽)



물론, 박용규는 이를 부정한다. 3천만원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측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갈등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박형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동민의 생각은 좀 다르다. 3천만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전의 박형룡은 wcc에 대해서 부드러운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온건한 반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사기를 당한’ 이후에는 급격히 강경해졌다며, 신신학과 단일교회의 두 가지가 쟁점이었는데 ‘용공주의’ 하나가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글(『현대신학비평』제12장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 1972)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3천만환 사건이 있기 전 1958년 3월에 썼던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통일에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교리 무관심주의로 인하여 결국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변해가며, 심지어 이교도까지도 허용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의 글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되는 성명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wcc의 용공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81쪽)



그의 신학적 변화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3천만환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세속적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한 신학’으로 향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wcc논쟁을 보다



사회학자 노치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세속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 분열 현상은 세속화의 추세와 밀접하다는 주장이다. 즉 세속화의 추세에 대한 수용과 저항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고 말이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도, wcc를 지지하는 측은 세속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측은 세속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노치준은 wcc운동이 세속화의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세속화에 대해서 피터버거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요약하면, 제도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인간 의식의 측면에서 이 영역들이 교회의 통제, 권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박형룡은 1976년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아들 박아론의 글이 총신대 학장과 교수진에 의하여 거절된 사실을 접하고 “총신대학의 좌경화의 뚜렷한 징조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세속화를 거부했던 박형룡은, 박호근이 추진했던 세속적인-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역으로 그의 ‘믿는 바’ 신학마저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신학의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갔던, 큰 신학자 박형룡의 생애에 돌출 된 부분으로 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wcc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신학적 영역에서 보기 보다는, 지역적, 역사적, 당파적 영역에서 보아야 그 첨예하고 해묵은 갈등이 바로 보일 것이다. 해법은 물론, 그 안에 있다.







http://reformednews.co.kr/921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총회신학교(박형룡 박사) 3천만환 재정 사고와 그를 이용한 음모

소재열 | 기사입력 2009/08/09 [12:58]



금년 2009년 9월에 소집될 제9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꼭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리폼드뉴스>는 기획연재 시리즈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왜, 무엇 때문에 분열했는지,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입장에서 연재한다. 본 연재는 소재열 목사가 집필하여 곧 출간하게 될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의 일부 내용을 요약해서 연재하게 된다(리폼드뉴스 편집부).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1) 사건을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합동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이용한 W.C.C.측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총회 안에서는 W.C.C.와 NAE라는 두 세력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대립의 씨앗이 발아 되어 갈등관계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갈등과 대립은 이미 1959년 제44회 분열 총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 3천만환 부정지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본다.2) 이러한 시각이 W.C.C.을 지지하는 통합측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W.C.C.의 신학적인 문제로 반대했던 합동측에서는 W.C.C. 운동과 그 신학을 은폐하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3)



이 같은 두 대립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논리이며 분열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확보하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책임을 논할 때에는 양측이 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분열이후 정통성이 자신들의 총회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설명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역사는 주관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그 시대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배경을 살펴서 과거 치열했던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 받게 될 것인지 추적하게 될 것이다.



통합측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으로 전개한다.4) 민경배 교수는 “분열의 기원이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 기금 유용에서 유래된 교장 사임과 관계가 있고 더욱이 에큐메니칼의 중상이라는 박형룡 일파의 소행에서 결국 왔다고 한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5)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에게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진현 목사의 말대로 역사를 그렇게 창작하면 안 된다.6)



조동진 박사는 ‘총회신학교 건축기금의 실체와 그 오용(誤用)에 관한 진상’에 있어서 그 헌금이 어떻게 박형룡 박사에게 전해졌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불법으로 지출했다는 신학교 건축기금 3천만 환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의 장로로 미국의 대 은행금용기업가가 개인적으로 친구로서 교장 박형룡에게 보낸 1만 달러 개인수표와 별도로 공식으로 보내진 10만 달러 중에서 지출한 것이었다. 제 십장로교회 장로의 이 특별헌금은 본래는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세속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불신하는 제 십장로교회의 미국 은행금융가의 거물 장로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통해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원하여 준비된 돈이었다.



1956년 “한국NAE” 총무였던 필자는 WEF 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헌금자는 자기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신학교 교육기금의 제1차 헌금액이 10만 달러였다. 필자는 이 신학기금이 한 교파의 신학교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보다는〈한국복음주의신학교 육재단〉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수령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재단기금으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수의 봉급 지원과 교수 양성 장학금과 건전한 신학 교재의 출판과 세계 수준의 신학도서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WEF 총무에게 보냈다.



그러나 WEF 국제총무의 견해는 달랐다. “이 돈이 장로교 장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신학교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인 박형룡 교장을 믿고 그에게 보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의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적극 만류하였지만 필자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헌금이 교장 박형룡을 통하여 총회신학교에 보내어진 것이다. 제 십장로교회는 끝까지 연합장로교회가 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는 탈퇴하여 지금은 70년대 후반부터 PCA 장로교회 총회에 속하여 있다.”7)



요약한다면, 그 특별헌금은 교장 박형룡의 총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지 그를 축출한 미국연합장로교회 산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장 박형룡이 남산에 있는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하여 3천만 환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지불한 것은 행정상 과오이기는 하지만 그 지불의 결과로 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 불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부터의 헌금이 선교부를 통하지 않고 교장 박형룡이 수령한 것부터 문제를 삼고자 했던 선교부로서는 그것을 교장 박형룡 축출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교장의 행정적 실수를 구실로 박형룡을 추방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는 새 교장을 세운 연합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책에 합치된 신학교로 개편하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박형룡 박사의 진술서를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 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같은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숭의학교의 기지 불하 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OOO불(환액 8,8OO,OOO 환), 북장로 선교부에서 5,OOO불(2,500,OOO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 산액 중 13,807,042환, 1958 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 사건을 추진 중 일부 이사는 격려로써 속히 추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계셨으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만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논하여 지출된 것이므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서 온 돈 10,OOO불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이므로 내 친구로부터 내게 보내 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 경상비에서 임시로 17,973,742환을 유용한 것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려고 생각하고 지불한 것인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8)



총회에 보고 된 이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박형룡 교장께서 교장직을 사임하셨음으로 이를 수리하였사오며”라고 기록하였고 “후임 교장이 선출된 때까지 교장 대리는 총회장으로 하되 이사장이 협동케 하였사오며”9)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박사 사표수리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바쳐 온 박형룡 박사의 사표가 이사회에 의하여 수리되었다. 이사회 전체 회의는 3월 10일 오후 3시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회되어 8일 오전 1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교장 사표수리는 7일 밤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다(밤 회의는 인톤 선교사 집에서 열림). 회의는 이사장 인톤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참석 이사는 42명 중 38명이고 가 부 투표에서 20:17 기권 1표로 수리되었다 한다.



동 회의에서 교장 사표수리에 대한 결정에서



① 1958년 3월 7일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대전제일교회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은 총 38표 중 가 20, 부 17, 기권 1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과장 박내승 씨도 역시 가 30, 부 7, 기권 1로사표가 수리되었다.



② 1958년 3월 8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장 인선위원 9인을 선임키로 하고 선교회 3인, 이사회 3인, 실행이사회 3인을 결정하기로 하고 후임 선정위원으로 선교사 대표 인톤 감부열 감의도 실행이사 대표 전필순(미참 경우에 노진현) 김윤찬, 김재석, 전체 이사 대표 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하였다.



③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박 박사가 계속 집무할 것



모 이사는 회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교장서리를 권세열 교감으로 추천하는 동의 제청이 있었으나, 총회 결의를 상기시키면서(초대 교장엔 선교사도 무방이나 2대 교장 이하는 한국인으로 할 것) 총회 결의가 번복되기 전에는 될 수 없다고 하여 선교사가 교장 사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한편 후임자 결정에는 전체 이사회의에서 2/3의 표를 획득하여야 하며 총회(금년 총회는 금년 9월에 회집 됨)에서 인준을 받아야 정식으로 교장으로 취임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취임은 일러도 10월 초순에야 가능.

한편 사무처장 박래승 목사의 후임은 4월 11일에 회집할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 하며, 총회 인준 여부에는 관계가 없다 한다.10)



제43회 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교장직 사표를 내고 명예교수로 있도록 하면서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 후 신학교에서 물러나서 쉬었고 그가 가르치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천만 환 사건은 수습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43회 총회는 신학교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조직케 하였다. 이를 위해 1959년 1월 20일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새로 조직되는 이사회가 모였다.11) 안광국 목사는 NCC측 인사로서 그가 집필한 「장로회신학대학 70년사」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NAE측은 신학교 3천만환 사건을 무마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재임케 하기 위하여 실행이사를 유리하게 선임코자 했다. 저희들의 비밀히 추천한 실행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환수, 정선득, 양화석, 송암석, 나기환, 노진현, 정일영, 황병혁, 김수영, 전제영, 김윤찬, 황득환, 김치선 등이었고 이사장으로 보이열 목사를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당선된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 안두화, 부 : 김석진

서기 : 안광국, 회계 : 위두찬

실행이사 : 안두화, 김석진, 권세열, 양화석, 보이열, 김재철, 노진현, 계창봉, 이환수, 김재석, 위두찬, 김윤식, 안광국, 황병혁



이상 14인 중 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외에는 다 탈락이 되고 말았음으로 이사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고, 저희는 박형룡 박사의 구명운동이 실패함을 느꼈다.”



이렇게 역전 되기까지 NCC측의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 지휘한 결과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하였다.12)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 사표수리는 총 투표수 38표 중 가 20표, 부 17표, 기권 1표의 근소한 차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처장 박내성의 사표는 압도적인 가표로 가결되었고,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기 전에 신학교 이사회는 회합을 갖고 후임 교장을 선출키 위하여 투표에 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명되었다.



교장 지명투표 - 게일승 19표, 명신홍 17표, 기권 2표

교장 선거투표 - 계승일 가 18표 부 19표 기권 1표



교장 선임에 실패한 이사회는 다시 인선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안두화, 김석진, 노진현, 권연호, 김재석, 안광국, 김윤찬. 그러나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시비로 인하여 비상정회가 되자 교장선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이것이 분열 전의 마지막 이사회였다.13)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으로 처음에 준비한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였다.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지도 과정에서 본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논문을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이 더 권위있는 논문이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지도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장로교회 분열사>가 탄생되었다. 본 논문은 공적 문서를 기준으로 신국판 500여 페이지로 준비된 논문이다. 곧 출판된다.









치마를 벗고 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오늘의 사태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이 되어야 한다...



[7/7] 눈팅1 IP 121.254.16.x 작성일 2009년1월11일 09시49분

제가 써프에 자주 들어와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님의 글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자료 첨가해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그 노고와 정성에 감사드리며....



귀하가 서프라이즈에 올리는 기독교 신사참배 문제와 여러 목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서프에서 귀하가 올린 글만 수십차례(우연히 클릭)해서 읽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님이 이상한 글을 올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정독한 결과 내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나는 교인인데 평소에 교회의 죄악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고 신사참배 건도 문제가 있는 것만 피상적으로 알았지, 귀하가 올린 내용처럼 그렇게 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 백정짓이 해방 후에 자행됐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노하였습니다.



나는 귀하의 글 애독자가 되었는데 서프에 들어와서 귀하의 글을 어떻게 찾냐면 자극적인(?) 제목을 우연히 클릭하면 귀하의 반가운 글이 있고, 예전에는 귀하가 ★▶ 이런 찐한 별표, 화살표 문양을 제목에 넣어서 제가 얼른 알아차리고 클릭해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서프에 와서도 시간을 많이 쓸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글이나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귀하의 글을 찾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부디 귀하의 글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직 귀하가 링크한 파일은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클릭해서 다운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내 조심성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어떤 경건한 개혁목사이자 신학자는 당시의 썩어빠진 사이비 목사들을 향해 "잡종 성직자" "우상의 목자" "바벨을 사랑하는 자"라고 격하게 비판하였더군요. 나는 이 말이 오늘의 많은 사이비 목사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진실하게 믿어보고 이웃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부족한 저에게는 한국교회의 과거 어두운 역사와 현재 많은 목사들의 더러운 행태를 알려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그럼...





출옥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신사참배 찬성파들이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면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예측 대비할 수 있고, 잘못된 미래를 막기 위한 예방 효과를 갖는다. -김두식 교수





아래가 어느 분이 여러해전 "성경 다음으로 보관 하겠습니다!!"라고 댓글을 올린 글



치마를 벗고◆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수치의 순간



◆강조점들을 컬러처리하여 기억하기에 좋게 만들었사오니 저장해 두시어 여기저기 게시판들에 푸기 등 많은 이용바랍니다. 서문은 맨뒤로 옮겼습니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숫처녀가★갈보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났습메

한국교회는 이 공적인 불경건 죄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교단적으로 회개를 한적이 없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교 총회가 일본 우상에 절하는 것에 찬성을 가결하였는데 여기에 맹렬히 반대한 소수의 목사님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평양의 주기철 목사(1897-1944, 경남)는 양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남출신인 한상동 목사(1901-1976)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이고 다녔다



한상동 목사(평신, 고려파 총수, 고신대학장)

그리고 만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메이쳔파 선교사인 한부선 선교사(1903-1992년, 나중 고려파에 가담)가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2차대전 발발후 귀국보다는 감옥행을 택하였다가 나중 포로교환 때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지도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옥중 교인들의 특별기도회의 결과 1946년 9월 20일 개교했다. 고려학교를 설립한 후 앞줄 왼쪽부터 한부선, 주남선, 박윤선, 한상동. ⓒKPM



이러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닌 목사, 전도사들의 숫자는 많지는 않다. 현재 충현교회 원로 목사인 김창인 목사의 경우는 반대하다가 만주로 도망을 가서 신앙적인 정조는 지킨 셈이다. 신학교는 1950년대 말에 가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고 있는 바는 목사는 당연히 이러한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에스겔 3 :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에스겔 3 :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일본우상에 절하는 것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순교자의 수는 약 50명이고 고문과 옥중기아와 추위(영하 40도)를 견디어내고 출옥한 성도들의 숫자는 20여명이다. 그래서 이들을 “옥중성도(獄中聖徒)”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고 부른다.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출옥성도들, 유명한 사진인데 구하기 힘든 고화질 저장바람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다.)



해방이 되자 일본우상에 절한 목사들은 면목을 잃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옥중성도들은 배도한 한국교회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2천명 정도 되는 장로교 목사들은 자신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이에 대하여 반발하고 저항을 하게 되었다. 출옥성도들이 제출한 회개법안이란 것은 단 2개월의 자숙기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반발 한 것이다. 만주로부터 귀국한 평신교수였던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졸업, 평신, 고신초대교장, 총신 교수 역임)가 수양회 도중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자 다음날부터 강사자격을 박탈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평신교수, 고신교장, 총신교수)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습격되어 구타 고문 당한 후 해산된 것같은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벌어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3년동안 목회를 못하고 그 동안에 지하에 있던 목사들이 교회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아마도 99.9%가 넘는 양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편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50대의 목사들조차도 자세한 얘기는 거의 모른다. 아니, 아예 관심 대상조차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식(歷史意識)의 결여(缺如)를 볼 수 있고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가 있는 것이다.



1951년에 6.25중 부산에서 장로교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배도한 목사들이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제명해 버렸다. 그리고 시무중인 예배당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요새 어느 토론장에 어떤 분이 “■나성한인교회 속보” 하고 올려놓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출옥성도중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저항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대부분의 성도들 약 4백명과 예배당을 내주고 나와 맨땅 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때 초량교회를 접수한 목사가 년전에 세상을 뜬 1958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한 노진현목사이다. 당시 초량교회에 남아서 예배당을 차지한 교인들 수는 구영기 목사, 양성봉장로 등 20명 정도이다.



위에서 구영기 목사는 예배당을 내주고 나온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스스로 말하기를, 인간취급을 못 받았고 경남지사로 이승만 박사의 총애를 받던 양성봉 장로는 훗날 60년대에 세상을 뜰 때 당시의 잘못을 회개(悔改)하고 한상동 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 탈취한 당시 장로교 총회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출옥성도는 내주고 나왔으나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교회는 그렇게 탈취가 용이하지 않았다. 피땀 흘려 세운 예배당을 쉽게 내주리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약신 목사(1952년 고려파 1대 총노회장, 이효재 교수 부친)등이 시무하던 교회 등은 탈취할 틈새가 없어서 탈취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총회측(당시에는 합동과 통합측이 나뉘기 전)에서는 법정에 소송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고소할 것을 금지하는 유명(有名)한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6 : 1-7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위 총회측의 “법정 고소”에 대하여 “응소”한 분이 1930년대 한국교회에서 주초문제 등 절제운동을 하기도 한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1897-1978)이다. 그래서 장장 10여년 세월에 걸쳐서 대법원에까지 올라가는 법정 공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1896-1980, 고신의 행정지도자, 속칭 ‘부곡사단’ 총수)

총회측에서 출옥성도측을 고소한 이유는



☆ 재산이 탐나고 또 교인 이탈을 막고자 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다음과 속셈이 있었다.



☆ 즉 “출옥성도라는 사람들이 뭘 세상 재산에 관심을 갖느냐?”는 식으로 망신을 주고자 하는 비열한 계산.



☆ 또 고소한 인간보다는 고소를 당하는 쪽이 시달린다는 것을 이용하고자 아는 속셈과



☆ 고려파 내부를 흔들어 놓고자 하는 교활한 착상.



아닌 게 아니라 우선 고려파 내부에서 논란이 심하게 일게 되었다. 즉 박윤선 교수가 응소를 극력 반대하여 송상석 목사와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윤선 교수(1905-1988, 평북 철산, 고신교장, 총신교장, 합신교장)

박윤선 교수는 앞서의 ‘고린도 전서 6장’을 들어 여기에 위배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하였고 이에 항거하는 송상석 목사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고소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응소한 것이다.



* 위 구절은 같은 형제간의 문제이다. 갈려져서 서로 “치리기관”이 다르니 총회측과 고려파측이 서로 잘못이 있을 때 내부적인 치리를 할 수 없으므로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10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의 항거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런데 1960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갈릴 때 합동측 목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과거 출옥성도들을 쫓아낸 것을 사과하고 하나가 되자 했을 때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한국 보수신앙의 위기였기 때문에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내세우고 합동하게 되었다. 이때 합동총회의 사회를 본 분이 바로 송상석 목사이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총회장을 한상동 목사가 연임했으니 처음 약속과 달리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나가므로 부득이 다시 분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상동 목사의 1962년 ‘복교선언’이다. 이때 경남노회 소속의 고신측 교회는 송상석 목사의 탁월한 행정력에 힘입어 거의 다 환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로 이북출신의 목사님들로서 고려파에 가담했던 분들은 환원하지 않고 합동측 교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주요한 분들은 나중에 1980년대에 합동측의 총회장을 역임한 세사람 김창인, 최훈, 김현중 목사(2001년 소천)등이다. 이 세사람은 모두 신학교는 1950년대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면 그 대법원까지 올라간 “예배당 양도 소송”의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1965년 판결은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응소한 처음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의 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응소항전이 계속 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로(출옥성도 지지측이 예배를 못 드리게 막거나 시간을 갈라서 예배를 보게된 일) 많은 교인들이 여러 교회를 만들어 나가거나 이웃 다른 교파의 교회로 옮기거나 하게 되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교인들 알박기 등 그래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숫자가 적으므로 예배당은 통합측에 내주고 교육관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응소에 반대하는 박윤선 교수는 고려파 탈퇴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3. 결언



위같은 이러한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난후 교회간에 분쟁이 있을 때 처리는 쉬워지게 되었다. 즉 송상석 목사의 소신이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나중에 심판하실 것인가?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의 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신자들은 앞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다면 어떡할 것인가?



* 고소를 한 총회측 목사들이 잘한 것인지?

* 응소한 송상석 목사도 잘 한 것인지?

*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가 잘 한 것인지?



한상동 목사가 잘했고 송상석 목사 박윤선 목사도 각각 잘 한 것인가?

대법원에까지 가서 예배당 탈취에 성공한 총회측 목사들이 “승리(勝利)의 기쁨”을 누렸으니 신나는 일인가?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목사의 처신은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바 있지만 ▼“사람이 패거리를 이루어 환장을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게시판에 들르는 여러분들은 각별히 이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 탈취하고 천당 안가기로 작정한 다음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회개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게 아닌 다음에야 기독신문 주필인 한명수 목사의 다음 말을 빌어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경직 목사님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63빌딩에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신사참배에 대해 자숙한다고 해서 상당히 그 자리가 엄숙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투옥되고 순교한 사람들 앞에 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멘~~~~~~~~~~~~~~▶









사진첨부 추악한 한국장로교회사

내일의 교훈



사진 & 추악한 한국장로교사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만석 간사--(맨 뒤 추가 설명)





●한국장로교의 추악한 역사를 밝힌다●



* 성경에 더러운 얘기는 감추고 기술이 안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다 모두 기술했지요. 그러한 추악한 얘기들을 왜 읽습니까? 후세에 교훈을 삼았지요! 과거에 눈감으면 현재에도 봉사가 됩니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오늘 바로잡지 아니하면 밝은 내일은 없습니다.



* 다른 교파들은 더 했으면 더해서 아예 바르게 살아보자는 분들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오해는 마십시오.



*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아직도 장로교 각교단들이 교단적으로 회개 선언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언한 것은 있습니다.(●부록1) 맨뒤에 붙입니다. 회개할 때까지 회개를 촉구하는 게 성경적이며 이제 사회가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때입니다.(●부록2) 건전한 상식부텀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RE;[질문]합동.통합.... : 아주 자세한 설명 1



* 계속 주요 내용을 추가 개정하고 있으니 참고 하실 분은 다운로드 해놓으시면 좋습니다. 성경공부 백번 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가치가 훨씬 더 있습니다.





맑은 새벽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곳의 글을 읽다가 보니 기독교에 '합동' , '통합'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장로교나 침례교와같은 교파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미국이나 외국에도 합동파, 통합파등이 있나요?



기독교에도 종류가 많은것 같아 헷갈리네요? 잘 알고 있는 분 계시면 간단한 설명 부탁합니다.



안녕히...



[ 김 형석 : ]





자세한 설명: 우선 쓴 것을 올리고 몇시간후 나머지 부분들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장로교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도적인 교파로 전개신교인의 70% 정도를 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242개 장로교 교단들이 있습니다.



해방전까지는 장로교파는 한 개였습니다. 미국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등 여러나라 장로교선교부에서 왔지만 협력하여 전도했기 때문에 교파는 하나였고 신학교도 1908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로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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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설립 (1901)된 장로회신학교는 이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사진은 1908년에 건축된 초기 교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장로교가 1938년도에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고 그 이후 예배당안의 강대상 전면에 일본 우상신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먼저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끔찍한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악질목사들의 주도로 일본중이 주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의식을 한강이나 혹은 추운겨울에 바다에 나가 완전 나체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감리교파나 성결교, 카토릭은 등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섰기 때문에 뭐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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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선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가장 강력히 저항한 교파가 장로교파였는데 그 저항을 한 목사님은 약 천명 가까운 평양신학교 졸업생인 목사들중 겨우 20여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다수가 감옥에서 순교하고 일부가 살아서 해방후 출옥하였는데 이들을 “옥중성도”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 부릅니다. 약 20여 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전도사였던 분도 있고 여전도사도 몇분 있었습니다.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계신 분이 두어분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이분들을 이름을 아는 분이 0.01%나 제대로 될까요? 놀랍지요! 영양실조 기아로 여러분들이 줄줄이 순교하셨는데...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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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 평양)

-위 쪽에 더 고화질로 나와 생략-



해방후 신사참배에 나섰던 목사들은 참으로 면목이 없게 되었는데 나치에 협력했던 도이치 기독교단에 소속되었던 독일의 목사들은 종전후 3년간 목회를 안하고 자숙을 하고 그동안 나치치하에서 지하교회로 있었던 고백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일제에 아부하려고 신사참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혹은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끔찍한 고문을 받게한 목사들이 속을 못차리고 교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고 또 많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지지하여 주었으니 문제였습니다. 요사이 김홍도 목사 사건 때 교계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김목사를 지지하는 걸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기득권 즉 밥그릇을 놓칠까 바 혈안이 되어 그러는 겁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안을 제출하고 단2개월간의 자숙기간을 갖자고 하였는데 이것조차도 거부하고 1951년 그 출옥성도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려신학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출옥성도들은 경남출신들이 많아 신학교도 부산에 있는데 고려신학대학이 그것입니다.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교수를 교장으로 하여 1947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고려파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후 그들이 시무중인 예배당을 소송을 걸어서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출옥성도들은 두말 않고 내주고 나왔습니다. 이 교회당을 피땀흘려 가꿔온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을 버리고 빈손으로 출옥성도들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에 분개하여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친일파목사들의 총회에서 소송을 걸어서 10년간에 걸쳐서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제치고 예배당을 탈취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항거한 분을 지지하는 성도가 대다수였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고로 제2문창교회, 동광교회등 새교회를 세워 나기도 하고 다른교회로 옮기거나 하여 예배당은 결국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고신측 송상석목사의 소신대로 “교회건물은 교인의 총유”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분쟁시 문제가 없습니다. 숫자적으로 우세한 측이 처음부터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식으로라면 맨처음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교회는 출옥성도를 따라서 그 교회를 나온 교인이 90%가 넘었으므로 그 예배당은 출옥성도측 교인들의 것인셈입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차대전후 결성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도 참여하고 노선이 불분명하고 불교 마호멧교와도 짬뽕을 하려고 논의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48년인가 장로교가 아직 하나일 때 몇몇 정치목사들이 가서 무조건 가입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국장로교는 WCC 소속이 된 겁니다. 여기에 옥중성도측은 처음부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에는 국회에서 감리교목사이자 독립투사인 국회의원 이규갑(1887-1970, 충무공 이순신 9대손, 사모인 이애라도 독립투사)외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WCC를 용공이라고 성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 것이 전선에서는 공산군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장로교대표들은 방콕에서 열리는 WCC 총회에 공산당들과 같이 참석했거든요. 그리고 6.25 때도 공산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지금도 살아 있는 모모 목사가 대표들로 나서는둥 수백명의 기독교 인사들이 YMCA회관인가에 모여서 소위 “인민군환영대회”를 “김일성 장군... 운운” 하며 열었습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반대한 장로교총회측에서 김재준이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쳐 그에 반대하는 학생들 수십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항의 했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1952년 자유주의자들이 분리되어 기독교장로회 즉 기장교단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합니다. 여기에는 우두머리들이 주로 자유주의적인 캐나다 선교부가 맡아 선교한 함경도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재준 강원룡 조향록 등...



그때 김재준의 자유신학에 51명의 학생이 항거하였는데 일제말 설립된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전학의 이유는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좌경화 되기 전에 유학을 다녀온 박형룡박사가 만주의 봉천신학원으로부터 귀국하여 고려신학교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34명의 학생들 주요한 인물은 지금도 교계원로로 활동하고 있는 정규오, 김준곤, 박창환, 신복윤 등등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안에서는 50년대에 NAE라는 보수적인 복음주의동지회측에서 세력이 매우 컷습니다.. 그당시 총회장은 명신홍(일제말 칼빈신학교유학, 나중 합동), 한경직(친일경력), 전필순(친일행각으로 반민특위에까지 체포된 자) 목사 등이 하고 있었습니다.



위 기장을 포함한 당시 총회측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회개를 하기보다는 1938년의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한 결의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즉 원인무효시켰는데... 그리고 신사참배를 안했다면 취소가 가능합니다. 다 신사참배 하고서 회개를 안하고 가결시킨 옛날 것만 취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여러번에 걸쳐서 취소하고 또 취소하고 그랬습니다. 장난도 아니고 이거...



그런데 신사참배 회개를 거부한 자들이 무슨 보수 자유를 따지는 게 의미가 별로 있었는지 서로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NAE 측의 우두머리가 지금 ‘합동’에서 나온 ‘개혁’의 정규오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고문이 박형룡박사입니다. 박박사(평북)는 1897년생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기 직전에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1920년대부터 신학교육을 시작한 당시 최고 교수였습니다.



이 박형룡박사가 1947년 중반 고려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있다가 외국선교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신학교의 위치가 부산인 점 그런 것 때문에 서울로 가버리고 서울에서 전학온 34명 학생 전원은 박형룡박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불과 두어달 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실한 거지요.



박형룡박사도 해방후, 평북, 전주 집회 등에서 수차에 걸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때마다 목사들이 들고 일어나 반발하고 집회강사를 못하도록까지 저항하는 고로 회개 보다는 후진양성에 주력하자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1978년경 세상 뜨실 때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님의 말대로 “회개를 우선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WCC를 찬성하는 우두머리가 한경직 목사(1902-2000, 평북, 숭전, 좌경무렵의 프린스턴졸)이고 WCC 즉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측의 우두머리는 박형룡박사였습니다. 이 두사람이 직접 치열하게 싸운 것은 아니고 그 아래사람들이 붙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1958년경 신학교부지를 구입하려는데 박박사가 외국선교부의 원조금 3,000만환을 박호근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날려버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WCC 찬성측에서는 “이때다!” 하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한편 정규오목사(해방후 신학교 1회 졸업생)를 우두머리로 한 NAE측에서는 자신들의 고문이자 스승인 박형룡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WCC 찬성측을 뒤늦게 용공으로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기노회에서 총회에 보낼 총대를 뽑는데 이때 NAE측 목사들이 총대로 많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만 WCC측 한명이 누락되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유리하게 뽑혔으므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발표하면 될 것인데 그냥 넘어가서 이게 나중에 싸움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싸움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WCC에 찬성하는 파들(통합)은 저들끼리 따로 모여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도 있었던 친일파 전필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선교부들의 원조 등 때문에 목사들이 많이 쏠렸을 거는 당연합니다. 당시엔 태반의 사람들에겐 미국이 천당 가는 거였으니깐요. 기독교 학교 등 재산 등은 통합으로 남았지요. 평신도들은 합동측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한편 위기에 몰린 NAE측 목사들은 박형룡박사와 자기들도 한패가 되어 내쫓은 출옥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총회에서 축출한 것을 사과하고 하나로 합칠 것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출옥성도측에서는 자신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고 예배당까지 탈취한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쉽게 화해 할 일은 아니지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데 거절하면 교만하다는 비난을 모면키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고 한편 위기에 몰린 한국보수신학을 살려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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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촐옥성도측 즉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얘기가 점점 흥미 진진하게 전개 되는데...



NAE측과 고려측이 합하는 과정, 다시 분리하는 과정, 그후 전개 되는 상황, 그리고 1979년부터 시작된 합동측이 수십개로 분리되는 과정을 기술하자면 도저히 한두번에 끝내기는 힘들고 앞으로도 여러번 나누어 계속해야 할 것같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그치고 내일부터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나중에 위의 것을 다시 보충 정리하고 맨나중에 최후로 정리하여 한번에 시리즈로 올리겠습니다. 다운로드하여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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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선교위원회가 마련한 오찬에 참석한 교계지도자들(1960.2.18). 지금도 알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위 내용은 많은 교회사 책들을 참고로 하고 여기저기 오랜기간 읽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구두로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도 합했습니다. 자세히 쓴 교회사책이라도 한두권만 읽어서는 위같이 객관적 종합적으로 기술된 것을 찾기는 힘들것입니다.









위글을 가져오게 된 성경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이라는 게 물질입니까?)



에스겔 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현실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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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당하고도 말못하는 충격사연 심층취재**

사진첨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 당하고도 신고하는 율이 2% 정도밖에 안된다고 언론들에 보도된 바가 있다. 법정에 서는 것조차 수치스런 일이지만 그 재판 진행과정에서... 한국의 성폭행은 세계 1위라고 한다. 얼마나 썩은 나라인지 미국은 인구 10만명당 몸파는 여자가 23명인데 우리나라는 몸파는 여자가 무려 1백만명이 넘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몇 cm를... 몇분동안...” 하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 게 진행된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잡아 죽일 것같지만... 재판정에서서 호소하렵니까? 그렇게 “몇 cm를... 몇분동안...” 재판관에 호소하렵니까?



한국의 여성단체에 신고되는 여신도 성폭행 숫자는 엄청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단 1년만에 47건이 신고되었는데 실제 100배에 이르고... 교회의 특성상 모호하게 진행되는 점도 많고... 그런점을 감안하면 성가대원 50명 성폭행등 헤아릴수 없이 많이 여신도들이 교역자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근데 위와같이 당하고도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 모교수가 쓴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이란 책이 있다. 본문과 현장사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현재 한국교회 실정과 교단간 눈치보기 때문에 얼마나 솔직하게 쓰여있나 의심스러웠는데 예상보단 신랄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통합측과 한신대 즉 이른바 진보(내지는 자유)와 그 아류교단의 과거사를 상당부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먹사가 신사참배에 항거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들었고 어느 먹사가 주기철 목사의 노모 등 가족을 목사관에서 끌어내어 탈취했느냐는 등은 언급이 안되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못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이자들이 해방후 한국교회를 주름 잡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최고 지도자로 행세하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위 책의 점수를 매긴다면 한 70점이나 될까? 위 책에 비하여 성결교 소속의 이선교 목사님이 쓴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는 신랄하게 까발긴 점으로 보아 한 80점은 된다. 하기야 이선교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를 검찰청에 반란방조혐의로 고발하여 신문에 보도되고 한동안 그것 때문에 지하언론이 무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 두책이 최초라 할만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친일 친독재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부정 사기 협잡들을 노출시킨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예상보단 불과 몇 개월 사이에 4판까지 나온 것을 보아 그것도 반가운 일이고.





통합측이나 한신측 그리고 합동측에서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출옥성도 성자란자들이) 예배당 쟁탈전을 벌였다...” 즉 자세한 서술도 없이 무조건 소위 성자들이 세상 재산에 탐이 나서 혈안이 된 인간들이라고 하는식으로 매도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출옥성도측에서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 이 문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출옥성도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과 두말없이 피땀흘려 가꾼 교회를 내주고 나와 맨땅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배당을 내놓으라고 총회측(통합과 합동이 분리되기 전)에서 소송을 걸자 그걸 항거하는 성도들이 응소를 하여 장장 10년간에 걸쳐 대법원에까지 가서 판결이 난 것이다. 즉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이다. 그러면 위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은 교인들 90% 이상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니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이다.



사기꾼 먹사와 교회사가중 대부분인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즉 “하나님만이 누가 뭣이 옳은지 아신다”는 것이다. 미친넘들! 성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고 설교까지 하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알 것 아닌가? 일반계시인 양심으로도 판단 할 수가 있는 문제이고. 잘 몰랐다? 그럼 아래 태만의 죄에 해당한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리고 또하나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단순히 신사참배만 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친일하며 갖은 악행을 다하고 동족을 못살게 군 목사들에게 맞는 소리인가? 성경은 치리의 의무성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Y 신과대학 명예교수란 또라이 교회사가는 “그 말에는 반박못할 논리와 신학이 있다”고 하는데 그럼, 컨닝하다 걸린 신학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하고 반발한다면 어떡할 셈인가? 공적인 죄는 공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위에 대한 참고문은 다음 “몸버린시골처녀를” 클릭하며 자세한 것을 읽을 수 있다.



(3-2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자가 속한 교단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까지 체포된 바 있는 일경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추악한 악질 한국교회 지도자를 읽고 싶으면 아래 “치마를 벗고” 안에서 나오는 “최고악질”을 클릭하시면 자세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총회측(합동과 통합, 기장)이 출옥성도들을 독선주의자 분리주의자들로 매도하니 그것을 방어하기에 급급한데 과연 성경신학적으로 그게 옳은 태도인가? 자의적으로 분리했나 쫒겨남을 당한 것인가 하는 사실확인을 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론 아예 맞받어 쳐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실제 처음부터 그런 교단도 두 개나 있다.



아래를 “치마를 벗고” 클릭하면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3-1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왕따 당하는 게 두려웠던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말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하라”(잠 31:8)



당시 응소한 목사는 출옥성도는 아니고 해방후 출옥성도편에 선 1930년대에 한국교회에서 절제운동(주초문제)을 하던 송상석 목사(1897-1977)이다. 이분이 행정능력이 탁월하여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해방후 당시까지 만주봉천신학원에 머물던 한국보수신학계의 거성 박형룡박사(1897-1978)를 배를 전세내어 타고 만주에 가서 비밀리에 모셔온 분이다. 즉 오늘의 총신이 있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치마를 벗고 정조를 스스로 내주는■★←클릭!!



■비명을 지르는 여자는 때려 쓰러뜨린후...■★←클릭!!



■바른진리를 찾아서, 고신환원■★←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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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IP 192.241.172.x    작성일 2020년10월22일 12시19분      
1958년 장로교를 뒤흔든 3천만환 사건

사깃꾼 걸려 -신사참배 거부한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박형룡을 치리하려 들었는가?





3천만환 사건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4811

박형룡의 3000만환 사건을 다시 보다

WCC 논쟁 … 반세기 지나 되풀이 되는 갈등의 거울 삼아야




이범진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다루던지 긍정적으로 다루던 지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바’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은 -어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분열을 야기했다. 그러나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한 분열은 그의 믿는 바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었고, 최선의 방향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다는 데에서 그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믿음에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데에는 진정성이 보인다. ‘믿는 바’와 ‘행동’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유일한 ‘돌출’이 발견된다. 이른 바 3000만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의 ‘믿는 바’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룬다.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박형룡에게 있었던 3000만환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표현’과 ‘의미부여’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wcc 사건을 첨예하게 부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개인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다가 좌절한 단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살핌으로써,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는 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이른바 3000만환 사건

박형룡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이른바 3000만환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적인 평가를 하려는 이들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3』은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교장이던 박형룡은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다.(92쪽)



3000만환은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억원에 달한다.
한 학교의 교장이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3억 원을 ‘교섭비 명분’으로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은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58년 신학교 이사회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역사신학자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당시 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이신덕(1909-1994, 경성제대 법대)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박호근이었다. 박호근은 자신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기지 불하를 의뢰하고 총회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박교장의 결재를 받아 30,162,172환을 이사회의 승낙 없이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박호근이 사기를 친 것이었고, 그것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박용규는 3000만환 사건을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사기’를 친 박호근이라는 사람과, 그를 소개한 박래승과 이신덕의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순수함’은 이 사건에서 객체로 남고, ‘사기꾼’ 박호근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이 들었을 그 ‘말’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사회도 모르게, ‘3억원’을 지불하도록 결재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말이다.



이에 대해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는 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장로 직함을 가진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교장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부지 불하, 건축허가, 학교의 대학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였다.(364쪽)



‘허풍을 떨면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숭의학교 교장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1953년 4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은 그녀에게 ‘사기꾼’ 박호근은 실력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형룡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은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은’ 그는 박호근에게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명목으로 불과 두달 만에 3000만환을 지불했다. 오늘 날 3억에 달하는 이 돈이 두 달만에 사라졌다.



물론 결과는 대지 불하, 건축 허가, 대학 인가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호근은 그 돈을 접대비, 교섭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받았다. 그 당시에 그가 대지 불하 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었다. 사용목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방법은 분명 불법적인 경로였다.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김인서,『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23-25쪽)



결과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박호근 자신도 그가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 방식을 박형룡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기’를 진행하는 데에 돈을 지불한 그 자신도 공범이 되어야 맞다. 아니면 불법적 방법은 그렇다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니 ‘사기’라는 말인가?



그런데 박호근의 반응이 흥미롭다. 보통의 다른 사기꾼들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형룡 박사를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결국 김인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 나가 심문 당하고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으면, 이 문제를 3억원대 ‘사기’와 맞바꾸어야 했을까? 1만 달러는 우리가 본 ‘3000만환’에 포함된 돈으로 보인다(3000만환중에서, 미국에서 온 ‘1만불’(8,800,000환)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북장로교 측 3,000불(2,500,000환), 특별비(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 30,162,172환이었다).



미국에서 온 1만불의 불법적 환전을 지시(실행)할 정도로 박형룡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체가 된 이 사건이 밝혀지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배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앞서 박용규가 주장한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적확한 평가를 덮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변화를 가져온, 세속적 사건



이러한 사건 정황에 빗대어 봤을 때, 박형룡의 사표 수리가 이루어진 1958년 3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충격적이다. 사표 건에 대해서 이사 38명중 20명이 찬성을 하고, 17명이 반대를 한 것이다(1명 기권). 적어도 17명은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이 계속 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사회가 “그것이 고의가 아닌 사기”라는 점을 감안해 “교장사표는 반려하고 대신 불법 지출한 삼천만환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파동 주택(당시 시가 800만환)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했을 때 박형룡의 측근들은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태의 매각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실책을 범한 박형룡을 끌어안은 이유는, 그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을 밀어내려고 하는 세력은 결국 보수, 정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장로교의 자유, 진보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설득전을 펴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를 들고 나왔다.(<기독공보>, 1959.10.5) ‘세속적’ 문제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이를 두고 이영헌은 『한국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면서도 박형룡 박사의 인책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323쪽)



물론, 박용규는 이를 부정한다. 3천만원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측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갈등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박형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동민의 생각은 좀 다르다. 3천만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전의 박형룡은 wcc에 대해서 부드러운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온건한 반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사기를 당한’ 이후에는 급격히 강경해졌다며, 신신학과 단일교회의 두 가지가 쟁점이었는데 ‘용공주의’ 하나가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글(『현대신학비평』제12장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 1972)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3천만환 사건이 있기 전 1958년 3월에 썼던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통일에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교리 무관심주의로 인하여 결국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변해가며, 심지어 이교도까지도 허용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의 글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되는 성명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wcc의 용공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81쪽)



그의 신학적 변화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3천만환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세속적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한 신학’으로 향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wcc논쟁을 보다



사회학자 노치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세속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 분열 현상은 세속화의 추세와 밀접하다는 주장이다. 즉 세속화의 추세에 대한 수용과 저항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고 말이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도, wcc를 지지하는 측은 세속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측은 세속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노치준은 wcc운동이 세속화의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세속화에 대해서 피터버거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요약하면, 제도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인간 의식의 측면에서 이 영역들이 교회의 통제, 권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박형룡은 1976년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아들 박아론의 글이 총신대 학장과 교수진에 의하여 거절된 사실을 접하고 “총신대학의 좌경화의 뚜렷한 징조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세속화를 거부했던 박형룡은, 박호근이 추진했던 세속적인-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역으로 그의 ‘믿는 바’ 신학마저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신학의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갔던, 큰 신학자 박형룡의 생애에 돌출 된 부분으로 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wcc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신학적 영역에서 보기 보다는, 지역적, 역사적, 당파적 영역에서 보아야 그 첨예하고 해묵은 갈등이 바로 보일 것이다. 해법은 물론, 그 안에 있다.







http://reformednews.co.kr/921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총회신학교(박형룡 박사) 3천만환 재정 사고와 그를 이용한 음모

소재열 | 기사입력 2009/08/09 [12:58]



금년 2009년 9월에 소집될 제9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꼭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리폼드뉴스>는 기획연재 시리즈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왜, 무엇 때문에 분열했는지,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입장에서 연재한다. 본 연재는 소재열 목사가 집필하여 곧 출간하게 될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의 일부 내용을 요약해서 연재하게 된다(리폼드뉴스 편집부).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1) 사건을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합동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이용한 W.C.C.측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총회 안에서는 W.C.C.와 NAE라는 두 세력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대립의 씨앗이 발아 되어 갈등관계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갈등과 대립은 이미 1959년 제44회 분열 총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 3천만환 부정지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본다.2) 이러한 시각이 W.C.C.을 지지하는 통합측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W.C.C.의 신학적인 문제로 반대했던 합동측에서는 W.C.C. 운동과 그 신학을 은폐하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3)



이 같은 두 대립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논리이며 분열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확보하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책임을 논할 때에는 양측이 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분열이후 정통성이 자신들의 총회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설명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역사는 주관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그 시대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배경을 살펴서 과거 치열했던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 받게 될 것인지 추적하게 될 것이다.



통합측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으로 전개한다.4) 민경배 교수는 “분열의 기원이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 기금 유용에서 유래된 교장 사임과 관계가 있고 더욱이 에큐메니칼의 중상이라는 박형룡 일파의 소행에서 결국 왔다고 한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5)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에게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진현 목사의 말대로 역사를 그렇게 창작하면 안 된다.6)



조동진 박사는 ‘총회신학교 건축기금의 실체와 그 오용(誤用)에 관한 진상’에 있어서 그 헌금이 어떻게 박형룡 박사에게 전해졌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불법으로 지출했다는 신학교 건축기금 3천만 환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의 장로로 미국의 대 은행금용기업가가 개인적으로 친구로서 교장 박형룡에게 보낸 1만 달러 개인수표와 별도로 공식으로 보내진 10만 달러 중에서 지출한 것이었다. 제 십장로교회 장로의 이 특별헌금은 본래는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세속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불신하는 제 십장로교회의 미국 은행금융가의 거물 장로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통해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원하여 준비된 돈이었다.



1956년 “한국NAE” 총무였던 필자는 WEF 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헌금자는 자기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신학교 교육기금의 제1차 헌금액이 10만 달러였다. 필자는 이 신학기금이 한 교파의 신학교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보다는〈한국복음주의신학교 육재단〉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수령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재단기금으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수의 봉급 지원과 교수 양성 장학금과 건전한 신학 교재의 출판과 세계 수준의 신학도서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WEF 총무에게 보냈다.



그러나 WEF 국제총무의 견해는 달랐다. “이 돈이 장로교 장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신학교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인 박형룡 교장을 믿고 그에게 보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의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적극 만류하였지만 필자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헌금이 교장 박형룡을 통하여 총회신학교에 보내어진 것이다. 제 십장로교회는 끝까지 연합장로교회가 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는 탈퇴하여 지금은 70년대 후반부터 PCA 장로교회 총회에 속하여 있다.”7)



요약한다면, 그 특별헌금은 교장 박형룡의 총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지 그를 축출한 미국연합장로교회 산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장 박형룡이 남산에 있는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하여 3천만 환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지불한 것은 행정상 과오이기는 하지만 그 지불의 결과로 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 불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부터의 헌금이 선교부를 통하지 않고 교장 박형룡이 수령한 것부터 문제를 삼고자 했던 선교부로서는 그것을 교장 박형룡 축출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교장의 행정적 실수를 구실로 박형룡을 추방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는 새 교장을 세운 연합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책에 합치된 신학교로 개편하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박형룡 박사의 진술서를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 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같은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숭의학교의 기지 불하 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OOO불(환액 8,8OO,OOO 환), 북장로 선교부에서 5,OOO불(2,500,OOO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 산액 중 13,807,042환, 1958 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 사건을 추진 중 일부 이사는 격려로써 속히 추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계셨으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만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논하여 지출된 것이므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서 온 돈 10,OOO불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이므로 내 친구로부터 내게 보내 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 경상비에서 임시로 17,973,742환을 유용한 것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려고 생각하고 지불한 것인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8)



총회에 보고 된 이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박형룡 교장께서 교장직을 사임하셨음으로 이를 수리하였사오며”라고 기록하였고 “후임 교장이 선출된 때까지 교장 대리는 총회장으로 하되 이사장이 협동케 하였사오며”9)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박사 사표수리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바쳐 온 박형룡 박사의 사표가 이사회에 의하여 수리되었다. 이사회 전체 회의는 3월 10일 오후 3시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회되어 8일 오전 1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교장 사표수리는 7일 밤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다(밤 회의는 인톤 선교사 집에서 열림). 회의는 이사장 인톤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참석 이사는 42명 중 38명이고 가 부 투표에서 20:17 기권 1표로 수리되었다 한다.



동 회의에서 교장 사표수리에 대한 결정에서



① 1958년 3월 7일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대전제일교회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은 총 38표 중 가 20, 부 17, 기권 1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과장 박내승 씨도 역시 가 30, 부 7, 기권 1로사표가 수리되었다.



② 1958년 3월 8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장 인선위원 9인을 선임키로 하고 선교회 3인, 이사회 3인, 실행이사회 3인을 결정하기로 하고 후임 선정위원으로 선교사 대표 인톤 감부열 감의도 실행이사 대표 전필순(미참 경우에 노진현) 김윤찬, 김재석, 전체 이사 대표 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하였다.



③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박 박사가 계속 집무할 것



모 이사는 회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교장서리를 권세열 교감으로 추천하는 동의 제청이 있었으나, 총회 결의를 상기시키면서(초대 교장엔 선교사도 무방이나 2대 교장 이하는 한국인으로 할 것) 총회 결의가 번복되기 전에는 될 수 없다고 하여 선교사가 교장 사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한편 후임자 결정에는 전체 이사회의에서 2/3의 표를 획득하여야 하며 총회(금년 총회는 금년 9월에 회집 됨)에서 인준을 받아야 정식으로 교장으로 취임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취임은 일러도 10월 초순에야 가능.

한편 사무처장 박래승 목사의 후임은 4월 11일에 회집할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 하며, 총회 인준 여부에는 관계가 없다 한다.10)



제43회 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교장직 사표를 내고 명예교수로 있도록 하면서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 후 신학교에서 물러나서 쉬었고 그가 가르치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천만 환 사건은 수습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43회 총회는 신학교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조직케 하였다. 이를 위해 1959년 1월 20일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새로 조직되는 이사회가 모였다.11) 안광국 목사는 NCC측 인사로서 그가 집필한 「장로회신학대학 70년사」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NAE측은 신학교 3천만환 사건을 무마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재임케 하기 위하여 실행이사를 유리하게 선임코자 했다. 저희들의 비밀히 추천한 실행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환수, 정선득, 양화석, 송암석, 나기환, 노진현, 정일영, 황병혁, 김수영, 전제영, 김윤찬, 황득환, 김치선 등이었고 이사장으로 보이열 목사를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당선된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 안두화, 부 : 김석진

서기 : 안광국, 회계 : 위두찬

실행이사 : 안두화, 김석진, 권세열, 양화석, 보이열, 김재철, 노진현, 계창봉, 이환수, 김재석, 위두찬, 김윤식, 안광국, 황병혁



이상 14인 중 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외에는 다 탈락이 되고 말았음으로 이사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고, 저희는 박형룡 박사의 구명운동이 실패함을 느꼈다.”



이렇게 역전 되기까지 NCC측의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 지휘한 결과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하였다.12)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 사표수리는 총 투표수 38표 중 가 20표, 부 17표, 기권 1표의 근소한 차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처장 박내성의 사표는 압도적인 가표로 가결되었고,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기 전에 신학교 이사회는 회합을 갖고 후임 교장을 선출키 위하여 투표에 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명되었다.



교장 지명투표 - 게일승 19표, 명신홍 17표, 기권 2표

교장 선거투표 - 계승일 가 18표 부 19표 기권 1표



교장 선임에 실패한 이사회는 다시 인선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안두화, 김석진, 노진현, 권연호, 김재석, 안광국, 김윤찬. 그러나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시비로 인하여 비상정회가 되자 교장선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이것이 분열 전의 마지막 이사회였다.13)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으로 처음에 준비한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였다.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지도 과정에서 본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논문을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이 더 권위있는 논문이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지도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장로교회 분열사>가 탄생되었다. 본 논문은 공적 문서를 기준으로 신국판 500여 페이지로 준비된 논문이다. 곧 출판된다.









치마를 벗고 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오늘의 사태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이 되어야 한다...



[7/7] 눈팅1 IP 121.254.16.x 작성일 2009년1월11일 09시49분

제가 써프에 자주 들어와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님의 글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자료 첨가해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그 노고와 정성에 감사드리며....



귀하가 서프라이즈에 올리는 기독교 신사참배 문제와 여러 목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서프에서 귀하가 올린 글만 수십차례(우연히 클릭)해서 읽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님이 이상한 글을 올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정독한 결과 내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나는 교인인데 평소에 교회의 죄악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고 신사참배 건도 문제가 있는 것만 피상적으로 알았지, 귀하가 올린 내용처럼 그렇게 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 백정짓이 해방 후에 자행됐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노하였습니다.



나는 귀하의 글 애독자가 되었는데 서프에 들어와서 귀하의 글을 어떻게 찾냐면 자극적인(?) 제목을 우연히 클릭하면 귀하의 반가운 글이 있고, 예전에는 귀하가 ★▶ 이런 찐한 별표, 화살표 문양을 제목에 넣어서 제가 얼른 알아차리고 클릭해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서프에 와서도 시간을 많이 쓸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글이나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귀하의 글을 찾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부디 귀하의 글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직 귀하가 링크한 파일은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클릭해서 다운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내 조심성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어떤 경건한 개혁목사이자 신학자는 당시의 썩어빠진 사이비 목사들을 향해 "잡종 성직자" "우상의 목자" "바벨을 사랑하는 자"라고 격하게 비판하였더군요. 나는 이 말이 오늘의 많은 사이비 목사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진실하게 믿어보고 이웃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부족한 저에게는 한국교회의 과거 어두운 역사와 현재 많은 목사들의 더러운 행태를 알려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그럼...





출옥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신사참배 찬성파들이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면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예측 대비할 수 있고, 잘못된 미래를 막기 위한 예방 효과를 갖는다. -김두식 교수





아래가 어느 분이 여러해전 "성경 다음으로 보관 하겠습니다!!"라고 댓글을 올린 글



치마를 벗고◆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수치의 순간



◆강조점들을 컬러처리하여 기억하기에 좋게 만들었사오니 저장해 두시어 여기저기 게시판들에 푸기 등 많은 이용바랍니다. 서문은 맨뒤로 옮겼습니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숫처녀가★갈보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났습메

한국교회는 이 공적인 불경건 죄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교단적으로 회개를 한적이 없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교 총회가 일본 우상에 절하는 것에 찬성을 가결하였는데 여기에 맹렬히 반대한 소수의 목사님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평양의 주기철 목사(1897-1944, 경남)는 양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남출신인 한상동 목사(1901-1976)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이고 다녔다



한상동 목사(평신, 고려파 총수, 고신대학장)

그리고 만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메이쳔파 선교사인 한부선 선교사(1903-1992년, 나중 고려파에 가담)가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2차대전 발발후 귀국보다는 감옥행을 택하였다가 나중 포로교환 때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지도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옥중 교인들의 특별기도회의 결과 1946년 9월 20일 개교했다. 고려학교를 설립한 후 앞줄 왼쪽부터 한부선, 주남선, 박윤선, 한상동. ⓒKPM



이러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닌 목사, 전도사들의 숫자는 많지는 않다. 현재 충현교회 원로 목사인 김창인 목사의 경우는 반대하다가 만주로 도망을 가서 신앙적인 정조는 지킨 셈이다. 신학교는 1950년대 말에 가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고 있는 바는 목사는 당연히 이러한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에스겔 3 :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에스겔 3 :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일본우상에 절하는 것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순교자의 수는 약 50명이고 고문과 옥중기아와 추위(영하 40도)를 견디어내고 출옥한 성도들의 숫자는 20여명이다. 그래서 이들을 “옥중성도(獄中聖徒)”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고 부른다.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출옥성도들, 유명한 사진인데 구하기 힘든 고화질 저장바람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다.)



해방이 되자 일본우상에 절한 목사들은 면목을 잃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옥중성도들은 배도한 한국교회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2천명 정도 되는 장로교 목사들은 자신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이에 대하여 반발하고 저항을 하게 되었다. 출옥성도들이 제출한 회개법안이란 것은 단 2개월의 자숙기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반발 한 것이다. 만주로부터 귀국한 평신교수였던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졸업, 평신, 고신초대교장, 총신 교수 역임)가 수양회 도중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자 다음날부터 강사자격을 박탈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평신교수, 고신교장, 총신교수)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습격되어 구타 고문 당한 후 해산된 것같은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벌어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3년동안 목회를 못하고 그 동안에 지하에 있던 목사들이 교회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아마도 99.9%가 넘는 양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편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50대의 목사들조차도 자세한 얘기는 거의 모른다. 아니, 아예 관심 대상조차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식(歷史意識)의 결여(缺如)를 볼 수 있고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가 있는 것이다.



1951년에 6.25중 부산에서 장로교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배도한 목사들이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제명해 버렸다. 그리고 시무중인 예배당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요새 어느 토론장에 어떤 분이 “■나성한인교회 속보” 하고 올려놓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출옥성도중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저항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대부분의 성도들 약 4백명과 예배당을 내주고 나와 맨땅 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때 초량교회를 접수한 목사가 년전에 세상을 뜬 1958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한 노진현목사이다. 당시 초량교회에 남아서 예배당을 차지한 교인들 수는 구영기 목사, 양성봉장로 등 20명 정도이다.



위에서 구영기 목사는 예배당을 내주고 나온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스스로 말하기를, 인간취급을 못 받았고 경남지사로 이승만 박사의 총애를 받던 양성봉 장로는 훗날 60년대에 세상을 뜰 때 당시의 잘못을 회개(悔改)하고 한상동 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 탈취한 당시 장로교 총회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출옥성도는 내주고 나왔으나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교회는 그렇게 탈취가 용이하지 않았다. 피땀 흘려 세운 예배당을 쉽게 내주리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약신 목사(1952년 고려파 1대 총노회장, 이효재 교수 부친)등이 시무하던 교회 등은 탈취할 틈새가 없어서 탈취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총회측(당시에는 합동과 통합측이 나뉘기 전)에서는 법정에 소송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고소할 것을 금지하는 유명(有名)한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6 : 1-7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위 총회측의 “법정 고소”에 대하여 “응소”한 분이 1930년대 한국교회에서 주초문제 등 절제운동을 하기도 한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1897-1978)이다. 그래서 장장 10여년 세월에 걸쳐서 대법원에까지 올라가는 법정 공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1896-1980, 고신의 행정지도자, 속칭 ‘부곡사단’ 총수)

총회측에서 출옥성도측을 고소한 이유는



☆ 재산이 탐나고 또 교인 이탈을 막고자 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다음과 속셈이 있었다.



☆ 즉 “출옥성도라는 사람들이 뭘 세상 재산에 관심을 갖느냐?”는 식으로 망신을 주고자 하는 비열한 계산.



☆ 또 고소한 인간보다는 고소를 당하는 쪽이 시달린다는 것을 이용하고자 아는 속셈과



☆ 고려파 내부를 흔들어 놓고자 하는 교활한 착상.



아닌 게 아니라 우선 고려파 내부에서 논란이 심하게 일게 되었다. 즉 박윤선 교수가 응소를 극력 반대하여 송상석 목사와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윤선 교수(1905-1988, 평북 철산, 고신교장, 총신교장, 합신교장)

박윤선 교수는 앞서의 ‘고린도 전서 6장’을 들어 여기에 위배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하였고 이에 항거하는 송상석 목사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고소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응소한 것이다.



* 위 구절은 같은 형제간의 문제이다. 갈려져서 서로 “치리기관”이 다르니 총회측과 고려파측이 서로 잘못이 있을 때 내부적인 치리를 할 수 없으므로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10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의 항거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런데 1960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갈릴 때 합동측 목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과거 출옥성도들을 쫓아낸 것을 사과하고 하나가 되자 했을 때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한국 보수신앙의 위기였기 때문에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내세우고 합동하게 되었다. 이때 합동총회의 사회를 본 분이 바로 송상석 목사이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총회장을 한상동 목사가 연임했으니 처음 약속과 달리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나가므로 부득이 다시 분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상동 목사의 1962년 ‘복교선언’이다. 이때 경남노회 소속의 고신측 교회는 송상석 목사의 탁월한 행정력에 힘입어 거의 다 환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로 이북출신의 목사님들로서 고려파에 가담했던 분들은 환원하지 않고 합동측 교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주요한 분들은 나중에 1980년대에 합동측의 총회장을 역임한 세사람 김창인, 최훈, 김현중 목사(2001년 소천)등이다. 이 세사람은 모두 신학교는 1950년대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면 그 대법원까지 올라간 “예배당 양도 소송”의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1965년 판결은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응소한 처음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의 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응소항전이 계속 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로(출옥성도 지지측이 예배를 못 드리게 막거나 시간을 갈라서 예배를 보게된 일) 많은 교인들이 여러 교회를 만들어 나가거나 이웃 다른 교파의 교회로 옮기거나 하게 되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교인들 알박기 등 그래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숫자가 적으므로 예배당은 통합측에 내주고 교육관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응소에 반대하는 박윤선 교수는 고려파 탈퇴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3. 결언



위같은 이러한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난후 교회간에 분쟁이 있을 때 처리는 쉬워지게 되었다. 즉 송상석 목사의 소신이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나중에 심판하실 것인가?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의 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신자들은 앞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다면 어떡할 것인가?



* 고소를 한 총회측 목사들이 잘한 것인지?

* 응소한 송상석 목사도 잘 한 것인지?

*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가 잘 한 것인지?



한상동 목사가 잘했고 송상석 목사 박윤선 목사도 각각 잘 한 것인가?

대법원에까지 가서 예배당 탈취에 성공한 총회측 목사들이 “승리(勝利)의 기쁨”을 누렸으니 신나는 일인가?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목사의 처신은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바 있지만 ▼“사람이 패거리를 이루어 환장을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게시판에 들르는 여러분들은 각별히 이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 탈취하고 천당 안가기로 작정한 다음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회개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게 아닌 다음에야 기독신문 주필인 한명수 목사의 다음 말을 빌어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경직 목사님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63빌딩에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신사참배에 대해 자숙한다고 해서 상당히 그 자리가 엄숙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투옥되고 순교한 사람들 앞에 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멘~~~~~~~~~~~~~~▶









사진첨부 추악한 한국장로교회사

내일의 교훈



사진 & 추악한 한국장로교사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만석 간사--(맨 뒤 추가 설명)





●한국장로교의 추악한 역사를 밝힌다●



* 성경에 더러운 얘기는 감추고 기술이 안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다 모두 기술했지요. 그러한 추악한 얘기들을 왜 읽습니까? 후세에 교훈을 삼았지요! 과거에 눈감으면 현재에도 봉사가 됩니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오늘 바로잡지 아니하면 밝은 내일은 없습니다.



* 다른 교파들은 더 했으면 더해서 아예 바르게 살아보자는 분들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오해는 마십시오.



*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아직도 장로교 각교단들이 교단적으로 회개 선언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언한 것은 있습니다.(●부록1) 맨뒤에 붙입니다. 회개할 때까지 회개를 촉구하는 게 성경적이며 이제 사회가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때입니다.(●부록2) 건전한 상식부텀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RE;[질문]합동.통합.... : 아주 자세한 설명 1



* 계속 주요 내용을 추가 개정하고 있으니 참고 하실 분은 다운로드 해놓으시면 좋습니다. 성경공부 백번 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가치가 훨씬 더 있습니다.





맑은 새벽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곳의 글을 읽다가 보니 기독교에 '합동' , '통합'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장로교나 침례교와같은 교파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미국이나 외국에도 합동파, 통합파등이 있나요?



기독교에도 종류가 많은것 같아 헷갈리네요? 잘 알고 있는 분 계시면 간단한 설명 부탁합니다.



안녕히...



[ 김 형석 : ]





자세한 설명: 우선 쓴 것을 올리고 몇시간후 나머지 부분들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장로교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도적인 교파로 전개신교인의 70% 정도를 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242개 장로교 교단들이 있습니다.



해방전까지는 장로교파는 한 개였습니다. 미국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등 여러나라 장로교선교부에서 왔지만 협력하여 전도했기 때문에 교파는 하나였고 신학교도 1908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로 하나였습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08-3.gif

(평양에 설립 (1901)된 장로회신학교는 이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사진은 1908년에 건축된 초기 교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장로교가 1938년도에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고 그 이후 예배당안의 강대상 전면에 일본 우상신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먼저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끔찍한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악질목사들의 주도로 일본중이 주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의식을 한강이나 혹은 추운겨울에 바다에 나가 완전 나체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감리교파나 성결교, 카토릭은 등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섰기 때문에 뭐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 것입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43.gif

(일본에 가선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가장 강력히 저항한 교파가 장로교파였는데 그 저항을 한 목사님은 약 천명 가까운 평양신학교 졸업생인 목사들중 겨우 20여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다수가 감옥에서 순교하고 일부가 살아서 해방후 출옥하였는데 이들을 “옥중성도”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 부릅니다. 약 20여 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전도사였던 분도 있고 여전도사도 몇분 있었습니다.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계신 분이 두어분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이분들을 이름을 아는 분이 0.01%나 제대로 될까요? 놀랍지요! 영양실조 기아로 여러분들이 줄줄이 순교하셨는데...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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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 평양)

-위 쪽에 더 고화질로 나와 생략-



해방후 신사참배에 나섰던 목사들은 참으로 면목이 없게 되었는데 나치에 협력했던 도이치 기독교단에 소속되었던 독일의 목사들은 종전후 3년간 목회를 안하고 자숙을 하고 그동안 나치치하에서 지하교회로 있었던 고백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일제에 아부하려고 신사참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혹은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끔찍한 고문을 받게한 목사들이 속을 못차리고 교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고 또 많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지지하여 주었으니 문제였습니다. 요사이 김홍도 목사 사건 때 교계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김목사를 지지하는 걸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기득권 즉 밥그릇을 놓칠까 바 혈안이 되어 그러는 겁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안을 제출하고 단2개월간의 자숙기간을 갖자고 하였는데 이것조차도 거부하고 1951년 그 출옥성도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려신학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출옥성도들은 경남출신들이 많아 신학교도 부산에 있는데 고려신학대학이 그것입니다.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교수를 교장으로 하여 1947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고려파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후 그들이 시무중인 예배당을 소송을 걸어서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출옥성도들은 두말 않고 내주고 나왔습니다. 이 교회당을 피땀흘려 가꿔온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을 버리고 빈손으로 출옥성도들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에 분개하여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친일파목사들의 총회에서 소송을 걸어서 10년간에 걸쳐서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제치고 예배당을 탈취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항거한 분을 지지하는 성도가 대다수였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고로 제2문창교회, 동광교회등 새교회를 세워 나기도 하고 다른교회로 옮기거나 하여 예배당은 결국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고신측 송상석목사의 소신대로 “교회건물은 교인의 총유”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분쟁시 문제가 없습니다. 숫자적으로 우세한 측이 처음부터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식으로라면 맨처음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교회는 출옥성도를 따라서 그 교회를 나온 교인이 90%가 넘었으므로 그 예배당은 출옥성도측 교인들의 것인셈입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차대전후 결성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도 참여하고 노선이 불분명하고 불교 마호멧교와도 짬뽕을 하려고 논의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48년인가 장로교가 아직 하나일 때 몇몇 정치목사들이 가서 무조건 가입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국장로교는 WCC 소속이 된 겁니다. 여기에 옥중성도측은 처음부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에는 국회에서 감리교목사이자 독립투사인 국회의원 이규갑(1887-1970, 충무공 이순신 9대손, 사모인 이애라도 독립투사)외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WCC를 용공이라고 성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 것이 전선에서는 공산군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장로교대표들은 방콕에서 열리는 WCC 총회에 공산당들과 같이 참석했거든요. 그리고 6.25 때도 공산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지금도 살아 있는 모모 목사가 대표들로 나서는둥 수백명의 기독교 인사들이 YMCA회관인가에 모여서 소위 “인민군환영대회”를 “김일성 장군... 운운” 하며 열었습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반대한 장로교총회측에서 김재준이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쳐 그에 반대하는 학생들 수십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항의 했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1952년 자유주의자들이 분리되어 기독교장로회 즉 기장교단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합니다. 여기에는 우두머리들이 주로 자유주의적인 캐나다 선교부가 맡아 선교한 함경도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재준 강원룡 조향록 등...



그때 김재준의 자유신학에 51명의 학생이 항거하였는데 일제말 설립된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전학의 이유는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좌경화 되기 전에 유학을 다녀온 박형룡박사가 만주의 봉천신학원으로부터 귀국하여 고려신학교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34명의 학생들 주요한 인물은 지금도 교계원로로 활동하고 있는 정규오, 김준곤, 박창환, 신복윤 등등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안에서는 50년대에 NAE라는 보수적인 복음주의동지회측에서 세력이 매우 컷습니다.. 그당시 총회장은 명신홍(일제말 칼빈신학교유학, 나중 합동), 한경직(친일경력), 전필순(친일행각으로 반민특위에까지 체포된 자) 목사 등이 하고 있었습니다.



위 기장을 포함한 당시 총회측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회개를 하기보다는 1938년의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한 결의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즉 원인무효시켰는데... 그리고 신사참배를 안했다면 취소가 가능합니다. 다 신사참배 하고서 회개를 안하고 가결시킨 옛날 것만 취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여러번에 걸쳐서 취소하고 또 취소하고 그랬습니다. 장난도 아니고 이거...



그런데 신사참배 회개를 거부한 자들이 무슨 보수 자유를 따지는 게 의미가 별로 있었는지 서로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NAE 측의 우두머리가 지금 ‘합동’에서 나온 ‘개혁’의 정규오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고문이 박형룡박사입니다. 박박사(평북)는 1897년생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기 직전에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1920년대부터 신학교육을 시작한 당시 최고 교수였습니다.



이 박형룡박사가 1947년 중반 고려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있다가 외국선교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신학교의 위치가 부산인 점 그런 것 때문에 서울로 가버리고 서울에서 전학온 34명 학생 전원은 박형룡박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불과 두어달 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실한 거지요.



박형룡박사도 해방후, 평북, 전주 집회 등에서 수차에 걸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때마다 목사들이 들고 일어나 반발하고 집회강사를 못하도록까지 저항하는 고로 회개 보다는 후진양성에 주력하자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1978년경 세상 뜨실 때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님의 말대로 “회개를 우선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WCC를 찬성하는 우두머리가 한경직 목사(1902-2000, 평북, 숭전, 좌경무렵의 프린스턴졸)이고 WCC 즉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측의 우두머리는 박형룡박사였습니다. 이 두사람이 직접 치열하게 싸운 것은 아니고 그 아래사람들이 붙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1958년경 신학교부지를 구입하려는데 박박사가 외국선교부의 원조금 3,000만환을 박호근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날려버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WCC 찬성측에서는 “이때다!” 하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한편 정규오목사(해방후 신학교 1회 졸업생)를 우두머리로 한 NAE측에서는 자신들의 고문이자 스승인 박형룡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WCC 찬성측을 뒤늦게 용공으로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기노회에서 총회에 보낼 총대를 뽑는데 이때 NAE측 목사들이 총대로 많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만 WCC측 한명이 누락되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유리하게 뽑혔으므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발표하면 될 것인데 그냥 넘어가서 이게 나중에 싸움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싸움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WCC에 찬성하는 파들(통합)은 저들끼리 따로 모여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도 있었던 친일파 전필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선교부들의 원조 등 때문에 목사들이 많이 쏠렸을 거는 당연합니다. 당시엔 태반의 사람들에겐 미국이 천당 가는 거였으니깐요. 기독교 학교 등 재산 등은 통합으로 남았지요. 평신도들은 합동측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한편 위기에 몰린 NAE측 목사들은 박형룡박사와 자기들도 한패가 되어 내쫓은 출옥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총회에서 축출한 것을 사과하고 하나로 합칠 것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출옥성도측에서는 자신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고 예배당까지 탈취한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쉽게 화해 할 일은 아니지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데 거절하면 교만하다는 비난을 모면키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고 한편 위기에 몰린 한국보수신학을 살려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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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촐옥성도측 즉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얘기가 점점 흥미 진진하게 전개 되는데...



NAE측과 고려측이 합하는 과정, 다시 분리하는 과정, 그후 전개 되는 상황, 그리고 1979년부터 시작된 합동측이 수십개로 분리되는 과정을 기술하자면 도저히 한두번에 끝내기는 힘들고 앞으로도 여러번 나누어 계속해야 할 것같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그치고 내일부터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나중에 위의 것을 다시 보충 정리하고 맨나중에 최후로 정리하여 한번에 시리즈로 올리겠습니다. 다운로드하여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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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선교위원회가 마련한 오찬에 참석한 교계지도자들(1960.2.18). 지금도 알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위 내용은 많은 교회사 책들을 참고로 하고 여기저기 오랜기간 읽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구두로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도 합했습니다. 자세히 쓴 교회사책이라도 한두권만 읽어서는 위같이 객관적 종합적으로 기술된 것을 찾기는 힘들것입니다.









위글을 가져오게 된 성경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이라는 게 물질입니까?)



에스겔 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현실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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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당하고도 말못하는 충격사연 심층취재**

사진첨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 당하고도 신고하는 율이 2% 정도밖에 안된다고 언론들에 보도된 바가 있다. 법정에 서는 것조차 수치스런 일이지만 그 재판 진행과정에서... 한국의 성폭행은 세계 1위라고 한다. 얼마나 썩은 나라인지 미국은 인구 10만명당 몸파는 여자가 23명인데 우리나라는 몸파는 여자가 무려 1백만명이 넘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몇 cm를... 몇분동안...” 하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 게 진행된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잡아 죽일 것같지만... 재판정에서서 호소하렵니까? 그렇게 “몇 cm를... 몇분동안...” 재판관에 호소하렵니까?



한국의 여성단체에 신고되는 여신도 성폭행 숫자는 엄청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단 1년만에 47건이 신고되었는데 실제 100배에 이르고... 교회의 특성상 모호하게 진행되는 점도 많고... 그런점을 감안하면 성가대원 50명 성폭행등 헤아릴수 없이 많이 여신도들이 교역자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근데 위와같이 당하고도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 모교수가 쓴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이란 책이 있다. 본문과 현장사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현재 한국교회 실정과 교단간 눈치보기 때문에 얼마나 솔직하게 쓰여있나 의심스러웠는데 예상보단 신랄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통합측과 한신대 즉 이른바 진보(내지는 자유)와 그 아류교단의 과거사를 상당부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먹사가 신사참배에 항거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들었고 어느 먹사가 주기철 목사의 노모 등 가족을 목사관에서 끌어내어 탈취했느냐는 등은 언급이 안되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못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이자들이 해방후 한국교회를 주름 잡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최고 지도자로 행세하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위 책의 점수를 매긴다면 한 70점이나 될까? 위 책에 비하여 성결교 소속의 이선교 목사님이 쓴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는 신랄하게 까발긴 점으로 보아 한 80점은 된다. 하기야 이선교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를 검찰청에 반란방조혐의로 고발하여 신문에 보도되고 한동안 그것 때문에 지하언론이 무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 두책이 최초라 할만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친일 친독재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부정 사기 협잡들을 노출시킨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예상보단 불과 몇 개월 사이에 4판까지 나온 것을 보아 그것도 반가운 일이고.





통합측이나 한신측 그리고 합동측에서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출옥성도 성자란자들이) 예배당 쟁탈전을 벌였다...” 즉 자세한 서술도 없이 무조건 소위 성자들이 세상 재산에 탐이 나서 혈안이 된 인간들이라고 하는식으로 매도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출옥성도측에서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 이 문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출옥성도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과 두말없이 피땀흘려 가꾼 교회를 내주고 나와 맨땅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배당을 내놓으라고 총회측(통합과 합동이 분리되기 전)에서 소송을 걸자 그걸 항거하는 성도들이 응소를 하여 장장 10년간에 걸쳐 대법원에까지 가서 판결이 난 것이다. 즉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이다. 그러면 위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은 교인들 90% 이상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니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이다.



사기꾼 먹사와 교회사가중 대부분인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즉 “하나님만이 누가 뭣이 옳은지 아신다”는 것이다. 미친넘들! 성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고 설교까지 하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알 것 아닌가? 일반계시인 양심으로도 판단 할 수가 있는 문제이고. 잘 몰랐다? 그럼 아래 태만의 죄에 해당한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리고 또하나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단순히 신사참배만 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친일하며 갖은 악행을 다하고 동족을 못살게 군 목사들에게 맞는 소리인가? 성경은 치리의 의무성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Y 신과대학 명예교수란 또라이 교회사가는 “그 말에는 반박못할 논리와 신학이 있다”고 하는데 그럼, 컨닝하다 걸린 신학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하고 반발한다면 어떡할 셈인가? 공적인 죄는 공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위에 대한 참고문은 다음 “몸버린시골처녀를” 클릭하며 자세한 것을 읽을 수 있다.



(3-2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자가 속한 교단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까지 체포된 바 있는 일경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추악한 악질 한국교회 지도자를 읽고 싶으면 아래 “치마를 벗고” 안에서 나오는 “최고악질”을 클릭하시면 자세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총회측(합동과 통합, 기장)이 출옥성도들을 독선주의자 분리주의자들로 매도하니 그것을 방어하기에 급급한데 과연 성경신학적으로 그게 옳은 태도인가? 자의적으로 분리했나 쫒겨남을 당한 것인가 하는 사실확인을 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론 아예 맞받어 쳐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실제 처음부터 그런 교단도 두 개나 있다.



아래를 “치마를 벗고” 클릭하면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3-1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왕따 당하는 게 두려웠던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말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하라”(잠 31:8)



당시 응소한 목사는 출옥성도는 아니고 해방후 출옥성도편에 선 1930년대에 한국교회에서 절제운동(주초문제)을 하던 송상석 목사(1897-1977)이다. 이분이 행정능력이 탁월하여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해방후 당시까지 만주봉천신학원에 머물던 한국보수신학계의 거성 박형룡박사(1897-1978)를 배를 전세내어 타고 만주에 가서 비밀리에 모셔온 분이다. 즉 오늘의 총신이 있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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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IP 192.241.172.x    작성일 2020년10월22일 12시19분      
1958년 장로교를 뒤흔든 3천만환 사건

사깃꾼 걸려 -신사참배 거부한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박형룡을 치리하려 들었는가?





3천만환 사건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4811

박형룡의 3000만환 사건을 다시 보다

WCC 논쟁 … 반세기 지나 되풀이 되는 갈등의 거울 삼아야




이범진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다루던지 긍정적으로 다루던 지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바’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은 -어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분열을 야기했다. 그러나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한 분열은 그의 믿는 바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었고, 최선의 방향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다는 데에서 그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믿음에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데에는 진정성이 보인다. ‘믿는 바’와 ‘행동’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유일한 ‘돌출’이 발견된다. 이른 바 3000만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의 ‘믿는 바’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룬다.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박형룡에게 있었던 3000만환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표현’과 ‘의미부여’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wcc 사건을 첨예하게 부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개인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다가 좌절한 단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살핌으로써,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는 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이른바 3000만환 사건

박형룡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이른바 3000만환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적인 평가를 하려는 이들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3』은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교장이던 박형룡은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다.(92쪽)



3000만환은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억원에 달한다.
한 학교의 교장이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3억 원을 ‘교섭비 명분’으로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은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58년 신학교 이사회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역사신학자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당시 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이신덕(1909-1994, 경성제대 법대)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박호근이었다. 박호근은 자신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기지 불하를 의뢰하고 총회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박교장의 결재를 받아 30,162,172환을 이사회의 승낙 없이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박호근이 사기를 친 것이었고, 그것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박용규는 3000만환 사건을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사기’를 친 박호근이라는 사람과, 그를 소개한 박래승과 이신덕의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순수함’은 이 사건에서 객체로 남고, ‘사기꾼’ 박호근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이 들었을 그 ‘말’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사회도 모르게, ‘3억원’을 지불하도록 결재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말이다.



이에 대해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는 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장로 직함을 가진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교장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부지 불하, 건축허가, 학교의 대학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였다.(364쪽)



‘허풍을 떨면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숭의학교 교장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1953년 4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은 그녀에게 ‘사기꾼’ 박호근은 실력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형룡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은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은’ 그는 박호근에게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명목으로 불과 두달 만에 3000만환을 지불했다. 오늘 날 3억에 달하는 이 돈이 두 달만에 사라졌다.



물론 결과는 대지 불하, 건축 허가, 대학 인가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호근은 그 돈을 접대비, 교섭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받았다. 그 당시에 그가 대지 불하 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었다. 사용목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방법은 분명 불법적인 경로였다.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김인서,『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23-25쪽)



결과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박호근 자신도 그가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 방식을 박형룡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기’를 진행하는 데에 돈을 지불한 그 자신도 공범이 되어야 맞다. 아니면 불법적 방법은 그렇다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니 ‘사기’라는 말인가?



그런데 박호근의 반응이 흥미롭다. 보통의 다른 사기꾼들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형룡 박사를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결국 김인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 나가 심문 당하고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으면, 이 문제를 3억원대 ‘사기’와 맞바꾸어야 했을까? 1만 달러는 우리가 본 ‘3000만환’에 포함된 돈으로 보인다(3000만환중에서, 미국에서 온 ‘1만불’(8,800,000환)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북장로교 측 3,000불(2,500,000환), 특별비(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 30,162,172환이었다).



미국에서 온 1만불의 불법적 환전을 지시(실행)할 정도로 박형룡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체가 된 이 사건이 밝혀지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배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앞서 박용규가 주장한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적확한 평가를 덮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변화를 가져온, 세속적 사건



이러한 사건 정황에 빗대어 봤을 때, 박형룡의 사표 수리가 이루어진 1958년 3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충격적이다. 사표 건에 대해서 이사 38명중 20명이 찬성을 하고, 17명이 반대를 한 것이다(1명 기권). 적어도 17명은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이 계속 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사회가 “그것이 고의가 아닌 사기”라는 점을 감안해 “교장사표는 반려하고 대신 불법 지출한 삼천만환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파동 주택(당시 시가 800만환)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했을 때 박형룡의 측근들은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태의 매각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실책을 범한 박형룡을 끌어안은 이유는, 그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을 밀어내려고 하는 세력은 결국 보수, 정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장로교의 자유, 진보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설득전을 펴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를 들고 나왔다.(<기독공보>, 1959.10.5) ‘세속적’ 문제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이를 두고 이영헌은 『한국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면서도 박형룡 박사의 인책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323쪽)



물론, 박용규는 이를 부정한다. 3천만원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측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갈등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박형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동민의 생각은 좀 다르다. 3천만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전의 박형룡은 wcc에 대해서 부드러운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온건한 반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사기를 당한’ 이후에는 급격히 강경해졌다며, 신신학과 단일교회의 두 가지가 쟁점이었는데 ‘용공주의’ 하나가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글(『현대신학비평』제12장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 1972)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3천만환 사건이 있기 전 1958년 3월에 썼던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통일에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교리 무관심주의로 인하여 결국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변해가며, 심지어 이교도까지도 허용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의 글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되는 성명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wcc의 용공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81쪽)



그의 신학적 변화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3천만환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세속적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한 신학’으로 향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wcc논쟁을 보다



사회학자 노치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세속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 분열 현상은 세속화의 추세와 밀접하다는 주장이다. 즉 세속화의 추세에 대한 수용과 저항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고 말이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도, wcc를 지지하는 측은 세속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측은 세속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노치준은 wcc운동이 세속화의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세속화에 대해서 피터버거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요약하면, 제도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인간 의식의 측면에서 이 영역들이 교회의 통제, 권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박형룡은 1976년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아들 박아론의 글이 총신대 학장과 교수진에 의하여 거절된 사실을 접하고 “총신대학의 좌경화의 뚜렷한 징조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세속화를 거부했던 박형룡은, 박호근이 추진했던 세속적인-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역으로 그의 ‘믿는 바’ 신학마저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신학의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갔던, 큰 신학자 박형룡의 생애에 돌출 된 부분으로 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wcc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신학적 영역에서 보기 보다는, 지역적, 역사적, 당파적 영역에서 보아야 그 첨예하고 해묵은 갈등이 바로 보일 것이다. 해법은 물론, 그 안에 있다.







http://reformednews.co.kr/921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총회신학교(박형룡 박사) 3천만환 재정 사고와 그를 이용한 음모

소재열 | 기사입력 2009/08/09 [12:58]



금년 2009년 9월에 소집될 제9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꼭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리폼드뉴스>는 기획연재 시리즈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왜, 무엇 때문에 분열했는지,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입장에서 연재한다. 본 연재는 소재열 목사가 집필하여 곧 출간하게 될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의 일부 내용을 요약해서 연재하게 된다(리폼드뉴스 편집부).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1) 사건을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합동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이용한 W.C.C.측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총회 안에서는 W.C.C.와 NAE라는 두 세력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대립의 씨앗이 발아 되어 갈등관계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갈등과 대립은 이미 1959년 제44회 분열 총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 3천만환 부정지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본다.2) 이러한 시각이 W.C.C.을 지지하는 통합측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W.C.C.의 신학적인 문제로 반대했던 합동측에서는 W.C.C. 운동과 그 신학을 은폐하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3)



이 같은 두 대립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논리이며 분열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확보하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책임을 논할 때에는 양측이 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분열이후 정통성이 자신들의 총회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설명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역사는 주관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그 시대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배경을 살펴서 과거 치열했던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 받게 될 것인지 추적하게 될 것이다.



통합측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으로 전개한다.4) 민경배 교수는 “분열의 기원이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 기금 유용에서 유래된 교장 사임과 관계가 있고 더욱이 에큐메니칼의 중상이라는 박형룡 일파의 소행에서 결국 왔다고 한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5)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에게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진현 목사의 말대로 역사를 그렇게 창작하면 안 된다.6)



조동진 박사는 ‘총회신학교 건축기금의 실체와 그 오용(誤用)에 관한 진상’에 있어서 그 헌금이 어떻게 박형룡 박사에게 전해졌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불법으로 지출했다는 신학교 건축기금 3천만 환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의 장로로 미국의 대 은행금용기업가가 개인적으로 친구로서 교장 박형룡에게 보낸 1만 달러 개인수표와 별도로 공식으로 보내진 10만 달러 중에서 지출한 것이었다. 제 십장로교회 장로의 이 특별헌금은 본래는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세속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불신하는 제 십장로교회의 미국 은행금융가의 거물 장로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통해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원하여 준비된 돈이었다.



1956년 “한국NAE” 총무였던 필자는 WEF 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헌금자는 자기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신학교 교육기금의 제1차 헌금액이 10만 달러였다. 필자는 이 신학기금이 한 교파의 신학교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보다는〈한국복음주의신학교 육재단〉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수령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재단기금으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수의 봉급 지원과 교수 양성 장학금과 건전한 신학 교재의 출판과 세계 수준의 신학도서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WEF 총무에게 보냈다.



그러나 WEF 국제총무의 견해는 달랐다. “이 돈이 장로교 장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신학교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인 박형룡 교장을 믿고 그에게 보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의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적극 만류하였지만 필자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헌금이 교장 박형룡을 통하여 총회신학교에 보내어진 것이다. 제 십장로교회는 끝까지 연합장로교회가 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는 탈퇴하여 지금은 70년대 후반부터 PCA 장로교회 총회에 속하여 있다.”7)



요약한다면, 그 특별헌금은 교장 박형룡의 총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지 그를 축출한 미국연합장로교회 산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장 박형룡이 남산에 있는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하여 3천만 환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지불한 것은 행정상 과오이기는 하지만 그 지불의 결과로 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 불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부터의 헌금이 선교부를 통하지 않고 교장 박형룡이 수령한 것부터 문제를 삼고자 했던 선교부로서는 그것을 교장 박형룡 축출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교장의 행정적 실수를 구실로 박형룡을 추방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는 새 교장을 세운 연합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책에 합치된 신학교로 개편하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박형룡 박사의 진술서를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 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같은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숭의학교의 기지 불하 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OOO불(환액 8,8OO,OOO 환), 북장로 선교부에서 5,OOO불(2,500,OOO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 산액 중 13,807,042환, 1958 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 사건을 추진 중 일부 이사는 격려로써 속히 추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계셨으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만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논하여 지출된 것이므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서 온 돈 10,OOO불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이므로 내 친구로부터 내게 보내 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 경상비에서 임시로 17,973,742환을 유용한 것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려고 생각하고 지불한 것인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8)



총회에 보고 된 이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박형룡 교장께서 교장직을 사임하셨음으로 이를 수리하였사오며”라고 기록하였고 “후임 교장이 선출된 때까지 교장 대리는 총회장으로 하되 이사장이 협동케 하였사오며”9)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박사 사표수리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바쳐 온 박형룡 박사의 사표가 이사회에 의하여 수리되었다. 이사회 전체 회의는 3월 10일 오후 3시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회되어 8일 오전 1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교장 사표수리는 7일 밤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다(밤 회의는 인톤 선교사 집에서 열림). 회의는 이사장 인톤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참석 이사는 42명 중 38명이고 가 부 투표에서 20:17 기권 1표로 수리되었다 한다.



동 회의에서 교장 사표수리에 대한 결정에서



① 1958년 3월 7일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대전제일교회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은 총 38표 중 가 20, 부 17, 기권 1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과장 박내승 씨도 역시 가 30, 부 7, 기권 1로사표가 수리되었다.



② 1958년 3월 8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장 인선위원 9인을 선임키로 하고 선교회 3인, 이사회 3인, 실행이사회 3인을 결정하기로 하고 후임 선정위원으로 선교사 대표 인톤 감부열 감의도 실행이사 대표 전필순(미참 경우에 노진현) 김윤찬, 김재석, 전체 이사 대표 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하였다.



③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박 박사가 계속 집무할 것



모 이사는 회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교장서리를 권세열 교감으로 추천하는 동의 제청이 있었으나, 총회 결의를 상기시키면서(초대 교장엔 선교사도 무방이나 2대 교장 이하는 한국인으로 할 것) 총회 결의가 번복되기 전에는 될 수 없다고 하여 선교사가 교장 사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한편 후임자 결정에는 전체 이사회의에서 2/3의 표를 획득하여야 하며 총회(금년 총회는 금년 9월에 회집 됨)에서 인준을 받아야 정식으로 교장으로 취임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취임은 일러도 10월 초순에야 가능.

한편 사무처장 박래승 목사의 후임은 4월 11일에 회집할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 하며, 총회 인준 여부에는 관계가 없다 한다.10)



제43회 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교장직 사표를 내고 명예교수로 있도록 하면서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 후 신학교에서 물러나서 쉬었고 그가 가르치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천만 환 사건은 수습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43회 총회는 신학교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조직케 하였다. 이를 위해 1959년 1월 20일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새로 조직되는 이사회가 모였다.11) 안광국 목사는 NCC측 인사로서 그가 집필한 「장로회신학대학 70년사」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NAE측은 신학교 3천만환 사건을 무마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재임케 하기 위하여 실행이사를 유리하게 선임코자 했다. 저희들의 비밀히 추천한 실행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환수, 정선득, 양화석, 송암석, 나기환, 노진현, 정일영, 황병혁, 김수영, 전제영, 김윤찬, 황득환, 김치선 등이었고 이사장으로 보이열 목사를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당선된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 안두화, 부 : 김석진

서기 : 안광국, 회계 : 위두찬

실행이사 : 안두화, 김석진, 권세열, 양화석, 보이열, 김재철, 노진현, 계창봉, 이환수, 김재석, 위두찬, 김윤식, 안광국, 황병혁



이상 14인 중 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외에는 다 탈락이 되고 말았음으로 이사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고, 저희는 박형룡 박사의 구명운동이 실패함을 느꼈다.”



이렇게 역전 되기까지 NCC측의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 지휘한 결과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하였다.12)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 사표수리는 총 투표수 38표 중 가 20표, 부 17표, 기권 1표의 근소한 차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처장 박내성의 사표는 압도적인 가표로 가결되었고,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기 전에 신학교 이사회는 회합을 갖고 후임 교장을 선출키 위하여 투표에 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명되었다.



교장 지명투표 - 게일승 19표, 명신홍 17표, 기권 2표

교장 선거투표 - 계승일 가 18표 부 19표 기권 1표



교장 선임에 실패한 이사회는 다시 인선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안두화, 김석진, 노진현, 권연호, 김재석, 안광국, 김윤찬. 그러나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시비로 인하여 비상정회가 되자 교장선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이것이 분열 전의 마지막 이사회였다.13)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으로 처음에 준비한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였다.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지도 과정에서 본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논문을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이 더 권위있는 논문이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지도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장로교회 분열사>가 탄생되었다. 본 논문은 공적 문서를 기준으로 신국판 500여 페이지로 준비된 논문이다. 곧 출판된다.









치마를 벗고 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오늘의 사태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이 되어야 한다...



[7/7] 눈팅1 IP 121.254.16.x 작성일 2009년1월11일 09시49분

제가 써프에 자주 들어와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님의 글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자료 첨가해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그 노고와 정성에 감사드리며....



귀하가 서프라이즈에 올리는 기독교 신사참배 문제와 여러 목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서프에서 귀하가 올린 글만 수십차례(우연히 클릭)해서 읽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님이 이상한 글을 올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정독한 결과 내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나는 교인인데 평소에 교회의 죄악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고 신사참배 건도 문제가 있는 것만 피상적으로 알았지, 귀하가 올린 내용처럼 그렇게 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 백정짓이 해방 후에 자행됐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노하였습니다.



나는 귀하의 글 애독자가 되었는데 서프에 들어와서 귀하의 글을 어떻게 찾냐면 자극적인(?) 제목을 우연히 클릭하면 귀하의 반가운 글이 있고, 예전에는 귀하가 ★▶ 이런 찐한 별표, 화살표 문양을 제목에 넣어서 제가 얼른 알아차리고 클릭해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서프에 와서도 시간을 많이 쓸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글이나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귀하의 글을 찾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부디 귀하의 글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직 귀하가 링크한 파일은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클릭해서 다운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내 조심성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어떤 경건한 개혁목사이자 신학자는 당시의 썩어빠진 사이비 목사들을 향해 "잡종 성직자" "우상의 목자" "바벨을 사랑하는 자"라고 격하게 비판하였더군요. 나는 이 말이 오늘의 많은 사이비 목사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진실하게 믿어보고 이웃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부족한 저에게는 한국교회의 과거 어두운 역사와 현재 많은 목사들의 더러운 행태를 알려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그럼...





출옥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신사참배 찬성파들이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면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예측 대비할 수 있고, 잘못된 미래를 막기 위한 예방 효과를 갖는다. -김두식 교수





아래가 어느 분이 여러해전 "성경 다음으로 보관 하겠습니다!!"라고 댓글을 올린 글



치마를 벗고◆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수치의 순간



◆강조점들을 컬러처리하여 기억하기에 좋게 만들었사오니 저장해 두시어 여기저기 게시판들에 푸기 등 많은 이용바랍니다. 서문은 맨뒤로 옮겼습니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숫처녀가★갈보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났습메

한국교회는 이 공적인 불경건 죄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교단적으로 회개를 한적이 없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교 총회가 일본 우상에 절하는 것에 찬성을 가결하였는데 여기에 맹렬히 반대한 소수의 목사님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평양의 주기철 목사(1897-1944, 경남)는 양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남출신인 한상동 목사(1901-1976)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이고 다녔다



한상동 목사(평신, 고려파 총수, 고신대학장)

그리고 만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메이쳔파 선교사인 한부선 선교사(1903-1992년, 나중 고려파에 가담)가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2차대전 발발후 귀국보다는 감옥행을 택하였다가 나중 포로교환 때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지도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옥중 교인들의 특별기도회의 결과 1946년 9월 20일 개교했다. 고려학교를 설립한 후 앞줄 왼쪽부터 한부선, 주남선, 박윤선, 한상동. ⓒKPM



이러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닌 목사, 전도사들의 숫자는 많지는 않다. 현재 충현교회 원로 목사인 김창인 목사의 경우는 반대하다가 만주로 도망을 가서 신앙적인 정조는 지킨 셈이다. 신학교는 1950년대 말에 가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고 있는 바는 목사는 당연히 이러한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에스겔 3 :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에스겔 3 :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일본우상에 절하는 것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순교자의 수는 약 50명이고 고문과 옥중기아와 추위(영하 40도)를 견디어내고 출옥한 성도들의 숫자는 20여명이다. 그래서 이들을 “옥중성도(獄中聖徒)”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고 부른다.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출옥성도들, 유명한 사진인데 구하기 힘든 고화질 저장바람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다.)



해방이 되자 일본우상에 절한 목사들은 면목을 잃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옥중성도들은 배도한 한국교회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2천명 정도 되는 장로교 목사들은 자신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이에 대하여 반발하고 저항을 하게 되었다. 출옥성도들이 제출한 회개법안이란 것은 단 2개월의 자숙기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반발 한 것이다. 만주로부터 귀국한 평신교수였던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졸업, 평신, 고신초대교장, 총신 교수 역임)가 수양회 도중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자 다음날부터 강사자격을 박탈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평신교수, 고신교장, 총신교수)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습격되어 구타 고문 당한 후 해산된 것같은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벌어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3년동안 목회를 못하고 그 동안에 지하에 있던 목사들이 교회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아마도 99.9%가 넘는 양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편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50대의 목사들조차도 자세한 얘기는 거의 모른다. 아니, 아예 관심 대상조차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식(歷史意識)의 결여(缺如)를 볼 수 있고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가 있는 것이다.



1951년에 6.25중 부산에서 장로교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배도한 목사들이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제명해 버렸다. 그리고 시무중인 예배당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요새 어느 토론장에 어떤 분이 “■나성한인교회 속보” 하고 올려놓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출옥성도중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저항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대부분의 성도들 약 4백명과 예배당을 내주고 나와 맨땅 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때 초량교회를 접수한 목사가 년전에 세상을 뜬 1958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한 노진현목사이다. 당시 초량교회에 남아서 예배당을 차지한 교인들 수는 구영기 목사, 양성봉장로 등 20명 정도이다.



위에서 구영기 목사는 예배당을 내주고 나온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스스로 말하기를, 인간취급을 못 받았고 경남지사로 이승만 박사의 총애를 받던 양성봉 장로는 훗날 60년대에 세상을 뜰 때 당시의 잘못을 회개(悔改)하고 한상동 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 탈취한 당시 장로교 총회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출옥성도는 내주고 나왔으나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교회는 그렇게 탈취가 용이하지 않았다. 피땀 흘려 세운 예배당을 쉽게 내주리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약신 목사(1952년 고려파 1대 총노회장, 이효재 교수 부친)등이 시무하던 교회 등은 탈취할 틈새가 없어서 탈취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총회측(당시에는 합동과 통합측이 나뉘기 전)에서는 법정에 소송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고소할 것을 금지하는 유명(有名)한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6 : 1-7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위 총회측의 “법정 고소”에 대하여 “응소”한 분이 1930년대 한국교회에서 주초문제 등 절제운동을 하기도 한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1897-1978)이다. 그래서 장장 10여년 세월에 걸쳐서 대법원에까지 올라가는 법정 공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1896-1980, 고신의 행정지도자, 속칭 ‘부곡사단’ 총수)

총회측에서 출옥성도측을 고소한 이유는



☆ 재산이 탐나고 또 교인 이탈을 막고자 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다음과 속셈이 있었다.



☆ 즉 “출옥성도라는 사람들이 뭘 세상 재산에 관심을 갖느냐?”는 식으로 망신을 주고자 하는 비열한 계산.



☆ 또 고소한 인간보다는 고소를 당하는 쪽이 시달린다는 것을 이용하고자 아는 속셈과



☆ 고려파 내부를 흔들어 놓고자 하는 교활한 착상.



아닌 게 아니라 우선 고려파 내부에서 논란이 심하게 일게 되었다. 즉 박윤선 교수가 응소를 극력 반대하여 송상석 목사와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윤선 교수(1905-1988, 평북 철산, 고신교장, 총신교장, 합신교장)

박윤선 교수는 앞서의 ‘고린도 전서 6장’을 들어 여기에 위배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하였고 이에 항거하는 송상석 목사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고소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응소한 것이다.



* 위 구절은 같은 형제간의 문제이다. 갈려져서 서로 “치리기관”이 다르니 총회측과 고려파측이 서로 잘못이 있을 때 내부적인 치리를 할 수 없으므로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10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의 항거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런데 1960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갈릴 때 합동측 목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과거 출옥성도들을 쫓아낸 것을 사과하고 하나가 되자 했을 때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한국 보수신앙의 위기였기 때문에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내세우고 합동하게 되었다. 이때 합동총회의 사회를 본 분이 바로 송상석 목사이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총회장을 한상동 목사가 연임했으니 처음 약속과 달리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나가므로 부득이 다시 분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상동 목사의 1962년 ‘복교선언’이다. 이때 경남노회 소속의 고신측 교회는 송상석 목사의 탁월한 행정력에 힘입어 거의 다 환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로 이북출신의 목사님들로서 고려파에 가담했던 분들은 환원하지 않고 합동측 교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주요한 분들은 나중에 1980년대에 합동측의 총회장을 역임한 세사람 김창인, 최훈, 김현중 목사(2001년 소천)등이다. 이 세사람은 모두 신학교는 1950년대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면 그 대법원까지 올라간 “예배당 양도 소송”의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1965년 판결은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응소한 처음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의 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응소항전이 계속 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로(출옥성도 지지측이 예배를 못 드리게 막거나 시간을 갈라서 예배를 보게된 일) 많은 교인들이 여러 교회를 만들어 나가거나 이웃 다른 교파의 교회로 옮기거나 하게 되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교인들 알박기 등 그래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숫자가 적으므로 예배당은 통합측에 내주고 교육관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응소에 반대하는 박윤선 교수는 고려파 탈퇴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3. 결언



위같은 이러한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난후 교회간에 분쟁이 있을 때 처리는 쉬워지게 되었다. 즉 송상석 목사의 소신이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나중에 심판하실 것인가?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의 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신자들은 앞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다면 어떡할 것인가?



* 고소를 한 총회측 목사들이 잘한 것인지?

* 응소한 송상석 목사도 잘 한 것인지?

*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가 잘 한 것인지?



한상동 목사가 잘했고 송상석 목사 박윤선 목사도 각각 잘 한 것인가?

대법원에까지 가서 예배당 탈취에 성공한 총회측 목사들이 “승리(勝利)의 기쁨”을 누렸으니 신나는 일인가?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목사의 처신은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바 있지만 ▼“사람이 패거리를 이루어 환장을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게시판에 들르는 여러분들은 각별히 이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 탈취하고 천당 안가기로 작정한 다음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회개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게 아닌 다음에야 기독신문 주필인 한명수 목사의 다음 말을 빌어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경직 목사님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63빌딩에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신사참배에 대해 자숙한다고 해서 상당히 그 자리가 엄숙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투옥되고 순교한 사람들 앞에 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멘~~~~~~~~~~~~~~▶









사진첨부 추악한 한국장로교회사

내일의 교훈



사진 & 추악한 한국장로교사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만석 간사--(맨 뒤 추가 설명)





●한국장로교의 추악한 역사를 밝힌다●



* 성경에 더러운 얘기는 감추고 기술이 안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다 모두 기술했지요. 그러한 추악한 얘기들을 왜 읽습니까? 후세에 교훈을 삼았지요! 과거에 눈감으면 현재에도 봉사가 됩니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오늘 바로잡지 아니하면 밝은 내일은 없습니다.



* 다른 교파들은 더 했으면 더해서 아예 바르게 살아보자는 분들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오해는 마십시오.



*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아직도 장로교 각교단들이 교단적으로 회개 선언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언한 것은 있습니다.(●부록1) 맨뒤에 붙입니다. 회개할 때까지 회개를 촉구하는 게 성경적이며 이제 사회가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때입니다.(●부록2) 건전한 상식부텀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RE;[질문]합동.통합.... : 아주 자세한 설명 1



* 계속 주요 내용을 추가 개정하고 있으니 참고 하실 분은 다운로드 해놓으시면 좋습니다. 성경공부 백번 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가치가 훨씬 더 있습니다.





맑은 새벽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곳의 글을 읽다가 보니 기독교에 '합동' , '통합'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장로교나 침례교와같은 교파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미국이나 외국에도 합동파, 통합파등이 있나요?



기독교에도 종류가 많은것 같아 헷갈리네요? 잘 알고 있는 분 계시면 간단한 설명 부탁합니다.



안녕히...



[ 김 형석 : ]





자세한 설명: 우선 쓴 것을 올리고 몇시간후 나머지 부분들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장로교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도적인 교파로 전개신교인의 70% 정도를 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242개 장로교 교단들이 있습니다.



해방전까지는 장로교파는 한 개였습니다. 미국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등 여러나라 장로교선교부에서 왔지만 협력하여 전도했기 때문에 교파는 하나였고 신학교도 1908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로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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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설립 (1901)된 장로회신학교는 이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사진은 1908년에 건축된 초기 교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장로교가 1938년도에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고 그 이후 예배당안의 강대상 전면에 일본 우상신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먼저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끔찍한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악질목사들의 주도로 일본중이 주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의식을 한강이나 혹은 추운겨울에 바다에 나가 완전 나체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감리교파나 성결교, 카토릭은 등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섰기 때문에 뭐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 것입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43.gif

(일본에 가선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가장 강력히 저항한 교파가 장로교파였는데 그 저항을 한 목사님은 약 천명 가까운 평양신학교 졸업생인 목사들중 겨우 20여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다수가 감옥에서 순교하고 일부가 살아서 해방후 출옥하였는데 이들을 “옥중성도”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 부릅니다. 약 20여 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전도사였던 분도 있고 여전도사도 몇분 있었습니다.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계신 분이 두어분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이분들을 이름을 아는 분이 0.01%나 제대로 될까요? 놀랍지요! 영양실조 기아로 여러분들이 줄줄이 순교하셨는데...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http://kcm.co.kr/korchur/chpic/1945.gif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 평양)

-위 쪽에 더 고화질로 나와 생략-



해방후 신사참배에 나섰던 목사들은 참으로 면목이 없게 되었는데 나치에 협력했던 도이치 기독교단에 소속되었던 독일의 목사들은 종전후 3년간 목회를 안하고 자숙을 하고 그동안 나치치하에서 지하교회로 있었던 고백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일제에 아부하려고 신사참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혹은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끔찍한 고문을 받게한 목사들이 속을 못차리고 교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고 또 많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지지하여 주었으니 문제였습니다. 요사이 김홍도 목사 사건 때 교계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김목사를 지지하는 걸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기득권 즉 밥그릇을 놓칠까 바 혈안이 되어 그러는 겁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안을 제출하고 단2개월간의 자숙기간을 갖자고 하였는데 이것조차도 거부하고 1951년 그 출옥성도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려신학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출옥성도들은 경남출신들이 많아 신학교도 부산에 있는데 고려신학대학이 그것입니다.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교수를 교장으로 하여 1947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고려파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후 그들이 시무중인 예배당을 소송을 걸어서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출옥성도들은 두말 않고 내주고 나왔습니다. 이 교회당을 피땀흘려 가꿔온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을 버리고 빈손으로 출옥성도들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에 분개하여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친일파목사들의 총회에서 소송을 걸어서 10년간에 걸쳐서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제치고 예배당을 탈취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항거한 분을 지지하는 성도가 대다수였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고로 제2문창교회, 동광교회등 새교회를 세워 나기도 하고 다른교회로 옮기거나 하여 예배당은 결국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고신측 송상석목사의 소신대로 “교회건물은 교인의 총유”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분쟁시 문제가 없습니다. 숫자적으로 우세한 측이 처음부터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식으로라면 맨처음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교회는 출옥성도를 따라서 그 교회를 나온 교인이 90%가 넘었으므로 그 예배당은 출옥성도측 교인들의 것인셈입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차대전후 결성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도 참여하고 노선이 불분명하고 불교 마호멧교와도 짬뽕을 하려고 논의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48년인가 장로교가 아직 하나일 때 몇몇 정치목사들이 가서 무조건 가입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국장로교는 WCC 소속이 된 겁니다. 여기에 옥중성도측은 처음부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에는 국회에서 감리교목사이자 독립투사인 국회의원 이규갑(1887-1970, 충무공 이순신 9대손, 사모인 이애라도 독립투사)외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WCC를 용공이라고 성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 것이 전선에서는 공산군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장로교대표들은 방콕에서 열리는 WCC 총회에 공산당들과 같이 참석했거든요. 그리고 6.25 때도 공산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지금도 살아 있는 모모 목사가 대표들로 나서는둥 수백명의 기독교 인사들이 YMCA회관인가에 모여서 소위 “인민군환영대회”를 “김일성 장군... 운운” 하며 열었습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반대한 장로교총회측에서 김재준이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쳐 그에 반대하는 학생들 수십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항의 했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1952년 자유주의자들이 분리되어 기독교장로회 즉 기장교단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합니다. 여기에는 우두머리들이 주로 자유주의적인 캐나다 선교부가 맡아 선교한 함경도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재준 강원룡 조향록 등...



그때 김재준의 자유신학에 51명의 학생이 항거하였는데 일제말 설립된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전학의 이유는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좌경화 되기 전에 유학을 다녀온 박형룡박사가 만주의 봉천신학원으로부터 귀국하여 고려신학교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34명의 학생들 주요한 인물은 지금도 교계원로로 활동하고 있는 정규오, 김준곤, 박창환, 신복윤 등등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안에서는 50년대에 NAE라는 보수적인 복음주의동지회측에서 세력이 매우 컷습니다.. 그당시 총회장은 명신홍(일제말 칼빈신학교유학, 나중 합동), 한경직(친일경력), 전필순(친일행각으로 반민특위에까지 체포된 자) 목사 등이 하고 있었습니다.



위 기장을 포함한 당시 총회측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회개를 하기보다는 1938년의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한 결의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즉 원인무효시켰는데... 그리고 신사참배를 안했다면 취소가 가능합니다. 다 신사참배 하고서 회개를 안하고 가결시킨 옛날 것만 취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여러번에 걸쳐서 취소하고 또 취소하고 그랬습니다. 장난도 아니고 이거...



그런데 신사참배 회개를 거부한 자들이 무슨 보수 자유를 따지는 게 의미가 별로 있었는지 서로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NAE 측의 우두머리가 지금 ‘합동’에서 나온 ‘개혁’의 정규오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고문이 박형룡박사입니다. 박박사(평북)는 1897년생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기 직전에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1920년대부터 신학교육을 시작한 당시 최고 교수였습니다.



이 박형룡박사가 1947년 중반 고려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있다가 외국선교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신학교의 위치가 부산인 점 그런 것 때문에 서울로 가버리고 서울에서 전학온 34명 학생 전원은 박형룡박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불과 두어달 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실한 거지요.



박형룡박사도 해방후, 평북, 전주 집회 등에서 수차에 걸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때마다 목사들이 들고 일어나 반발하고 집회강사를 못하도록까지 저항하는 고로 회개 보다는 후진양성에 주력하자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1978년경 세상 뜨실 때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님의 말대로 “회개를 우선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WCC를 찬성하는 우두머리가 한경직 목사(1902-2000, 평북, 숭전, 좌경무렵의 프린스턴졸)이고 WCC 즉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측의 우두머리는 박형룡박사였습니다. 이 두사람이 직접 치열하게 싸운 것은 아니고 그 아래사람들이 붙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1958년경 신학교부지를 구입하려는데 박박사가 외국선교부의 원조금 3,000만환을 박호근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날려버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WCC 찬성측에서는 “이때다!” 하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한편 정규오목사(해방후 신학교 1회 졸업생)를 우두머리로 한 NAE측에서는 자신들의 고문이자 스승인 박형룡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WCC 찬성측을 뒤늦게 용공으로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기노회에서 총회에 보낼 총대를 뽑는데 이때 NAE측 목사들이 총대로 많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만 WCC측 한명이 누락되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유리하게 뽑혔으므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발표하면 될 것인데 그냥 넘어가서 이게 나중에 싸움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싸움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WCC에 찬성하는 파들(통합)은 저들끼리 따로 모여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도 있었던 친일파 전필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선교부들의 원조 등 때문에 목사들이 많이 쏠렸을 거는 당연합니다. 당시엔 태반의 사람들에겐 미국이 천당 가는 거였으니깐요. 기독교 학교 등 재산 등은 통합으로 남았지요. 평신도들은 합동측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한편 위기에 몰린 NAE측 목사들은 박형룡박사와 자기들도 한패가 되어 내쫓은 출옥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총회에서 축출한 것을 사과하고 하나로 합칠 것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출옥성도측에서는 자신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고 예배당까지 탈취한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쉽게 화해 할 일은 아니지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데 거절하면 교만하다는 비난을 모면키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고 한편 위기에 몰린 한국보수신학을 살려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게 되었습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촐옥성도측 즉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얘기가 점점 흥미 진진하게 전개 되는데...



NAE측과 고려측이 합하는 과정, 다시 분리하는 과정, 그후 전개 되는 상황, 그리고 1979년부터 시작된 합동측이 수십개로 분리되는 과정을 기술하자면 도저히 한두번에 끝내기는 힘들고 앞으로도 여러번 나누어 계속해야 할 것같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그치고 내일부터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나중에 위의 것을 다시 보충 정리하고 맨나중에 최후로 정리하여 한번에 시리즈로 올리겠습니다. 다운로드하여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3.gif

(자유당선교위원회가 마련한 오찬에 참석한 교계지도자들(1960.2.18). 지금도 알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위 내용은 많은 교회사 책들을 참고로 하고 여기저기 오랜기간 읽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구두로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도 합했습니다. 자세히 쓴 교회사책이라도 한두권만 읽어서는 위같이 객관적 종합적으로 기술된 것을 찾기는 힘들것입니다.









위글을 가져오게 된 성경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이라는 게 물질입니까?)



에스겔 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현실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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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당하고도 말못하는 충격사연 심층취재**

사진첨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 당하고도 신고하는 율이 2% 정도밖에 안된다고 언론들에 보도된 바가 있다. 법정에 서는 것조차 수치스런 일이지만 그 재판 진행과정에서... 한국의 성폭행은 세계 1위라고 한다. 얼마나 썩은 나라인지 미국은 인구 10만명당 몸파는 여자가 23명인데 우리나라는 몸파는 여자가 무려 1백만명이 넘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몇 cm를... 몇분동안...” 하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 게 진행된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잡아 죽일 것같지만... 재판정에서서 호소하렵니까? 그렇게 “몇 cm를... 몇분동안...” 재판관에 호소하렵니까?



한국의 여성단체에 신고되는 여신도 성폭행 숫자는 엄청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단 1년만에 47건이 신고되었는데 실제 100배에 이르고... 교회의 특성상 모호하게 진행되는 점도 많고... 그런점을 감안하면 성가대원 50명 성폭행등 헤아릴수 없이 많이 여신도들이 교역자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근데 위와같이 당하고도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 모교수가 쓴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이란 책이 있다. 본문과 현장사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현재 한국교회 실정과 교단간 눈치보기 때문에 얼마나 솔직하게 쓰여있나 의심스러웠는데 예상보단 신랄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통합측과 한신대 즉 이른바 진보(내지는 자유)와 그 아류교단의 과거사를 상당부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먹사가 신사참배에 항거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들었고 어느 먹사가 주기철 목사의 노모 등 가족을 목사관에서 끌어내어 탈취했느냐는 등은 언급이 안되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못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이자들이 해방후 한국교회를 주름 잡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최고 지도자로 행세하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위 책의 점수를 매긴다면 한 70점이나 될까? 위 책에 비하여 성결교 소속의 이선교 목사님이 쓴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는 신랄하게 까발긴 점으로 보아 한 80점은 된다. 하기야 이선교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를 검찰청에 반란방조혐의로 고발하여 신문에 보도되고 한동안 그것 때문에 지하언론이 무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 두책이 최초라 할만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친일 친독재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부정 사기 협잡들을 노출시킨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예상보단 불과 몇 개월 사이에 4판까지 나온 것을 보아 그것도 반가운 일이고.





통합측이나 한신측 그리고 합동측에서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출옥성도 성자란자들이) 예배당 쟁탈전을 벌였다...” 즉 자세한 서술도 없이 무조건 소위 성자들이 세상 재산에 탐이 나서 혈안이 된 인간들이라고 하는식으로 매도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출옥성도측에서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 이 문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출옥성도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과 두말없이 피땀흘려 가꾼 교회를 내주고 나와 맨땅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배당을 내놓으라고 총회측(통합과 합동이 분리되기 전)에서 소송을 걸자 그걸 항거하는 성도들이 응소를 하여 장장 10년간에 걸쳐 대법원에까지 가서 판결이 난 것이다. 즉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이다. 그러면 위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은 교인들 90% 이상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니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이다.



사기꾼 먹사와 교회사가중 대부분인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즉 “하나님만이 누가 뭣이 옳은지 아신다”는 것이다. 미친넘들! 성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고 설교까지 하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알 것 아닌가? 일반계시인 양심으로도 판단 할 수가 있는 문제이고. 잘 몰랐다? 그럼 아래 태만의 죄에 해당한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리고 또하나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단순히 신사참배만 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친일하며 갖은 악행을 다하고 동족을 못살게 군 목사들에게 맞는 소리인가? 성경은 치리의 의무성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Y 신과대학 명예교수란 또라이 교회사가는 “그 말에는 반박못할 논리와 신학이 있다”고 하는데 그럼, 컨닝하다 걸린 신학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하고 반발한다면 어떡할 셈인가? 공적인 죄는 공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위에 대한 참고문은 다음 “몸버린시골처녀를” 클릭하며 자세한 것을 읽을 수 있다.



(3-2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자가 속한 교단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까지 체포된 바 있는 일경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추악한 악질 한국교회 지도자를 읽고 싶으면 아래 “치마를 벗고” 안에서 나오는 “최고악질”을 클릭하시면 자세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총회측(합동과 통합, 기장)이 출옥성도들을 독선주의자 분리주의자들로 매도하니 그것을 방어하기에 급급한데 과연 성경신학적으로 그게 옳은 태도인가? 자의적으로 분리했나 쫒겨남을 당한 것인가 하는 사실확인을 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론 아예 맞받어 쳐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실제 처음부터 그런 교단도 두 개나 있다.



아래를 “치마를 벗고” 클릭하면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3-1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왕따 당하는 게 두려웠던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말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하라”(잠 31:8)



당시 응소한 목사는 출옥성도는 아니고 해방후 출옥성도편에 선 1930년대에 한국교회에서 절제운동(주초문제)을 하던 송상석 목사(1897-1977)이다. 이분이 행정능력이 탁월하여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해방후 당시까지 만주봉천신학원에 머물던 한국보수신학계의 거성 박형룡박사(1897-1978)를 배를 전세내어 타고 만주에 가서 비밀리에 모셔온 분이다. 즉 오늘의 총신이 있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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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IP 192.241.172.x    작성일 2020년10월22일 12시19분      
1958년 장로교를 뒤흔든 3천만환 사건

사깃꾼 걸려 -신사참배 거부한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박형룡을 치리하려 들었는가?





3천만환 사건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4811

박형룡의 3000만환 사건을 다시 보다

WCC 논쟁 … 반세기 지나 되풀이 되는 갈등의 거울 삼아야




이범진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다루던지 긍정적으로 다루던 지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바’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은 -어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분열을 야기했다. 그러나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한 분열은 그의 믿는 바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었고, 최선의 방향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다는 데에서 그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믿음에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데에는 진정성이 보인다. ‘믿는 바’와 ‘행동’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유일한 ‘돌출’이 발견된다. 이른 바 3000만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의 ‘믿는 바’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룬다.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박형룡에게 있었던 3000만환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표현’과 ‘의미부여’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wcc 사건을 첨예하게 부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개인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다가 좌절한 단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살핌으로써,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는 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이른바 3000만환 사건

박형룡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이른바 3000만환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적인 평가를 하려는 이들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3』은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교장이던 박형룡은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다.(92쪽)



3000만환은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억원에 달한다.
한 학교의 교장이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3억 원을 ‘교섭비 명분’으로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은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58년 신학교 이사회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역사신학자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당시 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이신덕(1909-1994, 경성제대 법대)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박호근이었다. 박호근은 자신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기지 불하를 의뢰하고 총회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박교장의 결재를 받아 30,162,172환을 이사회의 승낙 없이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박호근이 사기를 친 것이었고, 그것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박용규는 3000만환 사건을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사기’를 친 박호근이라는 사람과, 그를 소개한 박래승과 이신덕의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순수함’은 이 사건에서 객체로 남고, ‘사기꾼’ 박호근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이 들었을 그 ‘말’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사회도 모르게, ‘3억원’을 지불하도록 결재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말이다.



이에 대해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는 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장로 직함을 가진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교장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부지 불하, 건축허가, 학교의 대학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였다.(364쪽)



‘허풍을 떨면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숭의학교 교장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1953년 4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은 그녀에게 ‘사기꾼’ 박호근은 실력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형룡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은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은’ 그는 박호근에게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명목으로 불과 두달 만에 3000만환을 지불했다. 오늘 날 3억에 달하는 이 돈이 두 달만에 사라졌다.



물론 결과는 대지 불하, 건축 허가, 대학 인가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호근은 그 돈을 접대비, 교섭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받았다. 그 당시에 그가 대지 불하 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었다. 사용목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방법은 분명 불법적인 경로였다.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김인서,『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23-25쪽)



결과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박호근 자신도 그가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 방식을 박형룡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기’를 진행하는 데에 돈을 지불한 그 자신도 공범이 되어야 맞다. 아니면 불법적 방법은 그렇다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니 ‘사기’라는 말인가?



그런데 박호근의 반응이 흥미롭다. 보통의 다른 사기꾼들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형룡 박사를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결국 김인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 나가 심문 당하고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으면, 이 문제를 3억원대 ‘사기’와 맞바꾸어야 했을까? 1만 달러는 우리가 본 ‘3000만환’에 포함된 돈으로 보인다(3000만환중에서, 미국에서 온 ‘1만불’(8,800,000환)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북장로교 측 3,000불(2,500,000환), 특별비(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 30,162,172환이었다).



미국에서 온 1만불의 불법적 환전을 지시(실행)할 정도로 박형룡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체가 된 이 사건이 밝혀지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배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앞서 박용규가 주장한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적확한 평가를 덮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변화를 가져온, 세속적 사건



이러한 사건 정황에 빗대어 봤을 때, 박형룡의 사표 수리가 이루어진 1958년 3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충격적이다. 사표 건에 대해서 이사 38명중 20명이 찬성을 하고, 17명이 반대를 한 것이다(1명 기권). 적어도 17명은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이 계속 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사회가 “그것이 고의가 아닌 사기”라는 점을 감안해 “교장사표는 반려하고 대신 불법 지출한 삼천만환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파동 주택(당시 시가 800만환)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했을 때 박형룡의 측근들은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태의 매각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실책을 범한 박형룡을 끌어안은 이유는, 그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을 밀어내려고 하는 세력은 결국 보수, 정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장로교의 자유, 진보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설득전을 펴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를 들고 나왔다.(<기독공보>, 1959.10.5) ‘세속적’ 문제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이를 두고 이영헌은 『한국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면서도 박형룡 박사의 인책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323쪽)



물론, 박용규는 이를 부정한다. 3천만원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측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갈등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박형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동민의 생각은 좀 다르다. 3천만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전의 박형룡은 wcc에 대해서 부드러운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온건한 반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사기를 당한’ 이후에는 급격히 강경해졌다며, 신신학과 단일교회의 두 가지가 쟁점이었는데 ‘용공주의’ 하나가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글(『현대신학비평』제12장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 1972)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3천만환 사건이 있기 전 1958년 3월에 썼던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통일에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교리 무관심주의로 인하여 결국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변해가며, 심지어 이교도까지도 허용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의 글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되는 성명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wcc의 용공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81쪽)



그의 신학적 변화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3천만환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세속적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한 신학’으로 향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wcc논쟁을 보다



사회학자 노치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세속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 분열 현상은 세속화의 추세와 밀접하다는 주장이다. 즉 세속화의 추세에 대한 수용과 저항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고 말이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도, wcc를 지지하는 측은 세속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측은 세속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노치준은 wcc운동이 세속화의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세속화에 대해서 피터버거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요약하면, 제도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인간 의식의 측면에서 이 영역들이 교회의 통제, 권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박형룡은 1976년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아들 박아론의 글이 총신대 학장과 교수진에 의하여 거절된 사실을 접하고 “총신대학의 좌경화의 뚜렷한 징조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세속화를 거부했던 박형룡은, 박호근이 추진했던 세속적인-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역으로 그의 ‘믿는 바’ 신학마저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신학의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갔던, 큰 신학자 박형룡의 생애에 돌출 된 부분으로 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wcc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신학적 영역에서 보기 보다는, 지역적, 역사적, 당파적 영역에서 보아야 그 첨예하고 해묵은 갈등이 바로 보일 것이다. 해법은 물론, 그 안에 있다.







http://reformednews.co.kr/921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총회신학교(박형룡 박사) 3천만환 재정 사고와 그를 이용한 음모

소재열 | 기사입력 2009/08/09 [12:58]



금년 2009년 9월에 소집될 제9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꼭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리폼드뉴스>는 기획연재 시리즈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왜, 무엇 때문에 분열했는지,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입장에서 연재한다. 본 연재는 소재열 목사가 집필하여 곧 출간하게 될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의 일부 내용을 요약해서 연재하게 된다(리폼드뉴스 편집부).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1) 사건을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합동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이용한 W.C.C.측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총회 안에서는 W.C.C.와 NAE라는 두 세력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대립의 씨앗이 발아 되어 갈등관계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갈등과 대립은 이미 1959년 제44회 분열 총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 3천만환 부정지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본다.2) 이러한 시각이 W.C.C.을 지지하는 통합측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W.C.C.의 신학적인 문제로 반대했던 합동측에서는 W.C.C. 운동과 그 신학을 은폐하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3)



이 같은 두 대립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논리이며 분열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확보하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책임을 논할 때에는 양측이 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분열이후 정통성이 자신들의 총회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설명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역사는 주관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그 시대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배경을 살펴서 과거 치열했던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 받게 될 것인지 추적하게 될 것이다.



통합측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으로 전개한다.4) 민경배 교수는 “분열의 기원이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 기금 유용에서 유래된 교장 사임과 관계가 있고 더욱이 에큐메니칼의 중상이라는 박형룡 일파의 소행에서 결국 왔다고 한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5)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에게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진현 목사의 말대로 역사를 그렇게 창작하면 안 된다.6)



조동진 박사는 ‘총회신학교 건축기금의 실체와 그 오용(誤用)에 관한 진상’에 있어서 그 헌금이 어떻게 박형룡 박사에게 전해졌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불법으로 지출했다는 신학교 건축기금 3천만 환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의 장로로 미국의 대 은행금용기업가가 개인적으로 친구로서 교장 박형룡에게 보낸 1만 달러 개인수표와 별도로 공식으로 보내진 10만 달러 중에서 지출한 것이었다. 제 십장로교회 장로의 이 특별헌금은 본래는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세속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불신하는 제 십장로교회의 미국 은행금융가의 거물 장로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통해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원하여 준비된 돈이었다.



1956년 “한국NAE” 총무였던 필자는 WEF 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헌금자는 자기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신학교 교육기금의 제1차 헌금액이 10만 달러였다. 필자는 이 신학기금이 한 교파의 신학교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보다는〈한국복음주의신학교 육재단〉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수령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재단기금으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수의 봉급 지원과 교수 양성 장학금과 건전한 신학 교재의 출판과 세계 수준의 신학도서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WEF 총무에게 보냈다.



그러나 WEF 국제총무의 견해는 달랐다. “이 돈이 장로교 장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신학교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인 박형룡 교장을 믿고 그에게 보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의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적극 만류하였지만 필자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헌금이 교장 박형룡을 통하여 총회신학교에 보내어진 것이다. 제 십장로교회는 끝까지 연합장로교회가 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는 탈퇴하여 지금은 70년대 후반부터 PCA 장로교회 총회에 속하여 있다.”7)



요약한다면, 그 특별헌금은 교장 박형룡의 총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지 그를 축출한 미국연합장로교회 산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장 박형룡이 남산에 있는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하여 3천만 환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지불한 것은 행정상 과오이기는 하지만 그 지불의 결과로 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 불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부터의 헌금이 선교부를 통하지 않고 교장 박형룡이 수령한 것부터 문제를 삼고자 했던 선교부로서는 그것을 교장 박형룡 축출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교장의 행정적 실수를 구실로 박형룡을 추방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는 새 교장을 세운 연합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책에 합치된 신학교로 개편하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박형룡 박사의 진술서를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 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같은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숭의학교의 기지 불하 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OOO불(환액 8,8OO,OOO 환), 북장로 선교부에서 5,OOO불(2,500,OOO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 산액 중 13,807,042환, 1958 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 사건을 추진 중 일부 이사는 격려로써 속히 추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계셨으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만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논하여 지출된 것이므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서 온 돈 10,OOO불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이므로 내 친구로부터 내게 보내 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 경상비에서 임시로 17,973,742환을 유용한 것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려고 생각하고 지불한 것인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8)



총회에 보고 된 이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박형룡 교장께서 교장직을 사임하셨음으로 이를 수리하였사오며”라고 기록하였고 “후임 교장이 선출된 때까지 교장 대리는 총회장으로 하되 이사장이 협동케 하였사오며”9)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박사 사표수리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바쳐 온 박형룡 박사의 사표가 이사회에 의하여 수리되었다. 이사회 전체 회의는 3월 10일 오후 3시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회되어 8일 오전 1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교장 사표수리는 7일 밤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다(밤 회의는 인톤 선교사 집에서 열림). 회의는 이사장 인톤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참석 이사는 42명 중 38명이고 가 부 투표에서 20:17 기권 1표로 수리되었다 한다.



동 회의에서 교장 사표수리에 대한 결정에서



① 1958년 3월 7일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대전제일교회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은 총 38표 중 가 20, 부 17, 기권 1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과장 박내승 씨도 역시 가 30, 부 7, 기권 1로사표가 수리되었다.



② 1958년 3월 8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장 인선위원 9인을 선임키로 하고 선교회 3인, 이사회 3인, 실행이사회 3인을 결정하기로 하고 후임 선정위원으로 선교사 대표 인톤 감부열 감의도 실행이사 대표 전필순(미참 경우에 노진현) 김윤찬, 김재석, 전체 이사 대표 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하였다.



③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박 박사가 계속 집무할 것



모 이사는 회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교장서리를 권세열 교감으로 추천하는 동의 제청이 있었으나, 총회 결의를 상기시키면서(초대 교장엔 선교사도 무방이나 2대 교장 이하는 한국인으로 할 것) 총회 결의가 번복되기 전에는 될 수 없다고 하여 선교사가 교장 사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한편 후임자 결정에는 전체 이사회의에서 2/3의 표를 획득하여야 하며 총회(금년 총회는 금년 9월에 회집 됨)에서 인준을 받아야 정식으로 교장으로 취임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취임은 일러도 10월 초순에야 가능.

한편 사무처장 박래승 목사의 후임은 4월 11일에 회집할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 하며, 총회 인준 여부에는 관계가 없다 한다.10)



제43회 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교장직 사표를 내고 명예교수로 있도록 하면서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 후 신학교에서 물러나서 쉬었고 그가 가르치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천만 환 사건은 수습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43회 총회는 신학교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조직케 하였다. 이를 위해 1959년 1월 20일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새로 조직되는 이사회가 모였다.11) 안광국 목사는 NCC측 인사로서 그가 집필한 「장로회신학대학 70년사」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NAE측은 신학교 3천만환 사건을 무마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재임케 하기 위하여 실행이사를 유리하게 선임코자 했다. 저희들의 비밀히 추천한 실행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환수, 정선득, 양화석, 송암석, 나기환, 노진현, 정일영, 황병혁, 김수영, 전제영, 김윤찬, 황득환, 김치선 등이었고 이사장으로 보이열 목사를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당선된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 안두화, 부 : 김석진

서기 : 안광국, 회계 : 위두찬

실행이사 : 안두화, 김석진, 권세열, 양화석, 보이열, 김재철, 노진현, 계창봉, 이환수, 김재석, 위두찬, 김윤식, 안광국, 황병혁



이상 14인 중 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외에는 다 탈락이 되고 말았음으로 이사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고, 저희는 박형룡 박사의 구명운동이 실패함을 느꼈다.”



이렇게 역전 되기까지 NCC측의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 지휘한 결과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하였다.12)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 사표수리는 총 투표수 38표 중 가 20표, 부 17표, 기권 1표의 근소한 차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처장 박내성의 사표는 압도적인 가표로 가결되었고,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기 전에 신학교 이사회는 회합을 갖고 후임 교장을 선출키 위하여 투표에 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명되었다.



교장 지명투표 - 게일승 19표, 명신홍 17표, 기권 2표

교장 선거투표 - 계승일 가 18표 부 19표 기권 1표



교장 선임에 실패한 이사회는 다시 인선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안두화, 김석진, 노진현, 권연호, 김재석, 안광국, 김윤찬. 그러나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시비로 인하여 비상정회가 되자 교장선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이것이 분열 전의 마지막 이사회였다.13)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으로 처음에 준비한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였다.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지도 과정에서 본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논문을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이 더 권위있는 논문이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지도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장로교회 분열사>가 탄생되었다. 본 논문은 공적 문서를 기준으로 신국판 500여 페이지로 준비된 논문이다. 곧 출판된다.









치마를 벗고 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오늘의 사태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이 되어야 한다...



[7/7] 눈팅1 IP 121.254.16.x 작성일 2009년1월11일 09시49분

제가 써프에 자주 들어와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님의 글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자료 첨가해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그 노고와 정성에 감사드리며....



귀하가 서프라이즈에 올리는 기독교 신사참배 문제와 여러 목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서프에서 귀하가 올린 글만 수십차례(우연히 클릭)해서 읽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님이 이상한 글을 올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정독한 결과 내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나는 교인인데 평소에 교회의 죄악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고 신사참배 건도 문제가 있는 것만 피상적으로 알았지, 귀하가 올린 내용처럼 그렇게 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 백정짓이 해방 후에 자행됐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노하였습니다.



나는 귀하의 글 애독자가 되었는데 서프에 들어와서 귀하의 글을 어떻게 찾냐면 자극적인(?) 제목을 우연히 클릭하면 귀하의 반가운 글이 있고, 예전에는 귀하가 ★▶ 이런 찐한 별표, 화살표 문양을 제목에 넣어서 제가 얼른 알아차리고 클릭해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서프에 와서도 시간을 많이 쓸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글이나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귀하의 글을 찾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부디 귀하의 글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직 귀하가 링크한 파일은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클릭해서 다운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내 조심성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어떤 경건한 개혁목사이자 신학자는 당시의 썩어빠진 사이비 목사들을 향해 "잡종 성직자" "우상의 목자" "바벨을 사랑하는 자"라고 격하게 비판하였더군요. 나는 이 말이 오늘의 많은 사이비 목사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진실하게 믿어보고 이웃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부족한 저에게는 한국교회의 과거 어두운 역사와 현재 많은 목사들의 더러운 행태를 알려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그럼...





출옥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신사참배 찬성파들이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면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예측 대비할 수 있고, 잘못된 미래를 막기 위한 예방 효과를 갖는다. -김두식 교수





아래가 어느 분이 여러해전 "성경 다음으로 보관 하겠습니다!!"라고 댓글을 올린 글



치마를 벗고◆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수치의 순간



◆강조점들을 컬러처리하여 기억하기에 좋게 만들었사오니 저장해 두시어 여기저기 게시판들에 푸기 등 많은 이용바랍니다. 서문은 맨뒤로 옮겼습니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숫처녀가★갈보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났습메

한국교회는 이 공적인 불경건 죄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교단적으로 회개를 한적이 없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교 총회가 일본 우상에 절하는 것에 찬성을 가결하였는데 여기에 맹렬히 반대한 소수의 목사님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평양의 주기철 목사(1897-1944, 경남)는 양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남출신인 한상동 목사(1901-1976)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이고 다녔다



한상동 목사(평신, 고려파 총수, 고신대학장)

그리고 만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메이쳔파 선교사인 한부선 선교사(1903-1992년, 나중 고려파에 가담)가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2차대전 발발후 귀국보다는 감옥행을 택하였다가 나중 포로교환 때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지도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옥중 교인들의 특별기도회의 결과 1946년 9월 20일 개교했다. 고려학교를 설립한 후 앞줄 왼쪽부터 한부선, 주남선, 박윤선, 한상동. ⓒKPM



이러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닌 목사, 전도사들의 숫자는 많지는 않다. 현재 충현교회 원로 목사인 김창인 목사의 경우는 반대하다가 만주로 도망을 가서 신앙적인 정조는 지킨 셈이다. 신학교는 1950년대 말에 가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고 있는 바는 목사는 당연히 이러한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에스겔 3 :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에스겔 3 :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일본우상에 절하는 것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순교자의 수는 약 50명이고 고문과 옥중기아와 추위(영하 40도)를 견디어내고 출옥한 성도들의 숫자는 20여명이다. 그래서 이들을 “옥중성도(獄中聖徒)”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고 부른다.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출옥성도들, 유명한 사진인데 구하기 힘든 고화질 저장바람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다.)



해방이 되자 일본우상에 절한 목사들은 면목을 잃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옥중성도들은 배도한 한국교회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2천명 정도 되는 장로교 목사들은 자신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이에 대하여 반발하고 저항을 하게 되었다. 출옥성도들이 제출한 회개법안이란 것은 단 2개월의 자숙기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반발 한 것이다. 만주로부터 귀국한 평신교수였던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졸업, 평신, 고신초대교장, 총신 교수 역임)가 수양회 도중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자 다음날부터 강사자격을 박탈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평신교수, 고신교장, 총신교수)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습격되어 구타 고문 당한 후 해산된 것같은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벌어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3년동안 목회를 못하고 그 동안에 지하에 있던 목사들이 교회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아마도 99.9%가 넘는 양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편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50대의 목사들조차도 자세한 얘기는 거의 모른다. 아니, 아예 관심 대상조차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식(歷史意識)의 결여(缺如)를 볼 수 있고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가 있는 것이다.



1951년에 6.25중 부산에서 장로교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배도한 목사들이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제명해 버렸다. 그리고 시무중인 예배당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요새 어느 토론장에 어떤 분이 “■나성한인교회 속보” 하고 올려놓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출옥성도중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저항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대부분의 성도들 약 4백명과 예배당을 내주고 나와 맨땅 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때 초량교회를 접수한 목사가 년전에 세상을 뜬 1958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한 노진현목사이다. 당시 초량교회에 남아서 예배당을 차지한 교인들 수는 구영기 목사, 양성봉장로 등 20명 정도이다.



위에서 구영기 목사는 예배당을 내주고 나온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스스로 말하기를, 인간취급을 못 받았고 경남지사로 이승만 박사의 총애를 받던 양성봉 장로는 훗날 60년대에 세상을 뜰 때 당시의 잘못을 회개(悔改)하고 한상동 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 탈취한 당시 장로교 총회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출옥성도는 내주고 나왔으나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교회는 그렇게 탈취가 용이하지 않았다. 피땀 흘려 세운 예배당을 쉽게 내주리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약신 목사(1952년 고려파 1대 총노회장, 이효재 교수 부친)등이 시무하던 교회 등은 탈취할 틈새가 없어서 탈취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총회측(당시에는 합동과 통합측이 나뉘기 전)에서는 법정에 소송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고소할 것을 금지하는 유명(有名)한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6 : 1-7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위 총회측의 “법정 고소”에 대하여 “응소”한 분이 1930년대 한국교회에서 주초문제 등 절제운동을 하기도 한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1897-1978)이다. 그래서 장장 10여년 세월에 걸쳐서 대법원에까지 올라가는 법정 공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1896-1980, 고신의 행정지도자, 속칭 ‘부곡사단’ 총수)

총회측에서 출옥성도측을 고소한 이유는



☆ 재산이 탐나고 또 교인 이탈을 막고자 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다음과 속셈이 있었다.



☆ 즉 “출옥성도라는 사람들이 뭘 세상 재산에 관심을 갖느냐?”는 식으로 망신을 주고자 하는 비열한 계산.



☆ 또 고소한 인간보다는 고소를 당하는 쪽이 시달린다는 것을 이용하고자 아는 속셈과



☆ 고려파 내부를 흔들어 놓고자 하는 교활한 착상.



아닌 게 아니라 우선 고려파 내부에서 논란이 심하게 일게 되었다. 즉 박윤선 교수가 응소를 극력 반대하여 송상석 목사와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윤선 교수(1905-1988, 평북 철산, 고신교장, 총신교장, 합신교장)

박윤선 교수는 앞서의 ‘고린도 전서 6장’을 들어 여기에 위배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하였고 이에 항거하는 송상석 목사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고소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응소한 것이다.



* 위 구절은 같은 형제간의 문제이다. 갈려져서 서로 “치리기관”이 다르니 총회측과 고려파측이 서로 잘못이 있을 때 내부적인 치리를 할 수 없으므로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10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의 항거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런데 1960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갈릴 때 합동측 목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과거 출옥성도들을 쫓아낸 것을 사과하고 하나가 되자 했을 때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한국 보수신앙의 위기였기 때문에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내세우고 합동하게 되었다. 이때 합동총회의 사회를 본 분이 바로 송상석 목사이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총회장을 한상동 목사가 연임했으니 처음 약속과 달리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나가므로 부득이 다시 분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상동 목사의 1962년 ‘복교선언’이다. 이때 경남노회 소속의 고신측 교회는 송상석 목사의 탁월한 행정력에 힘입어 거의 다 환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로 이북출신의 목사님들로서 고려파에 가담했던 분들은 환원하지 않고 합동측 교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주요한 분들은 나중에 1980년대에 합동측의 총회장을 역임한 세사람 김창인, 최훈, 김현중 목사(2001년 소천)등이다. 이 세사람은 모두 신학교는 1950년대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면 그 대법원까지 올라간 “예배당 양도 소송”의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1965년 판결은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응소한 처음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의 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응소항전이 계속 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로(출옥성도 지지측이 예배를 못 드리게 막거나 시간을 갈라서 예배를 보게된 일) 많은 교인들이 여러 교회를 만들어 나가거나 이웃 다른 교파의 교회로 옮기거나 하게 되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교인들 알박기 등 그래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숫자가 적으므로 예배당은 통합측에 내주고 교육관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응소에 반대하는 박윤선 교수는 고려파 탈퇴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3. 결언



위같은 이러한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난후 교회간에 분쟁이 있을 때 처리는 쉬워지게 되었다. 즉 송상석 목사의 소신이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나중에 심판하실 것인가?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의 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신자들은 앞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다면 어떡할 것인가?



* 고소를 한 총회측 목사들이 잘한 것인지?

* 응소한 송상석 목사도 잘 한 것인지?

*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가 잘 한 것인지?



한상동 목사가 잘했고 송상석 목사 박윤선 목사도 각각 잘 한 것인가?

대법원에까지 가서 예배당 탈취에 성공한 총회측 목사들이 “승리(勝利)의 기쁨”을 누렸으니 신나는 일인가?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목사의 처신은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바 있지만 ▼“사람이 패거리를 이루어 환장을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게시판에 들르는 여러분들은 각별히 이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 탈취하고 천당 안가기로 작정한 다음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회개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게 아닌 다음에야 기독신문 주필인 한명수 목사의 다음 말을 빌어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경직 목사님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63빌딩에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신사참배에 대해 자숙한다고 해서 상당히 그 자리가 엄숙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투옥되고 순교한 사람들 앞에 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멘~~~~~~~~~~~~~~▶









사진첨부 추악한 한국장로교회사

내일의 교훈



사진 & 추악한 한국장로교사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만석 간사--(맨 뒤 추가 설명)





●한국장로교의 추악한 역사를 밝힌다●



* 성경에 더러운 얘기는 감추고 기술이 안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다 모두 기술했지요. 그러한 추악한 얘기들을 왜 읽습니까? 후세에 교훈을 삼았지요! 과거에 눈감으면 현재에도 봉사가 됩니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오늘 바로잡지 아니하면 밝은 내일은 없습니다.



* 다른 교파들은 더 했으면 더해서 아예 바르게 살아보자는 분들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오해는 마십시오.



*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아직도 장로교 각교단들이 교단적으로 회개 선언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언한 것은 있습니다.(●부록1) 맨뒤에 붙입니다. 회개할 때까지 회개를 촉구하는 게 성경적이며 이제 사회가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때입니다.(●부록2) 건전한 상식부텀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RE;[질문]합동.통합.... : 아주 자세한 설명 1



* 계속 주요 내용을 추가 개정하고 있으니 참고 하실 분은 다운로드 해놓으시면 좋습니다. 성경공부 백번 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가치가 훨씬 더 있습니다.





맑은 새벽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곳의 글을 읽다가 보니 기독교에 '합동' , '통합'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장로교나 침례교와같은 교파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미국이나 외국에도 합동파, 통합파등이 있나요?



기독교에도 종류가 많은것 같아 헷갈리네요? 잘 알고 있는 분 계시면 간단한 설명 부탁합니다.



안녕히...



[ 김 형석 : ]





자세한 설명: 우선 쓴 것을 올리고 몇시간후 나머지 부분들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장로교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도적인 교파로 전개신교인의 70% 정도를 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242개 장로교 교단들이 있습니다.



해방전까지는 장로교파는 한 개였습니다. 미국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등 여러나라 장로교선교부에서 왔지만 협력하여 전도했기 때문에 교파는 하나였고 신학교도 1908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로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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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설립 (1901)된 장로회신학교는 이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사진은 1908년에 건축된 초기 교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장로교가 1938년도에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고 그 이후 예배당안의 강대상 전면에 일본 우상신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먼저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끔찍한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악질목사들의 주도로 일본중이 주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의식을 한강이나 혹은 추운겨울에 바다에 나가 완전 나체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감리교파나 성결교, 카토릭은 등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섰기 때문에 뭐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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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선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가장 강력히 저항한 교파가 장로교파였는데 그 저항을 한 목사님은 약 천명 가까운 평양신학교 졸업생인 목사들중 겨우 20여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다수가 감옥에서 순교하고 일부가 살아서 해방후 출옥하였는데 이들을 “옥중성도”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 부릅니다. 약 20여 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전도사였던 분도 있고 여전도사도 몇분 있었습니다.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계신 분이 두어분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이분들을 이름을 아는 분이 0.01%나 제대로 될까요? 놀랍지요! 영양실조 기아로 여러분들이 줄줄이 순교하셨는데...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http://kcm.co.kr/korchur/chpic/1945.gif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 평양)

-위 쪽에 더 고화질로 나와 생략-



해방후 신사참배에 나섰던 목사들은 참으로 면목이 없게 되었는데 나치에 협력했던 도이치 기독교단에 소속되었던 독일의 목사들은 종전후 3년간 목회를 안하고 자숙을 하고 그동안 나치치하에서 지하교회로 있었던 고백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일제에 아부하려고 신사참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혹은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끔찍한 고문을 받게한 목사들이 속을 못차리고 교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고 또 많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지지하여 주었으니 문제였습니다. 요사이 김홍도 목사 사건 때 교계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김목사를 지지하는 걸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기득권 즉 밥그릇을 놓칠까 바 혈안이 되어 그러는 겁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안을 제출하고 단2개월간의 자숙기간을 갖자고 하였는데 이것조차도 거부하고 1951년 그 출옥성도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려신학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출옥성도들은 경남출신들이 많아 신학교도 부산에 있는데 고려신학대학이 그것입니다.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교수를 교장으로 하여 1947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고려파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후 그들이 시무중인 예배당을 소송을 걸어서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출옥성도들은 두말 않고 내주고 나왔습니다. 이 교회당을 피땀흘려 가꿔온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을 버리고 빈손으로 출옥성도들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에 분개하여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친일파목사들의 총회에서 소송을 걸어서 10년간에 걸쳐서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제치고 예배당을 탈취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항거한 분을 지지하는 성도가 대다수였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고로 제2문창교회, 동광교회등 새교회를 세워 나기도 하고 다른교회로 옮기거나 하여 예배당은 결국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고신측 송상석목사의 소신대로 “교회건물은 교인의 총유”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분쟁시 문제가 없습니다. 숫자적으로 우세한 측이 처음부터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식으로라면 맨처음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교회는 출옥성도를 따라서 그 교회를 나온 교인이 90%가 넘었으므로 그 예배당은 출옥성도측 교인들의 것인셈입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차대전후 결성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도 참여하고 노선이 불분명하고 불교 마호멧교와도 짬뽕을 하려고 논의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48년인가 장로교가 아직 하나일 때 몇몇 정치목사들이 가서 무조건 가입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국장로교는 WCC 소속이 된 겁니다. 여기에 옥중성도측은 처음부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에는 국회에서 감리교목사이자 독립투사인 국회의원 이규갑(1887-1970, 충무공 이순신 9대손, 사모인 이애라도 독립투사)외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WCC를 용공이라고 성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 것이 전선에서는 공산군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장로교대표들은 방콕에서 열리는 WCC 총회에 공산당들과 같이 참석했거든요. 그리고 6.25 때도 공산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지금도 살아 있는 모모 목사가 대표들로 나서는둥 수백명의 기독교 인사들이 YMCA회관인가에 모여서 소위 “인민군환영대회”를 “김일성 장군... 운운” 하며 열었습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반대한 장로교총회측에서 김재준이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쳐 그에 반대하는 학생들 수십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항의 했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1952년 자유주의자들이 분리되어 기독교장로회 즉 기장교단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합니다. 여기에는 우두머리들이 주로 자유주의적인 캐나다 선교부가 맡아 선교한 함경도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재준 강원룡 조향록 등...



그때 김재준의 자유신학에 51명의 학생이 항거하였는데 일제말 설립된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전학의 이유는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좌경화 되기 전에 유학을 다녀온 박형룡박사가 만주의 봉천신학원으로부터 귀국하여 고려신학교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34명의 학생들 주요한 인물은 지금도 교계원로로 활동하고 있는 정규오, 김준곤, 박창환, 신복윤 등등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안에서는 50년대에 NAE라는 보수적인 복음주의동지회측에서 세력이 매우 컷습니다.. 그당시 총회장은 명신홍(일제말 칼빈신학교유학, 나중 합동), 한경직(친일경력), 전필순(친일행각으로 반민특위에까지 체포된 자) 목사 등이 하고 있었습니다.



위 기장을 포함한 당시 총회측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회개를 하기보다는 1938년의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한 결의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즉 원인무효시켰는데... 그리고 신사참배를 안했다면 취소가 가능합니다. 다 신사참배 하고서 회개를 안하고 가결시킨 옛날 것만 취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여러번에 걸쳐서 취소하고 또 취소하고 그랬습니다. 장난도 아니고 이거...



그런데 신사참배 회개를 거부한 자들이 무슨 보수 자유를 따지는 게 의미가 별로 있었는지 서로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NAE 측의 우두머리가 지금 ‘합동’에서 나온 ‘개혁’의 정규오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고문이 박형룡박사입니다. 박박사(평북)는 1897년생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기 직전에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1920년대부터 신학교육을 시작한 당시 최고 교수였습니다.



이 박형룡박사가 1947년 중반 고려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있다가 외국선교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신학교의 위치가 부산인 점 그런 것 때문에 서울로 가버리고 서울에서 전학온 34명 학생 전원은 박형룡박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불과 두어달 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실한 거지요.



박형룡박사도 해방후, 평북, 전주 집회 등에서 수차에 걸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때마다 목사들이 들고 일어나 반발하고 집회강사를 못하도록까지 저항하는 고로 회개 보다는 후진양성에 주력하자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1978년경 세상 뜨실 때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님의 말대로 “회개를 우선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WCC를 찬성하는 우두머리가 한경직 목사(1902-2000, 평북, 숭전, 좌경무렵의 프린스턴졸)이고 WCC 즉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측의 우두머리는 박형룡박사였습니다. 이 두사람이 직접 치열하게 싸운 것은 아니고 그 아래사람들이 붙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1958년경 신학교부지를 구입하려는데 박박사가 외국선교부의 원조금 3,000만환을 박호근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날려버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WCC 찬성측에서는 “이때다!” 하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한편 정규오목사(해방후 신학교 1회 졸업생)를 우두머리로 한 NAE측에서는 자신들의 고문이자 스승인 박형룡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WCC 찬성측을 뒤늦게 용공으로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기노회에서 총회에 보낼 총대를 뽑는데 이때 NAE측 목사들이 총대로 많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만 WCC측 한명이 누락되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유리하게 뽑혔으므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발표하면 될 것인데 그냥 넘어가서 이게 나중에 싸움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싸움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WCC에 찬성하는 파들(통합)은 저들끼리 따로 모여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도 있었던 친일파 전필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선교부들의 원조 등 때문에 목사들이 많이 쏠렸을 거는 당연합니다. 당시엔 태반의 사람들에겐 미국이 천당 가는 거였으니깐요. 기독교 학교 등 재산 등은 통합으로 남았지요. 평신도들은 합동측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한편 위기에 몰린 NAE측 목사들은 박형룡박사와 자기들도 한패가 되어 내쫓은 출옥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총회에서 축출한 것을 사과하고 하나로 합칠 것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출옥성도측에서는 자신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고 예배당까지 탈취한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쉽게 화해 할 일은 아니지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데 거절하면 교만하다는 비난을 모면키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고 한편 위기에 몰린 한국보수신학을 살려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게 되었습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촐옥성도측 즉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얘기가 점점 흥미 진진하게 전개 되는데...



NAE측과 고려측이 합하는 과정, 다시 분리하는 과정, 그후 전개 되는 상황, 그리고 1979년부터 시작된 합동측이 수십개로 분리되는 과정을 기술하자면 도저히 한두번에 끝내기는 힘들고 앞으로도 여러번 나누어 계속해야 할 것같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그치고 내일부터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나중에 위의 것을 다시 보충 정리하고 맨나중에 최후로 정리하여 한번에 시리즈로 올리겠습니다. 다운로드하여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3.gif

(자유당선교위원회가 마련한 오찬에 참석한 교계지도자들(1960.2.18). 지금도 알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위 내용은 많은 교회사 책들을 참고로 하고 여기저기 오랜기간 읽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구두로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도 합했습니다. 자세히 쓴 교회사책이라도 한두권만 읽어서는 위같이 객관적 종합적으로 기술된 것을 찾기는 힘들것입니다.









위글을 가져오게 된 성경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이라는 게 물질입니까?)



에스겔 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현실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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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당하고도 말못하는 충격사연 심층취재**

사진첨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 당하고도 신고하는 율이 2% 정도밖에 안된다고 언론들에 보도된 바가 있다. 법정에 서는 것조차 수치스런 일이지만 그 재판 진행과정에서... 한국의 성폭행은 세계 1위라고 한다. 얼마나 썩은 나라인지 미국은 인구 10만명당 몸파는 여자가 23명인데 우리나라는 몸파는 여자가 무려 1백만명이 넘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몇 cm를... 몇분동안...” 하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 게 진행된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잡아 죽일 것같지만... 재판정에서서 호소하렵니까? 그렇게 “몇 cm를... 몇분동안...” 재판관에 호소하렵니까?



한국의 여성단체에 신고되는 여신도 성폭행 숫자는 엄청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단 1년만에 47건이 신고되었는데 실제 100배에 이르고... 교회의 특성상 모호하게 진행되는 점도 많고... 그런점을 감안하면 성가대원 50명 성폭행등 헤아릴수 없이 많이 여신도들이 교역자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근데 위와같이 당하고도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 모교수가 쓴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이란 책이 있다. 본문과 현장사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현재 한국교회 실정과 교단간 눈치보기 때문에 얼마나 솔직하게 쓰여있나 의심스러웠는데 예상보단 신랄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통합측과 한신대 즉 이른바 진보(내지는 자유)와 그 아류교단의 과거사를 상당부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먹사가 신사참배에 항거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들었고 어느 먹사가 주기철 목사의 노모 등 가족을 목사관에서 끌어내어 탈취했느냐는 등은 언급이 안되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못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이자들이 해방후 한국교회를 주름 잡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최고 지도자로 행세하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위 책의 점수를 매긴다면 한 70점이나 될까? 위 책에 비하여 성결교 소속의 이선교 목사님이 쓴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는 신랄하게 까발긴 점으로 보아 한 80점은 된다. 하기야 이선교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를 검찰청에 반란방조혐의로 고발하여 신문에 보도되고 한동안 그것 때문에 지하언론이 무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 두책이 최초라 할만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친일 친독재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부정 사기 협잡들을 노출시킨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예상보단 불과 몇 개월 사이에 4판까지 나온 것을 보아 그것도 반가운 일이고.





통합측이나 한신측 그리고 합동측에서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출옥성도 성자란자들이) 예배당 쟁탈전을 벌였다...” 즉 자세한 서술도 없이 무조건 소위 성자들이 세상 재산에 탐이 나서 혈안이 된 인간들이라고 하는식으로 매도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출옥성도측에서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 이 문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출옥성도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과 두말없이 피땀흘려 가꾼 교회를 내주고 나와 맨땅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배당을 내놓으라고 총회측(통합과 합동이 분리되기 전)에서 소송을 걸자 그걸 항거하는 성도들이 응소를 하여 장장 10년간에 걸쳐 대법원에까지 가서 판결이 난 것이다. 즉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이다. 그러면 위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은 교인들 90% 이상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니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이다.



사기꾼 먹사와 교회사가중 대부분인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즉 “하나님만이 누가 뭣이 옳은지 아신다”는 것이다. 미친넘들! 성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고 설교까지 하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알 것 아닌가? 일반계시인 양심으로도 판단 할 수가 있는 문제이고. 잘 몰랐다? 그럼 아래 태만의 죄에 해당한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리고 또하나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단순히 신사참배만 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친일하며 갖은 악행을 다하고 동족을 못살게 군 목사들에게 맞는 소리인가? 성경은 치리의 의무성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Y 신과대학 명예교수란 또라이 교회사가는 “그 말에는 반박못할 논리와 신학이 있다”고 하는데 그럼, 컨닝하다 걸린 신학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하고 반발한다면 어떡할 셈인가? 공적인 죄는 공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위에 대한 참고문은 다음 “몸버린시골처녀를” 클릭하며 자세한 것을 읽을 수 있다.



(3-2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자가 속한 교단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까지 체포된 바 있는 일경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추악한 악질 한국교회 지도자를 읽고 싶으면 아래 “치마를 벗고” 안에서 나오는 “최고악질”을 클릭하시면 자세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총회측(합동과 통합, 기장)이 출옥성도들을 독선주의자 분리주의자들로 매도하니 그것을 방어하기에 급급한데 과연 성경신학적으로 그게 옳은 태도인가? 자의적으로 분리했나 쫒겨남을 당한 것인가 하는 사실확인을 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론 아예 맞받어 쳐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실제 처음부터 그런 교단도 두 개나 있다.



아래를 “치마를 벗고” 클릭하면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3-1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왕따 당하는 게 두려웠던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말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하라”(잠 31:8)



당시 응소한 목사는 출옥성도는 아니고 해방후 출옥성도편에 선 1930년대에 한국교회에서 절제운동(주초문제)을 하던 송상석 목사(1897-1977)이다. 이분이 행정능력이 탁월하여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해방후 당시까지 만주봉천신학원에 머물던 한국보수신학계의 거성 박형룡박사(1897-1978)를 배를 전세내어 타고 만주에 가서 비밀리에 모셔온 분이다. 즉 오늘의 총신이 있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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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IP 192.241.172.x    작성일 2020년10월22일 12시20분      
1958년 장로교를 뒤흔든 3천만환 사건

사깃꾼 걸려 -신사참배 거부한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박형룡을 치리하려 들었는가?





3천만환 사건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4811

박형룡의 3000만환 사건을 다시 보다

WCC 논쟁 … 반세기 지나 되풀이 되는 갈등의 거울 삼아야




이범진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다루던지 긍정적으로 다루던 지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바’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은 -어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분열을 야기했다. 그러나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한 분열은 그의 믿는 바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었고, 최선의 방향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다는 데에서 그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믿음에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데에는 진정성이 보인다. ‘믿는 바’와 ‘행동’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유일한 ‘돌출’이 발견된다. 이른 바 3000만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의 ‘믿는 바’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룬다.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박형룡에게 있었던 3000만환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표현’과 ‘의미부여’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wcc 사건을 첨예하게 부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개인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다가 좌절한 단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살핌으로써,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는 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이른바 3000만환 사건

박형룡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이른바 3000만환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적인 평가를 하려는 이들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3』은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교장이던 박형룡은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다.(92쪽)



3000만환은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억원에 달한다.
한 학교의 교장이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3억 원을 ‘교섭비 명분’으로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은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58년 신학교 이사회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역사신학자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당시 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이신덕(1909-1994, 경성제대 법대)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박호근이었다. 박호근은 자신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기지 불하를 의뢰하고 총회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박교장의 결재를 받아 30,162,172환을 이사회의 승낙 없이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박호근이 사기를 친 것이었고, 그것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박용규는 3000만환 사건을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사기’를 친 박호근이라는 사람과, 그를 소개한 박래승과 이신덕의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순수함’은 이 사건에서 객체로 남고, ‘사기꾼’ 박호근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이 들었을 그 ‘말’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사회도 모르게, ‘3억원’을 지불하도록 결재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말이다.



이에 대해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는 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장로 직함을 가진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교장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부지 불하, 건축허가, 학교의 대학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였다.(364쪽)



‘허풍을 떨면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숭의학교 교장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1953년 4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은 그녀에게 ‘사기꾼’ 박호근은 실력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형룡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은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은’ 그는 박호근에게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명목으로 불과 두달 만에 3000만환을 지불했다. 오늘 날 3억에 달하는 이 돈이 두 달만에 사라졌다.



물론 결과는 대지 불하, 건축 허가, 대학 인가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호근은 그 돈을 접대비, 교섭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받았다. 그 당시에 그가 대지 불하 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었다. 사용목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방법은 분명 불법적인 경로였다.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김인서,『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23-25쪽)



결과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박호근 자신도 그가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 방식을 박형룡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기’를 진행하는 데에 돈을 지불한 그 자신도 공범이 되어야 맞다. 아니면 불법적 방법은 그렇다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니 ‘사기’라는 말인가?



그런데 박호근의 반응이 흥미롭다. 보통의 다른 사기꾼들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형룡 박사를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결국 김인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 나가 심문 당하고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으면, 이 문제를 3억원대 ‘사기’와 맞바꾸어야 했을까? 1만 달러는 우리가 본 ‘3000만환’에 포함된 돈으로 보인다(3000만환중에서, 미국에서 온 ‘1만불’(8,800,000환)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북장로교 측 3,000불(2,500,000환), 특별비(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 30,162,172환이었다).



미국에서 온 1만불의 불법적 환전을 지시(실행)할 정도로 박형룡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체가 된 이 사건이 밝혀지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배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앞서 박용규가 주장한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적확한 평가를 덮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변화를 가져온, 세속적 사건



이러한 사건 정황에 빗대어 봤을 때, 박형룡의 사표 수리가 이루어진 1958년 3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충격적이다. 사표 건에 대해서 이사 38명중 20명이 찬성을 하고, 17명이 반대를 한 것이다(1명 기권). 적어도 17명은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이 계속 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사회가 “그것이 고의가 아닌 사기”라는 점을 감안해 “교장사표는 반려하고 대신 불법 지출한 삼천만환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파동 주택(당시 시가 800만환)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했을 때 박형룡의 측근들은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태의 매각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실책을 범한 박형룡을 끌어안은 이유는, 그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을 밀어내려고 하는 세력은 결국 보수, 정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장로교의 자유, 진보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설득전을 펴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를 들고 나왔다.(<기독공보>, 1959.10.5) ‘세속적’ 문제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이를 두고 이영헌은 『한국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면서도 박형룡 박사의 인책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323쪽)



물론, 박용규는 이를 부정한다. 3천만원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측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갈등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박형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동민의 생각은 좀 다르다. 3천만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전의 박형룡은 wcc에 대해서 부드러운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온건한 반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사기를 당한’ 이후에는 급격히 강경해졌다며, 신신학과 단일교회의 두 가지가 쟁점이었는데 ‘용공주의’ 하나가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글(『현대신학비평』제12장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 1972)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3천만환 사건이 있기 전 1958년 3월에 썼던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통일에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교리 무관심주의로 인하여 결국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변해가며, 심지어 이교도까지도 허용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의 글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되는 성명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wcc의 용공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81쪽)



그의 신학적 변화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3천만환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세속적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한 신학’으로 향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wcc논쟁을 보다



사회학자 노치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세속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 분열 현상은 세속화의 추세와 밀접하다는 주장이다. 즉 세속화의 추세에 대한 수용과 저항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고 말이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도, wcc를 지지하는 측은 세속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측은 세속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노치준은 wcc운동이 세속화의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세속화에 대해서 피터버거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요약하면, 제도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인간 의식의 측면에서 이 영역들이 교회의 통제, 권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박형룡은 1976년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아들 박아론의 글이 총신대 학장과 교수진에 의하여 거절된 사실을 접하고 “총신대학의 좌경화의 뚜렷한 징조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세속화를 거부했던 박형룡은, 박호근이 추진했던 세속적인-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역으로 그의 ‘믿는 바’ 신학마저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신학의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갔던, 큰 신학자 박형룡의 생애에 돌출 된 부분으로 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wcc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신학적 영역에서 보기 보다는, 지역적, 역사적, 당파적 영역에서 보아야 그 첨예하고 해묵은 갈등이 바로 보일 것이다. 해법은 물론, 그 안에 있다.







http://reformednews.co.kr/921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총회신학교(박형룡 박사) 3천만환 재정 사고와 그를 이용한 음모

소재열 | 기사입력 2009/08/09 [12:58]



금년 2009년 9월에 소집될 제9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꼭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리폼드뉴스>는 기획연재 시리즈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왜, 무엇 때문에 분열했는지,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입장에서 연재한다. 본 연재는 소재열 목사가 집필하여 곧 출간하게 될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의 일부 내용을 요약해서 연재하게 된다(리폼드뉴스 편집부).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1) 사건을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합동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이용한 W.C.C.측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총회 안에서는 W.C.C.와 NAE라는 두 세력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대립의 씨앗이 발아 되어 갈등관계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갈등과 대립은 이미 1959년 제44회 분열 총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 3천만환 부정지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본다.2) 이러한 시각이 W.C.C.을 지지하는 통합측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W.C.C.의 신학적인 문제로 반대했던 합동측에서는 W.C.C. 운동과 그 신학을 은폐하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3)



이 같은 두 대립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논리이며 분열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확보하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책임을 논할 때에는 양측이 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분열이후 정통성이 자신들의 총회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설명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역사는 주관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그 시대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배경을 살펴서 과거 치열했던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 받게 될 것인지 추적하게 될 것이다.



통합측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으로 전개한다.4) 민경배 교수는 “분열의 기원이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 기금 유용에서 유래된 교장 사임과 관계가 있고 더욱이 에큐메니칼의 중상이라는 박형룡 일파의 소행에서 결국 왔다고 한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5)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에게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진현 목사의 말대로 역사를 그렇게 창작하면 안 된다.6)



조동진 박사는 ‘총회신학교 건축기금의 실체와 그 오용(誤用)에 관한 진상’에 있어서 그 헌금이 어떻게 박형룡 박사에게 전해졌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불법으로 지출했다는 신학교 건축기금 3천만 환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의 장로로 미국의 대 은행금용기업가가 개인적으로 친구로서 교장 박형룡에게 보낸 1만 달러 개인수표와 별도로 공식으로 보내진 10만 달러 중에서 지출한 것이었다. 제 십장로교회 장로의 이 특별헌금은 본래는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세속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불신하는 제 십장로교회의 미국 은행금융가의 거물 장로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통해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원하여 준비된 돈이었다.



1956년 “한국NAE” 총무였던 필자는 WEF 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헌금자는 자기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신학교 교육기금의 제1차 헌금액이 10만 달러였다. 필자는 이 신학기금이 한 교파의 신학교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보다는〈한국복음주의신학교 육재단〉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수령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재단기금으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수의 봉급 지원과 교수 양성 장학금과 건전한 신학 교재의 출판과 세계 수준의 신학도서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WEF 총무에게 보냈다.



그러나 WEF 국제총무의 견해는 달랐다. “이 돈이 장로교 장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신학교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인 박형룡 교장을 믿고 그에게 보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의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적극 만류하였지만 필자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헌금이 교장 박형룡을 통하여 총회신학교에 보내어진 것이다. 제 십장로교회는 끝까지 연합장로교회가 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는 탈퇴하여 지금은 70년대 후반부터 PCA 장로교회 총회에 속하여 있다.”7)



요약한다면, 그 특별헌금은 교장 박형룡의 총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지 그를 축출한 미국연합장로교회 산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장 박형룡이 남산에 있는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하여 3천만 환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지불한 것은 행정상 과오이기는 하지만 그 지불의 결과로 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 불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부터의 헌금이 선교부를 통하지 않고 교장 박형룡이 수령한 것부터 문제를 삼고자 했던 선교부로서는 그것을 교장 박형룡 축출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교장의 행정적 실수를 구실로 박형룡을 추방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는 새 교장을 세운 연합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책에 합치된 신학교로 개편하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박형룡 박사의 진술서를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 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같은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숭의학교의 기지 불하 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OOO불(환액 8,8OO,OOO 환), 북장로 선교부에서 5,OOO불(2,500,OOO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 산액 중 13,807,042환, 1958 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 사건을 추진 중 일부 이사는 격려로써 속히 추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계셨으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만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논하여 지출된 것이므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서 온 돈 10,OOO불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이므로 내 친구로부터 내게 보내 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 경상비에서 임시로 17,973,742환을 유용한 것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려고 생각하고 지불한 것인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8)



총회에 보고 된 이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박형룡 교장께서 교장직을 사임하셨음으로 이를 수리하였사오며”라고 기록하였고 “후임 교장이 선출된 때까지 교장 대리는 총회장으로 하되 이사장이 협동케 하였사오며”9)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박사 사표수리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바쳐 온 박형룡 박사의 사표가 이사회에 의하여 수리되었다. 이사회 전체 회의는 3월 10일 오후 3시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회되어 8일 오전 1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교장 사표수리는 7일 밤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다(밤 회의는 인톤 선교사 집에서 열림). 회의는 이사장 인톤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참석 이사는 42명 중 38명이고 가 부 투표에서 20:17 기권 1표로 수리되었다 한다.



동 회의에서 교장 사표수리에 대한 결정에서



① 1958년 3월 7일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대전제일교회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은 총 38표 중 가 20, 부 17, 기권 1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과장 박내승 씨도 역시 가 30, 부 7, 기권 1로사표가 수리되었다.



② 1958년 3월 8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장 인선위원 9인을 선임키로 하고 선교회 3인, 이사회 3인, 실행이사회 3인을 결정하기로 하고 후임 선정위원으로 선교사 대표 인톤 감부열 감의도 실행이사 대표 전필순(미참 경우에 노진현) 김윤찬, 김재석, 전체 이사 대표 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하였다.



③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박 박사가 계속 집무할 것



모 이사는 회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교장서리를 권세열 교감으로 추천하는 동의 제청이 있었으나, 총회 결의를 상기시키면서(초대 교장엔 선교사도 무방이나 2대 교장 이하는 한국인으로 할 것) 총회 결의가 번복되기 전에는 될 수 없다고 하여 선교사가 교장 사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한편 후임자 결정에는 전체 이사회의에서 2/3의 표를 획득하여야 하며 총회(금년 총회는 금년 9월에 회집 됨)에서 인준을 받아야 정식으로 교장으로 취임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취임은 일러도 10월 초순에야 가능.

한편 사무처장 박래승 목사의 후임은 4월 11일에 회집할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 하며, 총회 인준 여부에는 관계가 없다 한다.10)



제43회 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교장직 사표를 내고 명예교수로 있도록 하면서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 후 신학교에서 물러나서 쉬었고 그가 가르치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천만 환 사건은 수습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43회 총회는 신학교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조직케 하였다. 이를 위해 1959년 1월 20일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새로 조직되는 이사회가 모였다.11) 안광국 목사는 NCC측 인사로서 그가 집필한 「장로회신학대학 70년사」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NAE측은 신학교 3천만환 사건을 무마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재임케 하기 위하여 실행이사를 유리하게 선임코자 했다. 저희들의 비밀히 추천한 실행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환수, 정선득, 양화석, 송암석, 나기환, 노진현, 정일영, 황병혁, 김수영, 전제영, 김윤찬, 황득환, 김치선 등이었고 이사장으로 보이열 목사를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당선된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 안두화, 부 : 김석진

서기 : 안광국, 회계 : 위두찬

실행이사 : 안두화, 김석진, 권세열, 양화석, 보이열, 김재철, 노진현, 계창봉, 이환수, 김재석, 위두찬, 김윤식, 안광국, 황병혁



이상 14인 중 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외에는 다 탈락이 되고 말았음으로 이사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고, 저희는 박형룡 박사의 구명운동이 실패함을 느꼈다.”



이렇게 역전 되기까지 NCC측의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 지휘한 결과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하였다.12)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 사표수리는 총 투표수 38표 중 가 20표, 부 17표, 기권 1표의 근소한 차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처장 박내성의 사표는 압도적인 가표로 가결되었고,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기 전에 신학교 이사회는 회합을 갖고 후임 교장을 선출키 위하여 투표에 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명되었다.



교장 지명투표 - 게일승 19표, 명신홍 17표, 기권 2표

교장 선거투표 - 계승일 가 18표 부 19표 기권 1표



교장 선임에 실패한 이사회는 다시 인선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안두화, 김석진, 노진현, 권연호, 김재석, 안광국, 김윤찬. 그러나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시비로 인하여 비상정회가 되자 교장선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이것이 분열 전의 마지막 이사회였다.13)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으로 처음에 준비한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였다.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지도 과정에서 본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논문을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이 더 권위있는 논문이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지도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장로교회 분열사>가 탄생되었다. 본 논문은 공적 문서를 기준으로 신국판 500여 페이지로 준비된 논문이다. 곧 출판된다.









치마를 벗고 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오늘의 사태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이 되어야 한다...



[7/7] 눈팅1 IP 121.254.16.x 작성일 2009년1월11일 09시49분

제가 써프에 자주 들어와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님의 글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자료 첨가해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그 노고와 정성에 감사드리며....



귀하가 서프라이즈에 올리는 기독교 신사참배 문제와 여러 목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서프에서 귀하가 올린 글만 수십차례(우연히 클릭)해서 읽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님이 이상한 글을 올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정독한 결과 내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나는 교인인데 평소에 교회의 죄악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고 신사참배 건도 문제가 있는 것만 피상적으로 알았지, 귀하가 올린 내용처럼 그렇게 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 백정짓이 해방 후에 자행됐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노하였습니다.



나는 귀하의 글 애독자가 되었는데 서프에 들어와서 귀하의 글을 어떻게 찾냐면 자극적인(?) 제목을 우연히 클릭하면 귀하의 반가운 글이 있고, 예전에는 귀하가 ★▶ 이런 찐한 별표, 화살표 문양을 제목에 넣어서 제가 얼른 알아차리고 클릭해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서프에 와서도 시간을 많이 쓸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글이나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귀하의 글을 찾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부디 귀하의 글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직 귀하가 링크한 파일은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클릭해서 다운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내 조심성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어떤 경건한 개혁목사이자 신학자는 당시의 썩어빠진 사이비 목사들을 향해 "잡종 성직자" "우상의 목자" "바벨을 사랑하는 자"라고 격하게 비판하였더군요. 나는 이 말이 오늘의 많은 사이비 목사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진실하게 믿어보고 이웃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부족한 저에게는 한국교회의 과거 어두운 역사와 현재 많은 목사들의 더러운 행태를 알려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그럼...





출옥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신사참배 찬성파들이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면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예측 대비할 수 있고, 잘못된 미래를 막기 위한 예방 효과를 갖는다. -김두식 교수





아래가 어느 분이 여러해전 "성경 다음으로 보관 하겠습니다!!"라고 댓글을 올린 글



치마를 벗고◆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수치의 순간



◆강조점들을 컬러처리하여 기억하기에 좋게 만들었사오니 저장해 두시어 여기저기 게시판들에 푸기 등 많은 이용바랍니다. 서문은 맨뒤로 옮겼습니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숫처녀가★갈보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났습메

한국교회는 이 공적인 불경건 죄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교단적으로 회개를 한적이 없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교 총회가 일본 우상에 절하는 것에 찬성을 가결하였는데 여기에 맹렬히 반대한 소수의 목사님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평양의 주기철 목사(1897-1944, 경남)는 양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남출신인 한상동 목사(1901-1976)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이고 다녔다



한상동 목사(평신, 고려파 총수, 고신대학장)

그리고 만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메이쳔파 선교사인 한부선 선교사(1903-1992년, 나중 고려파에 가담)가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2차대전 발발후 귀국보다는 감옥행을 택하였다가 나중 포로교환 때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지도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옥중 교인들의 특별기도회의 결과 1946년 9월 20일 개교했다. 고려학교를 설립한 후 앞줄 왼쪽부터 한부선, 주남선, 박윤선, 한상동. ⓒKPM



이러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닌 목사, 전도사들의 숫자는 많지는 않다. 현재 충현교회 원로 목사인 김창인 목사의 경우는 반대하다가 만주로 도망을 가서 신앙적인 정조는 지킨 셈이다. 신학교는 1950년대 말에 가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고 있는 바는 목사는 당연히 이러한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에스겔 3 :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에스겔 3 :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일본우상에 절하는 것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순교자의 수는 약 50명이고 고문과 옥중기아와 추위(영하 40도)를 견디어내고 출옥한 성도들의 숫자는 20여명이다. 그래서 이들을 “옥중성도(獄中聖徒)”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고 부른다.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출옥성도들, 유명한 사진인데 구하기 힘든 고화질 저장바람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다.)



해방이 되자 일본우상에 절한 목사들은 면목을 잃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옥중성도들은 배도한 한국교회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2천명 정도 되는 장로교 목사들은 자신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이에 대하여 반발하고 저항을 하게 되었다. 출옥성도들이 제출한 회개법안이란 것은 단 2개월의 자숙기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반발 한 것이다. 만주로부터 귀국한 평신교수였던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졸업, 평신, 고신초대교장, 총신 교수 역임)가 수양회 도중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자 다음날부터 강사자격을 박탈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평신교수, 고신교장, 총신교수)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습격되어 구타 고문 당한 후 해산된 것같은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벌어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3년동안 목회를 못하고 그 동안에 지하에 있던 목사들이 교회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아마도 99.9%가 넘는 양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편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50대의 목사들조차도 자세한 얘기는 거의 모른다. 아니, 아예 관심 대상조차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식(歷史意識)의 결여(缺如)를 볼 수 있고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가 있는 것이다.



1951년에 6.25중 부산에서 장로교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배도한 목사들이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제명해 버렸다. 그리고 시무중인 예배당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요새 어느 토론장에 어떤 분이 “■나성한인교회 속보” 하고 올려놓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출옥성도중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저항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대부분의 성도들 약 4백명과 예배당을 내주고 나와 맨땅 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때 초량교회를 접수한 목사가 년전에 세상을 뜬 1958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한 노진현목사이다. 당시 초량교회에 남아서 예배당을 차지한 교인들 수는 구영기 목사, 양성봉장로 등 20명 정도이다.



위에서 구영기 목사는 예배당을 내주고 나온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스스로 말하기를, 인간취급을 못 받았고 경남지사로 이승만 박사의 총애를 받던 양성봉 장로는 훗날 60년대에 세상을 뜰 때 당시의 잘못을 회개(悔改)하고 한상동 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 탈취한 당시 장로교 총회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출옥성도는 내주고 나왔으나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교회는 그렇게 탈취가 용이하지 않았다. 피땀 흘려 세운 예배당을 쉽게 내주리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약신 목사(1952년 고려파 1대 총노회장, 이효재 교수 부친)등이 시무하던 교회 등은 탈취할 틈새가 없어서 탈취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총회측(당시에는 합동과 통합측이 나뉘기 전)에서는 법정에 소송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고소할 것을 금지하는 유명(有名)한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6 : 1-7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위 총회측의 “법정 고소”에 대하여 “응소”한 분이 1930년대 한국교회에서 주초문제 등 절제운동을 하기도 한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1897-1978)이다. 그래서 장장 10여년 세월에 걸쳐서 대법원에까지 올라가는 법정 공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1896-1980, 고신의 행정지도자, 속칭 ‘부곡사단’ 총수)

총회측에서 출옥성도측을 고소한 이유는



☆ 재산이 탐나고 또 교인 이탈을 막고자 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다음과 속셈이 있었다.



☆ 즉 “출옥성도라는 사람들이 뭘 세상 재산에 관심을 갖느냐?”는 식으로 망신을 주고자 하는 비열한 계산.



☆ 또 고소한 인간보다는 고소를 당하는 쪽이 시달린다는 것을 이용하고자 아는 속셈과



☆ 고려파 내부를 흔들어 놓고자 하는 교활한 착상.



아닌 게 아니라 우선 고려파 내부에서 논란이 심하게 일게 되었다. 즉 박윤선 교수가 응소를 극력 반대하여 송상석 목사와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윤선 교수(1905-1988, 평북 철산, 고신교장, 총신교장, 합신교장)

박윤선 교수는 앞서의 ‘고린도 전서 6장’을 들어 여기에 위배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하였고 이에 항거하는 송상석 목사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고소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응소한 것이다.



* 위 구절은 같은 형제간의 문제이다. 갈려져서 서로 “치리기관”이 다르니 총회측과 고려파측이 서로 잘못이 있을 때 내부적인 치리를 할 수 없으므로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10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의 항거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런데 1960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갈릴 때 합동측 목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과거 출옥성도들을 쫓아낸 것을 사과하고 하나가 되자 했을 때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한국 보수신앙의 위기였기 때문에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내세우고 합동하게 되었다. 이때 합동총회의 사회를 본 분이 바로 송상석 목사이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총회장을 한상동 목사가 연임했으니 처음 약속과 달리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나가므로 부득이 다시 분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상동 목사의 1962년 ‘복교선언’이다. 이때 경남노회 소속의 고신측 교회는 송상석 목사의 탁월한 행정력에 힘입어 거의 다 환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로 이북출신의 목사님들로서 고려파에 가담했던 분들은 환원하지 않고 합동측 교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주요한 분들은 나중에 1980년대에 합동측의 총회장을 역임한 세사람 김창인, 최훈, 김현중 목사(2001년 소천)등이다. 이 세사람은 모두 신학교는 1950년대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면 그 대법원까지 올라간 “예배당 양도 소송”의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1965년 판결은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응소한 처음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의 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응소항전이 계속 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로(출옥성도 지지측이 예배를 못 드리게 막거나 시간을 갈라서 예배를 보게된 일) 많은 교인들이 여러 교회를 만들어 나가거나 이웃 다른 교파의 교회로 옮기거나 하게 되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교인들 알박기 등 그래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숫자가 적으므로 예배당은 통합측에 내주고 교육관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응소에 반대하는 박윤선 교수는 고려파 탈퇴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3. 결언



위같은 이러한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난후 교회간에 분쟁이 있을 때 처리는 쉬워지게 되었다. 즉 송상석 목사의 소신이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나중에 심판하실 것인가?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의 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신자들은 앞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다면 어떡할 것인가?



* 고소를 한 총회측 목사들이 잘한 것인지?

* 응소한 송상석 목사도 잘 한 것인지?

*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가 잘 한 것인지?



한상동 목사가 잘했고 송상석 목사 박윤선 목사도 각각 잘 한 것인가?

대법원에까지 가서 예배당 탈취에 성공한 총회측 목사들이 “승리(勝利)의 기쁨”을 누렸으니 신나는 일인가?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목사의 처신은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바 있지만 ▼“사람이 패거리를 이루어 환장을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게시판에 들르는 여러분들은 각별히 이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 탈취하고 천당 안가기로 작정한 다음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회개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게 아닌 다음에야 기독신문 주필인 한명수 목사의 다음 말을 빌어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경직 목사님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63빌딩에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신사참배에 대해 자숙한다고 해서 상당히 그 자리가 엄숙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투옥되고 순교한 사람들 앞에 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멘~~~~~~~~~~~~~~▶









사진첨부 추악한 한국장로교회사

내일의 교훈



사진 & 추악한 한국장로교사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만석 간사--(맨 뒤 추가 설명)





●한국장로교의 추악한 역사를 밝힌다●



* 성경에 더러운 얘기는 감추고 기술이 안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다 모두 기술했지요. 그러한 추악한 얘기들을 왜 읽습니까? 후세에 교훈을 삼았지요! 과거에 눈감으면 현재에도 봉사가 됩니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오늘 바로잡지 아니하면 밝은 내일은 없습니다.



* 다른 교파들은 더 했으면 더해서 아예 바르게 살아보자는 분들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오해는 마십시오.



*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아직도 장로교 각교단들이 교단적으로 회개 선언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언한 것은 있습니다.(●부록1) 맨뒤에 붙입니다. 회개할 때까지 회개를 촉구하는 게 성경적이며 이제 사회가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때입니다.(●부록2) 건전한 상식부텀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RE;[질문]합동.통합.... : 아주 자세한 설명 1



* 계속 주요 내용을 추가 개정하고 있으니 참고 하실 분은 다운로드 해놓으시면 좋습니다. 성경공부 백번 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가치가 훨씬 더 있습니다.





맑은 새벽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곳의 글을 읽다가 보니 기독교에 '합동' , '통합'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장로교나 침례교와같은 교파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미국이나 외국에도 합동파, 통합파등이 있나요?



기독교에도 종류가 많은것 같아 헷갈리네요? 잘 알고 있는 분 계시면 간단한 설명 부탁합니다.



안녕히...



[ 김 형석 : ]





자세한 설명: 우선 쓴 것을 올리고 몇시간후 나머지 부분들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장로교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도적인 교파로 전개신교인의 70% 정도를 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242개 장로교 교단들이 있습니다.



해방전까지는 장로교파는 한 개였습니다. 미국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등 여러나라 장로교선교부에서 왔지만 협력하여 전도했기 때문에 교파는 하나였고 신학교도 1908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로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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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설립 (1901)된 장로회신학교는 이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사진은 1908년에 건축된 초기 교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장로교가 1938년도에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고 그 이후 예배당안의 강대상 전면에 일본 우상신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먼저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끔찍한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악질목사들의 주도로 일본중이 주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의식을 한강이나 혹은 추운겨울에 바다에 나가 완전 나체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감리교파나 성결교, 카토릭은 등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섰기 때문에 뭐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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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선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가장 강력히 저항한 교파가 장로교파였는데 그 저항을 한 목사님은 약 천명 가까운 평양신학교 졸업생인 목사들중 겨우 20여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다수가 감옥에서 순교하고 일부가 살아서 해방후 출옥하였는데 이들을 “옥중성도”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 부릅니다. 약 20여 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전도사였던 분도 있고 여전도사도 몇분 있었습니다.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계신 분이 두어분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이분들을 이름을 아는 분이 0.01%나 제대로 될까요? 놀랍지요! 영양실조 기아로 여러분들이 줄줄이 순교하셨는데...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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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 평양)

-위 쪽에 더 고화질로 나와 생략-



해방후 신사참배에 나섰던 목사들은 참으로 면목이 없게 되었는데 나치에 협력했던 도이치 기독교단에 소속되었던 독일의 목사들은 종전후 3년간 목회를 안하고 자숙을 하고 그동안 나치치하에서 지하교회로 있었던 고백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일제에 아부하려고 신사참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혹은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끔찍한 고문을 받게한 목사들이 속을 못차리고 교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고 또 많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지지하여 주었으니 문제였습니다. 요사이 김홍도 목사 사건 때 교계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김목사를 지지하는 걸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기득권 즉 밥그릇을 놓칠까 바 혈안이 되어 그러는 겁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안을 제출하고 단2개월간의 자숙기간을 갖자고 하였는데 이것조차도 거부하고 1951년 그 출옥성도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려신학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출옥성도들은 경남출신들이 많아 신학교도 부산에 있는데 고려신학대학이 그것입니다.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교수를 교장으로 하여 1947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고려파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후 그들이 시무중인 예배당을 소송을 걸어서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출옥성도들은 두말 않고 내주고 나왔습니다. 이 교회당을 피땀흘려 가꿔온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을 버리고 빈손으로 출옥성도들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에 분개하여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친일파목사들의 총회에서 소송을 걸어서 10년간에 걸쳐서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제치고 예배당을 탈취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항거한 분을 지지하는 성도가 대다수였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고로 제2문창교회, 동광교회등 새교회를 세워 나기도 하고 다른교회로 옮기거나 하여 예배당은 결국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고신측 송상석목사의 소신대로 “교회건물은 교인의 총유”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분쟁시 문제가 없습니다. 숫자적으로 우세한 측이 처음부터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식으로라면 맨처음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교회는 출옥성도를 따라서 그 교회를 나온 교인이 90%가 넘었으므로 그 예배당은 출옥성도측 교인들의 것인셈입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차대전후 결성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도 참여하고 노선이 불분명하고 불교 마호멧교와도 짬뽕을 하려고 논의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48년인가 장로교가 아직 하나일 때 몇몇 정치목사들이 가서 무조건 가입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국장로교는 WCC 소속이 된 겁니다. 여기에 옥중성도측은 처음부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에는 국회에서 감리교목사이자 독립투사인 국회의원 이규갑(1887-1970, 충무공 이순신 9대손, 사모인 이애라도 독립투사)외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WCC를 용공이라고 성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 것이 전선에서는 공산군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장로교대표들은 방콕에서 열리는 WCC 총회에 공산당들과 같이 참석했거든요. 그리고 6.25 때도 공산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지금도 살아 있는 모모 목사가 대표들로 나서는둥 수백명의 기독교 인사들이 YMCA회관인가에 모여서 소위 “인민군환영대회”를 “김일성 장군... 운운” 하며 열었습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반대한 장로교총회측에서 김재준이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쳐 그에 반대하는 학생들 수십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항의 했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1952년 자유주의자들이 분리되어 기독교장로회 즉 기장교단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합니다. 여기에는 우두머리들이 주로 자유주의적인 캐나다 선교부가 맡아 선교한 함경도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재준 강원룡 조향록 등...



그때 김재준의 자유신학에 51명의 학생이 항거하였는데 일제말 설립된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전학의 이유는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좌경화 되기 전에 유학을 다녀온 박형룡박사가 만주의 봉천신학원으로부터 귀국하여 고려신학교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34명의 학생들 주요한 인물은 지금도 교계원로로 활동하고 있는 정규오, 김준곤, 박창환, 신복윤 등등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안에서는 50년대에 NAE라는 보수적인 복음주의동지회측에서 세력이 매우 컷습니다.. 그당시 총회장은 명신홍(일제말 칼빈신학교유학, 나중 합동), 한경직(친일경력), 전필순(친일행각으로 반민특위에까지 체포된 자) 목사 등이 하고 있었습니다.



위 기장을 포함한 당시 총회측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회개를 하기보다는 1938년의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한 결의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즉 원인무효시켰는데... 그리고 신사참배를 안했다면 취소가 가능합니다. 다 신사참배 하고서 회개를 안하고 가결시킨 옛날 것만 취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여러번에 걸쳐서 취소하고 또 취소하고 그랬습니다. 장난도 아니고 이거...



그런데 신사참배 회개를 거부한 자들이 무슨 보수 자유를 따지는 게 의미가 별로 있었는지 서로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NAE 측의 우두머리가 지금 ‘합동’에서 나온 ‘개혁’의 정규오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고문이 박형룡박사입니다. 박박사(평북)는 1897년생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기 직전에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1920년대부터 신학교육을 시작한 당시 최고 교수였습니다.



이 박형룡박사가 1947년 중반 고려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있다가 외국선교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신학교의 위치가 부산인 점 그런 것 때문에 서울로 가버리고 서울에서 전학온 34명 학생 전원은 박형룡박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불과 두어달 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실한 거지요.



박형룡박사도 해방후, 평북, 전주 집회 등에서 수차에 걸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때마다 목사들이 들고 일어나 반발하고 집회강사를 못하도록까지 저항하는 고로 회개 보다는 후진양성에 주력하자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1978년경 세상 뜨실 때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님의 말대로 “회개를 우선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WCC를 찬성하는 우두머리가 한경직 목사(1902-2000, 평북, 숭전, 좌경무렵의 프린스턴졸)이고 WCC 즉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측의 우두머리는 박형룡박사였습니다. 이 두사람이 직접 치열하게 싸운 것은 아니고 그 아래사람들이 붙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1958년경 신학교부지를 구입하려는데 박박사가 외국선교부의 원조금 3,000만환을 박호근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날려버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WCC 찬성측에서는 “이때다!” 하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한편 정규오목사(해방후 신학교 1회 졸업생)를 우두머리로 한 NAE측에서는 자신들의 고문이자 스승인 박형룡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WCC 찬성측을 뒤늦게 용공으로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기노회에서 총회에 보낼 총대를 뽑는데 이때 NAE측 목사들이 총대로 많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만 WCC측 한명이 누락되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유리하게 뽑혔으므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발표하면 될 것인데 그냥 넘어가서 이게 나중에 싸움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싸움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WCC에 찬성하는 파들(통합)은 저들끼리 따로 모여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도 있었던 친일파 전필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선교부들의 원조 등 때문에 목사들이 많이 쏠렸을 거는 당연합니다. 당시엔 태반의 사람들에겐 미국이 천당 가는 거였으니깐요. 기독교 학교 등 재산 등은 통합으로 남았지요. 평신도들은 합동측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한편 위기에 몰린 NAE측 목사들은 박형룡박사와 자기들도 한패가 되어 내쫓은 출옥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총회에서 축출한 것을 사과하고 하나로 합칠 것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출옥성도측에서는 자신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고 예배당까지 탈취한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쉽게 화해 할 일은 아니지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데 거절하면 교만하다는 비난을 모면키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고 한편 위기에 몰린 한국보수신학을 살려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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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촐옥성도측 즉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얘기가 점점 흥미 진진하게 전개 되는데...



NAE측과 고려측이 합하는 과정, 다시 분리하는 과정, 그후 전개 되는 상황, 그리고 1979년부터 시작된 합동측이 수십개로 분리되는 과정을 기술하자면 도저히 한두번에 끝내기는 힘들고 앞으로도 여러번 나누어 계속해야 할 것같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그치고 내일부터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나중에 위의 것을 다시 보충 정리하고 맨나중에 최후로 정리하여 한번에 시리즈로 올리겠습니다. 다운로드하여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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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선교위원회가 마련한 오찬에 참석한 교계지도자들(1960.2.18). 지금도 알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위 내용은 많은 교회사 책들을 참고로 하고 여기저기 오랜기간 읽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구두로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도 합했습니다. 자세히 쓴 교회사책이라도 한두권만 읽어서는 위같이 객관적 종합적으로 기술된 것을 찾기는 힘들것입니다.









위글을 가져오게 된 성경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이라는 게 물질입니까?)



에스겔 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현실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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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당하고도 말못하는 충격사연 심층취재**

사진첨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 당하고도 신고하는 율이 2% 정도밖에 안된다고 언론들에 보도된 바가 있다. 법정에 서는 것조차 수치스런 일이지만 그 재판 진행과정에서... 한국의 성폭행은 세계 1위라고 한다. 얼마나 썩은 나라인지 미국은 인구 10만명당 몸파는 여자가 23명인데 우리나라는 몸파는 여자가 무려 1백만명이 넘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몇 cm를... 몇분동안...” 하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 게 진행된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잡아 죽일 것같지만... 재판정에서서 호소하렵니까? 그렇게 “몇 cm를... 몇분동안...” 재판관에 호소하렵니까?



한국의 여성단체에 신고되는 여신도 성폭행 숫자는 엄청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단 1년만에 47건이 신고되었는데 실제 100배에 이르고... 교회의 특성상 모호하게 진행되는 점도 많고... 그런점을 감안하면 성가대원 50명 성폭행등 헤아릴수 없이 많이 여신도들이 교역자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근데 위와같이 당하고도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 모교수가 쓴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이란 책이 있다. 본문과 현장사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현재 한국교회 실정과 교단간 눈치보기 때문에 얼마나 솔직하게 쓰여있나 의심스러웠는데 예상보단 신랄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통합측과 한신대 즉 이른바 진보(내지는 자유)와 그 아류교단의 과거사를 상당부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먹사가 신사참배에 항거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들었고 어느 먹사가 주기철 목사의 노모 등 가족을 목사관에서 끌어내어 탈취했느냐는 등은 언급이 안되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못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이자들이 해방후 한국교회를 주름 잡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최고 지도자로 행세하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위 책의 점수를 매긴다면 한 70점이나 될까? 위 책에 비하여 성결교 소속의 이선교 목사님이 쓴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는 신랄하게 까발긴 점으로 보아 한 80점은 된다. 하기야 이선교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를 검찰청에 반란방조혐의로 고발하여 신문에 보도되고 한동안 그것 때문에 지하언론이 무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 두책이 최초라 할만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친일 친독재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부정 사기 협잡들을 노출시킨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예상보단 불과 몇 개월 사이에 4판까지 나온 것을 보아 그것도 반가운 일이고.





통합측이나 한신측 그리고 합동측에서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출옥성도 성자란자들이) 예배당 쟁탈전을 벌였다...” 즉 자세한 서술도 없이 무조건 소위 성자들이 세상 재산에 탐이 나서 혈안이 된 인간들이라고 하는식으로 매도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출옥성도측에서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 이 문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출옥성도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과 두말없이 피땀흘려 가꾼 교회를 내주고 나와 맨땅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배당을 내놓으라고 총회측(통합과 합동이 분리되기 전)에서 소송을 걸자 그걸 항거하는 성도들이 응소를 하여 장장 10년간에 걸쳐 대법원에까지 가서 판결이 난 것이다. 즉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이다. 그러면 위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은 교인들 90% 이상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니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이다.



사기꾼 먹사와 교회사가중 대부분인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즉 “하나님만이 누가 뭣이 옳은지 아신다”는 것이다. 미친넘들! 성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고 설교까지 하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알 것 아닌가? 일반계시인 양심으로도 판단 할 수가 있는 문제이고. 잘 몰랐다? 그럼 아래 태만의 죄에 해당한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리고 또하나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단순히 신사참배만 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친일하며 갖은 악행을 다하고 동족을 못살게 군 목사들에게 맞는 소리인가? 성경은 치리의 의무성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Y 신과대학 명예교수란 또라이 교회사가는 “그 말에는 반박못할 논리와 신학이 있다”고 하는데 그럼, 컨닝하다 걸린 신학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하고 반발한다면 어떡할 셈인가? 공적인 죄는 공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위에 대한 참고문은 다음 “몸버린시골처녀를” 클릭하며 자세한 것을 읽을 수 있다.



(3-2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자가 속한 교단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까지 체포된 바 있는 일경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추악한 악질 한국교회 지도자를 읽고 싶으면 아래 “치마를 벗고” 안에서 나오는 “최고악질”을 클릭하시면 자세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총회측(합동과 통합, 기장)이 출옥성도들을 독선주의자 분리주의자들로 매도하니 그것을 방어하기에 급급한데 과연 성경신학적으로 그게 옳은 태도인가? 자의적으로 분리했나 쫒겨남을 당한 것인가 하는 사실확인을 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론 아예 맞받어 쳐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실제 처음부터 그런 교단도 두 개나 있다.



아래를 “치마를 벗고” 클릭하면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3-1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왕따 당하는 게 두려웠던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말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하라”(잠 31:8)



당시 응소한 목사는 출옥성도는 아니고 해방후 출옥성도편에 선 1930년대에 한국교회에서 절제운동(주초문제)을 하던 송상석 목사(1897-1977)이다. 이분이 행정능력이 탁월하여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해방후 당시까지 만주봉천신학원에 머물던 한국보수신학계의 거성 박형룡박사(1897-1978)를 배를 전세내어 타고 만주에 가서 비밀리에 모셔온 분이다. 즉 오늘의 총신이 있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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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IP 192.241.172.x    작성일 2020년10월22일 12시20분      
1958년 장로교를 뒤흔든 3천만환 사건

사깃꾼 걸려 -신사참배 거부한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박형룡을 치리하려 들었는가?





3천만환 사건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4811

박형룡의 3000만환 사건을 다시 보다

WCC 논쟁 … 반세기 지나 되풀이 되는 갈등의 거울 삼아야




이범진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다루던지 긍정적으로 다루던 지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바’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은 -어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분열을 야기했다. 그러나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한 분열은 그의 믿는 바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었고, 최선의 방향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다는 데에서 그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믿음에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데에는 진정성이 보인다. ‘믿는 바’와 ‘행동’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유일한 ‘돌출’이 발견된다. 이른 바 3000만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의 ‘믿는 바’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룬다.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박형룡에게 있었던 3000만환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표현’과 ‘의미부여’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wcc 사건을 첨예하게 부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개인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다가 좌절한 단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살핌으로써,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는 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이른바 3000만환 사건

박형룡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이른바 3000만환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적인 평가를 하려는 이들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3』은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교장이던 박형룡은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다.(92쪽)



3000만환은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억원에 달한다.
한 학교의 교장이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3억 원을 ‘교섭비 명분’으로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은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58년 신학교 이사회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역사신학자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당시 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이신덕(1909-1994, 경성제대 법대)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박호근이었다. 박호근은 자신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기지 불하를 의뢰하고 총회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박교장의 결재를 받아 30,162,172환을 이사회의 승낙 없이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박호근이 사기를 친 것이었고, 그것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박용규는 3000만환 사건을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사기’를 친 박호근이라는 사람과, 그를 소개한 박래승과 이신덕의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순수함’은 이 사건에서 객체로 남고, ‘사기꾼’ 박호근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이 들었을 그 ‘말’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사회도 모르게, ‘3억원’을 지불하도록 결재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말이다.



이에 대해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는 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장로 직함을 가진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교장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부지 불하, 건축허가, 학교의 대학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였다.(364쪽)



‘허풍을 떨면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숭의학교 교장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1953년 4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은 그녀에게 ‘사기꾼’ 박호근은 실력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형룡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은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은’ 그는 박호근에게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명목으로 불과 두달 만에 3000만환을 지불했다. 오늘 날 3억에 달하는 이 돈이 두 달만에 사라졌다.



물론 결과는 대지 불하, 건축 허가, 대학 인가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호근은 그 돈을 접대비, 교섭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받았다. 그 당시에 그가 대지 불하 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었다. 사용목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방법은 분명 불법적인 경로였다.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김인서,『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23-25쪽)



결과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박호근 자신도 그가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 방식을 박형룡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기’를 진행하는 데에 돈을 지불한 그 자신도 공범이 되어야 맞다. 아니면 불법적 방법은 그렇다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니 ‘사기’라는 말인가?



그런데 박호근의 반응이 흥미롭다. 보통의 다른 사기꾼들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형룡 박사를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결국 김인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 나가 심문 당하고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으면, 이 문제를 3억원대 ‘사기’와 맞바꾸어야 했을까? 1만 달러는 우리가 본 ‘3000만환’에 포함된 돈으로 보인다(3000만환중에서, 미국에서 온 ‘1만불’(8,800,000환)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북장로교 측 3,000불(2,500,000환), 특별비(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 30,162,172환이었다).



미국에서 온 1만불의 불법적 환전을 지시(실행)할 정도로 박형룡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체가 된 이 사건이 밝혀지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배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앞서 박용규가 주장한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적확한 평가를 덮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변화를 가져온, 세속적 사건



이러한 사건 정황에 빗대어 봤을 때, 박형룡의 사표 수리가 이루어진 1958년 3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충격적이다. 사표 건에 대해서 이사 38명중 20명이 찬성을 하고, 17명이 반대를 한 것이다(1명 기권). 적어도 17명은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이 계속 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사회가 “그것이 고의가 아닌 사기”라는 점을 감안해 “교장사표는 반려하고 대신 불법 지출한 삼천만환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파동 주택(당시 시가 800만환)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했을 때 박형룡의 측근들은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태의 매각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실책을 범한 박형룡을 끌어안은 이유는, 그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을 밀어내려고 하는 세력은 결국 보수, 정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장로교의 자유, 진보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설득전을 펴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를 들고 나왔다.(<기독공보>, 1959.10.5) ‘세속적’ 문제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이를 두고 이영헌은 『한국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면서도 박형룡 박사의 인책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323쪽)



물론, 박용규는 이를 부정한다. 3천만원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측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갈등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박형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동민의 생각은 좀 다르다. 3천만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전의 박형룡은 wcc에 대해서 부드러운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온건한 반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사기를 당한’ 이후에는 급격히 강경해졌다며, 신신학과 단일교회의 두 가지가 쟁점이었는데 ‘용공주의’ 하나가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글(『현대신학비평』제12장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 1972)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3천만환 사건이 있기 전 1958년 3월에 썼던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통일에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교리 무관심주의로 인하여 결국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변해가며, 심지어 이교도까지도 허용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의 글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되는 성명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wcc의 용공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81쪽)



그의 신학적 변화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3천만환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세속적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한 신학’으로 향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wcc논쟁을 보다



사회학자 노치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세속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 분열 현상은 세속화의 추세와 밀접하다는 주장이다. 즉 세속화의 추세에 대한 수용과 저항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고 말이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도, wcc를 지지하는 측은 세속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측은 세속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노치준은 wcc운동이 세속화의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세속화에 대해서 피터버거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요약하면, 제도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인간 의식의 측면에서 이 영역들이 교회의 통제, 권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박형룡은 1976년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아들 박아론의 글이 총신대 학장과 교수진에 의하여 거절된 사실을 접하고 “총신대학의 좌경화의 뚜렷한 징조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세속화를 거부했던 박형룡은, 박호근이 추진했던 세속적인-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역으로 그의 ‘믿는 바’ 신학마저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신학의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갔던, 큰 신학자 박형룡의 생애에 돌출 된 부분으로 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wcc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신학적 영역에서 보기 보다는, 지역적, 역사적, 당파적 영역에서 보아야 그 첨예하고 해묵은 갈등이 바로 보일 것이다. 해법은 물론, 그 안에 있다.







http://reformednews.co.kr/921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총회신학교(박형룡 박사) 3천만환 재정 사고와 그를 이용한 음모

소재열 | 기사입력 2009/08/09 [12:58]



금년 2009년 9월에 소집될 제9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꼭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리폼드뉴스>는 기획연재 시리즈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왜, 무엇 때문에 분열했는지,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입장에서 연재한다. 본 연재는 소재열 목사가 집필하여 곧 출간하게 될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의 일부 내용을 요약해서 연재하게 된다(리폼드뉴스 편집부).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1) 사건을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합동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이용한 W.C.C.측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총회 안에서는 W.C.C.와 NAE라는 두 세력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대립의 씨앗이 발아 되어 갈등관계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갈등과 대립은 이미 1959년 제44회 분열 총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 3천만환 부정지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본다.2) 이러한 시각이 W.C.C.을 지지하는 통합측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W.C.C.의 신학적인 문제로 반대했던 합동측에서는 W.C.C. 운동과 그 신학을 은폐하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3)



이 같은 두 대립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논리이며 분열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확보하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책임을 논할 때에는 양측이 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분열이후 정통성이 자신들의 총회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설명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역사는 주관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그 시대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배경을 살펴서 과거 치열했던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 받게 될 것인지 추적하게 될 것이다.



통합측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으로 전개한다.4) 민경배 교수는 “분열의 기원이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 기금 유용에서 유래된 교장 사임과 관계가 있고 더욱이 에큐메니칼의 중상이라는 박형룡 일파의 소행에서 결국 왔다고 한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5)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에게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진현 목사의 말대로 역사를 그렇게 창작하면 안 된다.6)



조동진 박사는 ‘총회신학교 건축기금의 실체와 그 오용(誤用)에 관한 진상’에 있어서 그 헌금이 어떻게 박형룡 박사에게 전해졌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불법으로 지출했다는 신학교 건축기금 3천만 환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의 장로로 미국의 대 은행금용기업가가 개인적으로 친구로서 교장 박형룡에게 보낸 1만 달러 개인수표와 별도로 공식으로 보내진 10만 달러 중에서 지출한 것이었다. 제 십장로교회 장로의 이 특별헌금은 본래는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세속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불신하는 제 십장로교회의 미국 은행금융가의 거물 장로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통해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원하여 준비된 돈이었다.



1956년 “한국NAE” 총무였던 필자는 WEF 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헌금자는 자기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신학교 교육기금의 제1차 헌금액이 10만 달러였다. 필자는 이 신학기금이 한 교파의 신학교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보다는〈한국복음주의신학교 육재단〉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수령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재단기금으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수의 봉급 지원과 교수 양성 장학금과 건전한 신학 교재의 출판과 세계 수준의 신학도서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WEF 총무에게 보냈다.



그러나 WEF 국제총무의 견해는 달랐다. “이 돈이 장로교 장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신학교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인 박형룡 교장을 믿고 그에게 보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의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적극 만류하였지만 필자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헌금이 교장 박형룡을 통하여 총회신학교에 보내어진 것이다. 제 십장로교회는 끝까지 연합장로교회가 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는 탈퇴하여 지금은 70년대 후반부터 PCA 장로교회 총회에 속하여 있다.”7)



요약한다면, 그 특별헌금은 교장 박형룡의 총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지 그를 축출한 미국연합장로교회 산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장 박형룡이 남산에 있는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하여 3천만 환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지불한 것은 행정상 과오이기는 하지만 그 지불의 결과로 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 불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부터의 헌금이 선교부를 통하지 않고 교장 박형룡이 수령한 것부터 문제를 삼고자 했던 선교부로서는 그것을 교장 박형룡 축출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교장의 행정적 실수를 구실로 박형룡을 추방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는 새 교장을 세운 연합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책에 합치된 신학교로 개편하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박형룡 박사의 진술서를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 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같은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숭의학교의 기지 불하 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OOO불(환액 8,8OO,OOO 환), 북장로 선교부에서 5,OOO불(2,500,OOO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 산액 중 13,807,042환, 1958 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 사건을 추진 중 일부 이사는 격려로써 속히 추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계셨으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만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논하여 지출된 것이므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서 온 돈 10,OOO불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이므로 내 친구로부터 내게 보내 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 경상비에서 임시로 17,973,742환을 유용한 것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려고 생각하고 지불한 것인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8)



총회에 보고 된 이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박형룡 교장께서 교장직을 사임하셨음으로 이를 수리하였사오며”라고 기록하였고 “후임 교장이 선출된 때까지 교장 대리는 총회장으로 하되 이사장이 협동케 하였사오며”9)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박사 사표수리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바쳐 온 박형룡 박사의 사표가 이사회에 의하여 수리되었다. 이사회 전체 회의는 3월 10일 오후 3시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회되어 8일 오전 1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교장 사표수리는 7일 밤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다(밤 회의는 인톤 선교사 집에서 열림). 회의는 이사장 인톤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참석 이사는 42명 중 38명이고 가 부 투표에서 20:17 기권 1표로 수리되었다 한다.



동 회의에서 교장 사표수리에 대한 결정에서



① 1958년 3월 7일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대전제일교회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은 총 38표 중 가 20, 부 17, 기권 1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과장 박내승 씨도 역시 가 30, 부 7, 기권 1로사표가 수리되었다.



② 1958년 3월 8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장 인선위원 9인을 선임키로 하고 선교회 3인, 이사회 3인, 실행이사회 3인을 결정하기로 하고 후임 선정위원으로 선교사 대표 인톤 감부열 감의도 실행이사 대표 전필순(미참 경우에 노진현) 김윤찬, 김재석, 전체 이사 대표 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하였다.



③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박 박사가 계속 집무할 것



모 이사는 회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교장서리를 권세열 교감으로 추천하는 동의 제청이 있었으나, 총회 결의를 상기시키면서(초대 교장엔 선교사도 무방이나 2대 교장 이하는 한국인으로 할 것) 총회 결의가 번복되기 전에는 될 수 없다고 하여 선교사가 교장 사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한편 후임자 결정에는 전체 이사회의에서 2/3의 표를 획득하여야 하며 총회(금년 총회는 금년 9월에 회집 됨)에서 인준을 받아야 정식으로 교장으로 취임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취임은 일러도 10월 초순에야 가능.

한편 사무처장 박래승 목사의 후임은 4월 11일에 회집할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 하며, 총회 인준 여부에는 관계가 없다 한다.10)



제43회 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교장직 사표를 내고 명예교수로 있도록 하면서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 후 신학교에서 물러나서 쉬었고 그가 가르치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천만 환 사건은 수습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43회 총회는 신학교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조직케 하였다. 이를 위해 1959년 1월 20일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새로 조직되는 이사회가 모였다.11) 안광국 목사는 NCC측 인사로서 그가 집필한 「장로회신학대학 70년사」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NAE측은 신학교 3천만환 사건을 무마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재임케 하기 위하여 실행이사를 유리하게 선임코자 했다. 저희들의 비밀히 추천한 실행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환수, 정선득, 양화석, 송암석, 나기환, 노진현, 정일영, 황병혁, 김수영, 전제영, 김윤찬, 황득환, 김치선 등이었고 이사장으로 보이열 목사를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당선된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 안두화, 부 : 김석진

서기 : 안광국, 회계 : 위두찬

실행이사 : 안두화, 김석진, 권세열, 양화석, 보이열, 김재철, 노진현, 계창봉, 이환수, 김재석, 위두찬, 김윤식, 안광국, 황병혁



이상 14인 중 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외에는 다 탈락이 되고 말았음으로 이사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고, 저희는 박형룡 박사의 구명운동이 실패함을 느꼈다.”



이렇게 역전 되기까지 NCC측의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 지휘한 결과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하였다.12)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 사표수리는 총 투표수 38표 중 가 20표, 부 17표, 기권 1표의 근소한 차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처장 박내성의 사표는 압도적인 가표로 가결되었고,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기 전에 신학교 이사회는 회합을 갖고 후임 교장을 선출키 위하여 투표에 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명되었다.



교장 지명투표 - 게일승 19표, 명신홍 17표, 기권 2표

교장 선거투표 - 계승일 가 18표 부 19표 기권 1표



교장 선임에 실패한 이사회는 다시 인선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안두화, 김석진, 노진현, 권연호, 김재석, 안광국, 김윤찬. 그러나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시비로 인하여 비상정회가 되자 교장선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이것이 분열 전의 마지막 이사회였다.13)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으로 처음에 준비한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였다.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지도 과정에서 본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논문을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이 더 권위있는 논문이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지도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장로교회 분열사>가 탄생되었다. 본 논문은 공적 문서를 기준으로 신국판 500여 페이지로 준비된 논문이다. 곧 출판된다.









치마를 벗고 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오늘의 사태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이 되어야 한다...



[7/7] 눈팅1 IP 121.254.16.x 작성일 2009년1월11일 09시49분

제가 써프에 자주 들어와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님의 글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자료 첨가해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그 노고와 정성에 감사드리며....



귀하가 서프라이즈에 올리는 기독교 신사참배 문제와 여러 목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서프에서 귀하가 올린 글만 수십차례(우연히 클릭)해서 읽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님이 이상한 글을 올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정독한 결과 내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나는 교인인데 평소에 교회의 죄악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고 신사참배 건도 문제가 있는 것만 피상적으로 알았지, 귀하가 올린 내용처럼 그렇게 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 백정짓이 해방 후에 자행됐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노하였습니다.



나는 귀하의 글 애독자가 되었는데 서프에 들어와서 귀하의 글을 어떻게 찾냐면 자극적인(?) 제목을 우연히 클릭하면 귀하의 반가운 글이 있고, 예전에는 귀하가 ★▶ 이런 찐한 별표, 화살표 문양을 제목에 넣어서 제가 얼른 알아차리고 클릭해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서프에 와서도 시간을 많이 쓸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글이나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귀하의 글을 찾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부디 귀하의 글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직 귀하가 링크한 파일은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클릭해서 다운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내 조심성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어떤 경건한 개혁목사이자 신학자는 당시의 썩어빠진 사이비 목사들을 향해 "잡종 성직자" "우상의 목자" "바벨을 사랑하는 자"라고 격하게 비판하였더군요. 나는 이 말이 오늘의 많은 사이비 목사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진실하게 믿어보고 이웃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부족한 저에게는 한국교회의 과거 어두운 역사와 현재 많은 목사들의 더러운 행태를 알려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그럼...





출옥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신사참배 찬성파들이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면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예측 대비할 수 있고, 잘못된 미래를 막기 위한 예방 효과를 갖는다. -김두식 교수





아래가 어느 분이 여러해전 "성경 다음으로 보관 하겠습니다!!"라고 댓글을 올린 글



치마를 벗고◆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수치의 순간



◆강조점들을 컬러처리하여 기억하기에 좋게 만들었사오니 저장해 두시어 여기저기 게시판들에 푸기 등 많은 이용바랍니다. 서문은 맨뒤로 옮겼습니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숫처녀가★갈보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났습메

한국교회는 이 공적인 불경건 죄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교단적으로 회개를 한적이 없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교 총회가 일본 우상에 절하는 것에 찬성을 가결하였는데 여기에 맹렬히 반대한 소수의 목사님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평양의 주기철 목사(1897-1944, 경남)는 양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남출신인 한상동 목사(1901-1976)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이고 다녔다



한상동 목사(평신, 고려파 총수, 고신대학장)

그리고 만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메이쳔파 선교사인 한부선 선교사(1903-1992년, 나중 고려파에 가담)가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2차대전 발발후 귀국보다는 감옥행을 택하였다가 나중 포로교환 때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지도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옥중 교인들의 특별기도회의 결과 1946년 9월 20일 개교했다. 고려학교를 설립한 후 앞줄 왼쪽부터 한부선, 주남선, 박윤선, 한상동. ⓒKPM



이러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닌 목사, 전도사들의 숫자는 많지는 않다. 현재 충현교회 원로 목사인 김창인 목사의 경우는 반대하다가 만주로 도망을 가서 신앙적인 정조는 지킨 셈이다. 신학교는 1950년대 말에 가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고 있는 바는 목사는 당연히 이러한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에스겔 3 :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에스겔 3 :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일본우상에 절하는 것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순교자의 수는 약 50명이고 고문과 옥중기아와 추위(영하 40도)를 견디어내고 출옥한 성도들의 숫자는 20여명이다. 그래서 이들을 “옥중성도(獄中聖徒)”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고 부른다.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출옥성도들, 유명한 사진인데 구하기 힘든 고화질 저장바람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다.)



해방이 되자 일본우상에 절한 목사들은 면목을 잃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옥중성도들은 배도한 한국교회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2천명 정도 되는 장로교 목사들은 자신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이에 대하여 반발하고 저항을 하게 되었다. 출옥성도들이 제출한 회개법안이란 것은 단 2개월의 자숙기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반발 한 것이다. 만주로부터 귀국한 평신교수였던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졸업, 평신, 고신초대교장, 총신 교수 역임)가 수양회 도중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자 다음날부터 강사자격을 박탈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평신교수, 고신교장, 총신교수)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습격되어 구타 고문 당한 후 해산된 것같은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벌어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3년동안 목회를 못하고 그 동안에 지하에 있던 목사들이 교회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아마도 99.9%가 넘는 양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편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50대의 목사들조차도 자세한 얘기는 거의 모른다. 아니, 아예 관심 대상조차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식(歷史意識)의 결여(缺如)를 볼 수 있고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가 있는 것이다.



1951년에 6.25중 부산에서 장로교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배도한 목사들이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제명해 버렸다. 그리고 시무중인 예배당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요새 어느 토론장에 어떤 분이 “■나성한인교회 속보” 하고 올려놓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출옥성도중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저항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대부분의 성도들 약 4백명과 예배당을 내주고 나와 맨땅 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때 초량교회를 접수한 목사가 년전에 세상을 뜬 1958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한 노진현목사이다. 당시 초량교회에 남아서 예배당을 차지한 교인들 수는 구영기 목사, 양성봉장로 등 20명 정도이다.



위에서 구영기 목사는 예배당을 내주고 나온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스스로 말하기를, 인간취급을 못 받았고 경남지사로 이승만 박사의 총애를 받던 양성봉 장로는 훗날 60년대에 세상을 뜰 때 당시의 잘못을 회개(悔改)하고 한상동 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 탈취한 당시 장로교 총회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출옥성도는 내주고 나왔으나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교회는 그렇게 탈취가 용이하지 않았다. 피땀 흘려 세운 예배당을 쉽게 내주리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약신 목사(1952년 고려파 1대 총노회장, 이효재 교수 부친)등이 시무하던 교회 등은 탈취할 틈새가 없어서 탈취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총회측(당시에는 합동과 통합측이 나뉘기 전)에서는 법정에 소송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고소할 것을 금지하는 유명(有名)한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6 : 1-7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위 총회측의 “법정 고소”에 대하여 “응소”한 분이 1930년대 한국교회에서 주초문제 등 절제운동을 하기도 한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1897-1978)이다. 그래서 장장 10여년 세월에 걸쳐서 대법원에까지 올라가는 법정 공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1896-1980, 고신의 행정지도자, 속칭 ‘부곡사단’ 총수)

총회측에서 출옥성도측을 고소한 이유는



☆ 재산이 탐나고 또 교인 이탈을 막고자 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다음과 속셈이 있었다.



☆ 즉 “출옥성도라는 사람들이 뭘 세상 재산에 관심을 갖느냐?”는 식으로 망신을 주고자 하는 비열한 계산.



☆ 또 고소한 인간보다는 고소를 당하는 쪽이 시달린다는 것을 이용하고자 아는 속셈과



☆ 고려파 내부를 흔들어 놓고자 하는 교활한 착상.



아닌 게 아니라 우선 고려파 내부에서 논란이 심하게 일게 되었다. 즉 박윤선 교수가 응소를 극력 반대하여 송상석 목사와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윤선 교수(1905-1988, 평북 철산, 고신교장, 총신교장, 합신교장)

박윤선 교수는 앞서의 ‘고린도 전서 6장’을 들어 여기에 위배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하였고 이에 항거하는 송상석 목사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고소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응소한 것이다.



* 위 구절은 같은 형제간의 문제이다. 갈려져서 서로 “치리기관”이 다르니 총회측과 고려파측이 서로 잘못이 있을 때 내부적인 치리를 할 수 없으므로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10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의 항거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런데 1960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갈릴 때 합동측 목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과거 출옥성도들을 쫓아낸 것을 사과하고 하나가 되자 했을 때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한국 보수신앙의 위기였기 때문에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내세우고 합동하게 되었다. 이때 합동총회의 사회를 본 분이 바로 송상석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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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총회장을 한상동 목사가 연임했으니 처음 약속과 달리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나가므로 부득이 다시 분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상동 목사의 1962년 ‘복교선언’이다. 이때 경남노회 소속의 고신측 교회는 송상석 목사의 탁월한 행정력에 힘입어 거의 다 환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로 이북출신의 목사님들로서 고려파에 가담했던 분들은 환원하지 않고 합동측 교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주요한 분들은 나중에 1980년대에 합동측의 총회장을 역임한 세사람 김창인, 최훈, 김현중 목사(2001년 소천)등이다. 이 세사람은 모두 신학교는 1950년대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면 그 대법원까지 올라간 “예배당 양도 소송”의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1965년 판결은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응소한 처음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의 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응소항전이 계속 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로(출옥성도 지지측이 예배를 못 드리게 막거나 시간을 갈라서 예배를 보게된 일) 많은 교인들이 여러 교회를 만들어 나가거나 이웃 다른 교파의 교회로 옮기거나 하게 되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교인들 알박기 등 그래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숫자가 적으므로 예배당은 통합측에 내주고 교육관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응소에 반대하는 박윤선 교수는 고려파 탈퇴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3. 결언



위같은 이러한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난후 교회간에 분쟁이 있을 때 처리는 쉬워지게 되었다. 즉 송상석 목사의 소신이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나중에 심판하실 것인가?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의 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신자들은 앞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다면 어떡할 것인가?



* 고소를 한 총회측 목사들이 잘한 것인지?

* 응소한 송상석 목사도 잘 한 것인지?

*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가 잘 한 것인지?



한상동 목사가 잘했고 송상석 목사 박윤선 목사도 각각 잘 한 것인가?

대법원에까지 가서 예배당 탈취에 성공한 총회측 목사들이 “승리(勝利)의 기쁨”을 누렸으니 신나는 일인가?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목사의 처신은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바 있지만 ▼“사람이 패거리를 이루어 환장을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게시판에 들르는 여러분들은 각별히 이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 탈취하고 천당 안가기로 작정한 다음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회개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게 아닌 다음에야 기독신문 주필인 한명수 목사의 다음 말을 빌어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경직 목사님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63빌딩에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신사참배에 대해 자숙한다고 해서 상당히 그 자리가 엄숙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투옥되고 순교한 사람들 앞에 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멘~~~~~~~~~~~~~~▶









사진첨부 추악한 한국장로교회사

내일의 교훈



사진 & 추악한 한국장로교사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만석 간사--(맨 뒤 추가 설명)





●한국장로교의 추악한 역사를 밝힌다●



* 성경에 더러운 얘기는 감추고 기술이 안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다 모두 기술했지요. 그러한 추악한 얘기들을 왜 읽습니까? 후세에 교훈을 삼았지요! 과거에 눈감으면 현재에도 봉사가 됩니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오늘 바로잡지 아니하면 밝은 내일은 없습니다.



* 다른 교파들은 더 했으면 더해서 아예 바르게 살아보자는 분들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오해는 마십시오.



*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아직도 장로교 각교단들이 교단적으로 회개 선언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언한 것은 있습니다.(●부록1) 맨뒤에 붙입니다. 회개할 때까지 회개를 촉구하는 게 성경적이며 이제 사회가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때입니다.(●부록2) 건전한 상식부텀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RE;[질문]합동.통합.... : 아주 자세한 설명 1



* 계속 주요 내용을 추가 개정하고 있으니 참고 하실 분은 다운로드 해놓으시면 좋습니다. 성경공부 백번 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가치가 훨씬 더 있습니다.





맑은 새벽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곳의 글을 읽다가 보니 기독교에 '합동' , '통합'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장로교나 침례교와같은 교파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미국이나 외국에도 합동파, 통합파등이 있나요?



기독교에도 종류가 많은것 같아 헷갈리네요? 잘 알고 있는 분 계시면 간단한 설명 부탁합니다.



안녕히...



[ 김 형석 : ]





자세한 설명: 우선 쓴 것을 올리고 몇시간후 나머지 부분들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장로교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도적인 교파로 전개신교인의 70% 정도를 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242개 장로교 교단들이 있습니다.



해방전까지는 장로교파는 한 개였습니다. 미국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등 여러나라 장로교선교부에서 왔지만 협력하여 전도했기 때문에 교파는 하나였고 신학교도 1908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로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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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설립 (1901)된 장로회신학교는 이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사진은 1908년에 건축된 초기 교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장로교가 1938년도에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고 그 이후 예배당안의 강대상 전면에 일본 우상신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먼저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끔찍한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악질목사들의 주도로 일본중이 주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의식을 한강이나 혹은 추운겨울에 바다에 나가 완전 나체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감리교파나 성결교, 카토릭은 등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섰기 때문에 뭐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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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선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가장 강력히 저항한 교파가 장로교파였는데 그 저항을 한 목사님은 약 천명 가까운 평양신학교 졸업생인 목사들중 겨우 20여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다수가 감옥에서 순교하고 일부가 살아서 해방후 출옥하였는데 이들을 “옥중성도”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 부릅니다. 약 20여 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전도사였던 분도 있고 여전도사도 몇분 있었습니다.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계신 분이 두어분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이분들을 이름을 아는 분이 0.01%나 제대로 될까요? 놀랍지요! 영양실조 기아로 여러분들이 줄줄이 순교하셨는데...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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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 평양)

-위 쪽에 더 고화질로 나와 생략-



해방후 신사참배에 나섰던 목사들은 참으로 면목이 없게 되었는데 나치에 협력했던 도이치 기독교단에 소속되었던 독일의 목사들은 종전후 3년간 목회를 안하고 자숙을 하고 그동안 나치치하에서 지하교회로 있었던 고백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일제에 아부하려고 신사참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혹은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끔찍한 고문을 받게한 목사들이 속을 못차리고 교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고 또 많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지지하여 주었으니 문제였습니다. 요사이 김홍도 목사 사건 때 교계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김목사를 지지하는 걸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기득권 즉 밥그릇을 놓칠까 바 혈안이 되어 그러는 겁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안을 제출하고 단2개월간의 자숙기간을 갖자고 하였는데 이것조차도 거부하고 1951년 그 출옥성도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려신학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출옥성도들은 경남출신들이 많아 신학교도 부산에 있는데 고려신학대학이 그것입니다.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교수를 교장으로 하여 1947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고려파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후 그들이 시무중인 예배당을 소송을 걸어서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출옥성도들은 두말 않고 내주고 나왔습니다. 이 교회당을 피땀흘려 가꿔온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을 버리고 빈손으로 출옥성도들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에 분개하여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친일파목사들의 총회에서 소송을 걸어서 10년간에 걸쳐서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제치고 예배당을 탈취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항거한 분을 지지하는 성도가 대다수였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고로 제2문창교회, 동광교회등 새교회를 세워 나기도 하고 다른교회로 옮기거나 하여 예배당은 결국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고신측 송상석목사의 소신대로 “교회건물은 교인의 총유”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분쟁시 문제가 없습니다. 숫자적으로 우세한 측이 처음부터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식으로라면 맨처음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교회는 출옥성도를 따라서 그 교회를 나온 교인이 90%가 넘었으므로 그 예배당은 출옥성도측 교인들의 것인셈입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차대전후 결성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도 참여하고 노선이 불분명하고 불교 마호멧교와도 짬뽕을 하려고 논의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48년인가 장로교가 아직 하나일 때 몇몇 정치목사들이 가서 무조건 가입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국장로교는 WCC 소속이 된 겁니다. 여기에 옥중성도측은 처음부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에는 국회에서 감리교목사이자 독립투사인 국회의원 이규갑(1887-1970, 충무공 이순신 9대손, 사모인 이애라도 독립투사)외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WCC를 용공이라고 성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 것이 전선에서는 공산군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장로교대표들은 방콕에서 열리는 WCC 총회에 공산당들과 같이 참석했거든요. 그리고 6.25 때도 공산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지금도 살아 있는 모모 목사가 대표들로 나서는둥 수백명의 기독교 인사들이 YMCA회관인가에 모여서 소위 “인민군환영대회”를 “김일성 장군... 운운” 하며 열었습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반대한 장로교총회측에서 김재준이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쳐 그에 반대하는 학생들 수십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항의 했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1952년 자유주의자들이 분리되어 기독교장로회 즉 기장교단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합니다. 여기에는 우두머리들이 주로 자유주의적인 캐나다 선교부가 맡아 선교한 함경도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재준 강원룡 조향록 등...



그때 김재준의 자유신학에 51명의 학생이 항거하였는데 일제말 설립된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전학의 이유는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좌경화 되기 전에 유학을 다녀온 박형룡박사가 만주의 봉천신학원으로부터 귀국하여 고려신학교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34명의 학생들 주요한 인물은 지금도 교계원로로 활동하고 있는 정규오, 김준곤, 박창환, 신복윤 등등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안에서는 50년대에 NAE라는 보수적인 복음주의동지회측에서 세력이 매우 컷습니다.. 그당시 총회장은 명신홍(일제말 칼빈신학교유학, 나중 합동), 한경직(친일경력), 전필순(친일행각으로 반민특위에까지 체포된 자) 목사 등이 하고 있었습니다.



위 기장을 포함한 당시 총회측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회개를 하기보다는 1938년의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한 결의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즉 원인무효시켰는데... 그리고 신사참배를 안했다면 취소가 가능합니다. 다 신사참배 하고서 회개를 안하고 가결시킨 옛날 것만 취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여러번에 걸쳐서 취소하고 또 취소하고 그랬습니다. 장난도 아니고 이거...



그런데 신사참배 회개를 거부한 자들이 무슨 보수 자유를 따지는 게 의미가 별로 있었는지 서로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NAE 측의 우두머리가 지금 ‘합동’에서 나온 ‘개혁’의 정규오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고문이 박형룡박사입니다. 박박사(평북)는 1897년생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기 직전에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1920년대부터 신학교육을 시작한 당시 최고 교수였습니다.



이 박형룡박사가 1947년 중반 고려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있다가 외국선교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신학교의 위치가 부산인 점 그런 것 때문에 서울로 가버리고 서울에서 전학온 34명 학생 전원은 박형룡박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불과 두어달 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실한 거지요.



박형룡박사도 해방후, 평북, 전주 집회 등에서 수차에 걸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때마다 목사들이 들고 일어나 반발하고 집회강사를 못하도록까지 저항하는 고로 회개 보다는 후진양성에 주력하자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1978년경 세상 뜨실 때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님의 말대로 “회개를 우선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WCC를 찬성하는 우두머리가 한경직 목사(1902-2000, 평북, 숭전, 좌경무렵의 프린스턴졸)이고 WCC 즉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측의 우두머리는 박형룡박사였습니다. 이 두사람이 직접 치열하게 싸운 것은 아니고 그 아래사람들이 붙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1958년경 신학교부지를 구입하려는데 박박사가 외국선교부의 원조금 3,000만환을 박호근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날려버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WCC 찬성측에서는 “이때다!” 하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한편 정규오목사(해방후 신학교 1회 졸업생)를 우두머리로 한 NAE측에서는 자신들의 고문이자 스승인 박형룡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WCC 찬성측을 뒤늦게 용공으로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기노회에서 총회에 보낼 총대를 뽑는데 이때 NAE측 목사들이 총대로 많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만 WCC측 한명이 누락되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유리하게 뽑혔으므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발표하면 될 것인데 그냥 넘어가서 이게 나중에 싸움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싸움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WCC에 찬성하는 파들(통합)은 저들끼리 따로 모여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도 있었던 친일파 전필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선교부들의 원조 등 때문에 목사들이 많이 쏠렸을 거는 당연합니다. 당시엔 태반의 사람들에겐 미국이 천당 가는 거였으니깐요. 기독교 학교 등 재산 등은 통합으로 남았지요. 평신도들은 합동측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한편 위기에 몰린 NAE측 목사들은 박형룡박사와 자기들도 한패가 되어 내쫓은 출옥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총회에서 축출한 것을 사과하고 하나로 합칠 것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출옥성도측에서는 자신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고 예배당까지 탈취한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쉽게 화해 할 일은 아니지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데 거절하면 교만하다는 비난을 모면키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고 한편 위기에 몰린 한국보수신학을 살려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게 되었습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촐옥성도측 즉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얘기가 점점 흥미 진진하게 전개 되는데...



NAE측과 고려측이 합하는 과정, 다시 분리하는 과정, 그후 전개 되는 상황, 그리고 1979년부터 시작된 합동측이 수십개로 분리되는 과정을 기술하자면 도저히 한두번에 끝내기는 힘들고 앞으로도 여러번 나누어 계속해야 할 것같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그치고 내일부터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나중에 위의 것을 다시 보충 정리하고 맨나중에 최후로 정리하여 한번에 시리즈로 올리겠습니다. 다운로드하여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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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선교위원회가 마련한 오찬에 참석한 교계지도자들(1960.2.18). 지금도 알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위 내용은 많은 교회사 책들을 참고로 하고 여기저기 오랜기간 읽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구두로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도 합했습니다. 자세히 쓴 교회사책이라도 한두권만 읽어서는 위같이 객관적 종합적으로 기술된 것을 찾기는 힘들것입니다.









위글을 가져오게 된 성경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이라는 게 물질입니까?)



에스겔 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현실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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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당하고도 말못하는 충격사연 심층취재**

사진첨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 당하고도 신고하는 율이 2% 정도밖에 안된다고 언론들에 보도된 바가 있다. 법정에 서는 것조차 수치스런 일이지만 그 재판 진행과정에서... 한국의 성폭행은 세계 1위라고 한다. 얼마나 썩은 나라인지 미국은 인구 10만명당 몸파는 여자가 23명인데 우리나라는 몸파는 여자가 무려 1백만명이 넘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몇 cm를... 몇분동안...” 하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 게 진행된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잡아 죽일 것같지만... 재판정에서서 호소하렵니까? 그렇게 “몇 cm를... 몇분동안...” 재판관에 호소하렵니까?



한국의 여성단체에 신고되는 여신도 성폭행 숫자는 엄청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단 1년만에 47건이 신고되었는데 실제 100배에 이르고... 교회의 특성상 모호하게 진행되는 점도 많고... 그런점을 감안하면 성가대원 50명 성폭행등 헤아릴수 없이 많이 여신도들이 교역자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근데 위와같이 당하고도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 모교수가 쓴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이란 책이 있다. 본문과 현장사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현재 한국교회 실정과 교단간 눈치보기 때문에 얼마나 솔직하게 쓰여있나 의심스러웠는데 예상보단 신랄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통합측과 한신대 즉 이른바 진보(내지는 자유)와 그 아류교단의 과거사를 상당부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먹사가 신사참배에 항거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들었고 어느 먹사가 주기철 목사의 노모 등 가족을 목사관에서 끌어내어 탈취했느냐는 등은 언급이 안되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못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이자들이 해방후 한국교회를 주름 잡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최고 지도자로 행세하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위 책의 점수를 매긴다면 한 70점이나 될까? 위 책에 비하여 성결교 소속의 이선교 목사님이 쓴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는 신랄하게 까발긴 점으로 보아 한 80점은 된다. 하기야 이선교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를 검찰청에 반란방조혐의로 고발하여 신문에 보도되고 한동안 그것 때문에 지하언론이 무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 두책이 최초라 할만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친일 친독재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부정 사기 협잡들을 노출시킨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예상보단 불과 몇 개월 사이에 4판까지 나온 것을 보아 그것도 반가운 일이고.





통합측이나 한신측 그리고 합동측에서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출옥성도 성자란자들이) 예배당 쟁탈전을 벌였다...” 즉 자세한 서술도 없이 무조건 소위 성자들이 세상 재산에 탐이 나서 혈안이 된 인간들이라고 하는식으로 매도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출옥성도측에서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 이 문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출옥성도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과 두말없이 피땀흘려 가꾼 교회를 내주고 나와 맨땅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배당을 내놓으라고 총회측(통합과 합동이 분리되기 전)에서 소송을 걸자 그걸 항거하는 성도들이 응소를 하여 장장 10년간에 걸쳐 대법원에까지 가서 판결이 난 것이다. 즉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이다. 그러면 위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은 교인들 90% 이상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니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이다.



사기꾼 먹사와 교회사가중 대부분인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즉 “하나님만이 누가 뭣이 옳은지 아신다”는 것이다. 미친넘들! 성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고 설교까지 하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알 것 아닌가? 일반계시인 양심으로도 판단 할 수가 있는 문제이고. 잘 몰랐다? 그럼 아래 태만의 죄에 해당한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리고 또하나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단순히 신사참배만 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친일하며 갖은 악행을 다하고 동족을 못살게 군 목사들에게 맞는 소리인가? 성경은 치리의 의무성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Y 신과대학 명예교수란 또라이 교회사가는 “그 말에는 반박못할 논리와 신학이 있다”고 하는데 그럼, 컨닝하다 걸린 신학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하고 반발한다면 어떡할 셈인가? 공적인 죄는 공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위에 대한 참고문은 다음 “몸버린시골처녀를” 클릭하며 자세한 것을 읽을 수 있다.



(3-2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자가 속한 교단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까지 체포된 바 있는 일경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추악한 악질 한국교회 지도자를 읽고 싶으면 아래 “치마를 벗고” 안에서 나오는 “최고악질”을 클릭하시면 자세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총회측(합동과 통합, 기장)이 출옥성도들을 독선주의자 분리주의자들로 매도하니 그것을 방어하기에 급급한데 과연 성경신학적으로 그게 옳은 태도인가? 자의적으로 분리했나 쫒겨남을 당한 것인가 하는 사실확인을 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론 아예 맞받어 쳐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실제 처음부터 그런 교단도 두 개나 있다.



아래를 “치마를 벗고” 클릭하면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3-1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왕따 당하는 게 두려웠던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말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하라”(잠 31:8)



당시 응소한 목사는 출옥성도는 아니고 해방후 출옥성도편에 선 1930년대에 한국교회에서 절제운동(주초문제)을 하던 송상석 목사(1897-1977)이다. 이분이 행정능력이 탁월하여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해방후 당시까지 만주봉천신학원에 머물던 한국보수신학계의 거성 박형룡박사(1897-1978)를 배를 전세내어 타고 만주에 가서 비밀리에 모셔온 분이다. 즉 오늘의 총신이 있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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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IP 192.241.172.x    작성일 2020년10월22일 12시20분      
1958년 장로교를 뒤흔든 3천만환 사건

사깃꾼 걸려 -신사참배 거부한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박형룡을 치리하려 들었는가?





3천만환 사건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4811

박형룡의 3000만환 사건을 다시 보다

WCC 논쟁 … 반세기 지나 되풀이 되는 갈등의 거울 삼아야




이범진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다루던지 긍정적으로 다루던 지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바’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은 -어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분열을 야기했다. 그러나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한 분열은 그의 믿는 바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었고, 최선의 방향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다는 데에서 그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믿음에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데에는 진정성이 보인다. ‘믿는 바’와 ‘행동’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유일한 ‘돌출’이 발견된다. 이른 바 3000만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의 ‘믿는 바’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룬다.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박형룡에게 있었던 3000만환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표현’과 ‘의미부여’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wcc 사건을 첨예하게 부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개인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다가 좌절한 단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살핌으로써,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는 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이른바 3000만환 사건

박형룡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이른바 3000만환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적인 평가를 하려는 이들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3』은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교장이던 박형룡은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다.(92쪽)



3000만환은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억원에 달한다.
한 학교의 교장이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3억 원을 ‘교섭비 명분’으로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은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58년 신학교 이사회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역사신학자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당시 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이신덕(1909-1994, 경성제대 법대)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박호근이었다. 박호근은 자신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기지 불하를 의뢰하고 총회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박교장의 결재를 받아 30,162,172환을 이사회의 승낙 없이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박호근이 사기를 친 것이었고, 그것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박용규는 3000만환 사건을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사기’를 친 박호근이라는 사람과, 그를 소개한 박래승과 이신덕의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순수함’은 이 사건에서 객체로 남고, ‘사기꾼’ 박호근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이 들었을 그 ‘말’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사회도 모르게, ‘3억원’을 지불하도록 결재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말이다.



이에 대해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는 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장로 직함을 가진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교장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부지 불하, 건축허가, 학교의 대학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였다.(364쪽)



‘허풍을 떨면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숭의학교 교장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1953년 4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은 그녀에게 ‘사기꾼’ 박호근은 실력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형룡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은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은’ 그는 박호근에게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명목으로 불과 두달 만에 3000만환을 지불했다. 오늘 날 3억에 달하는 이 돈이 두 달만에 사라졌다.



물론 결과는 대지 불하, 건축 허가, 대학 인가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호근은 그 돈을 접대비, 교섭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받았다. 그 당시에 그가 대지 불하 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었다. 사용목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방법은 분명 불법적인 경로였다.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김인서,『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23-25쪽)



결과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박호근 자신도 그가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 방식을 박형룡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기’를 진행하는 데에 돈을 지불한 그 자신도 공범이 되어야 맞다. 아니면 불법적 방법은 그렇다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니 ‘사기’라는 말인가?



그런데 박호근의 반응이 흥미롭다. 보통의 다른 사기꾼들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형룡 박사를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결국 김인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 나가 심문 당하고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으면, 이 문제를 3억원대 ‘사기’와 맞바꾸어야 했을까? 1만 달러는 우리가 본 ‘3000만환’에 포함된 돈으로 보인다(3000만환중에서, 미국에서 온 ‘1만불’(8,800,000환)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북장로교 측 3,000불(2,500,000환), 특별비(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 30,162,172환이었다).



미국에서 온 1만불의 불법적 환전을 지시(실행)할 정도로 박형룡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체가 된 이 사건이 밝혀지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배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앞서 박용규가 주장한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적확한 평가를 덮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변화를 가져온, 세속적 사건



이러한 사건 정황에 빗대어 봤을 때, 박형룡의 사표 수리가 이루어진 1958년 3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충격적이다. 사표 건에 대해서 이사 38명중 20명이 찬성을 하고, 17명이 반대를 한 것이다(1명 기권). 적어도 17명은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이 계속 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사회가 “그것이 고의가 아닌 사기”라는 점을 감안해 “교장사표는 반려하고 대신 불법 지출한 삼천만환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파동 주택(당시 시가 800만환)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했을 때 박형룡의 측근들은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태의 매각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실책을 범한 박형룡을 끌어안은 이유는, 그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을 밀어내려고 하는 세력은 결국 보수, 정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장로교의 자유, 진보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설득전을 펴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를 들고 나왔다.(<기독공보>, 1959.10.5) ‘세속적’ 문제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이를 두고 이영헌은 『한국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면서도 박형룡 박사의 인책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323쪽)



물론, 박용규는 이를 부정한다. 3천만원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측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갈등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박형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동민의 생각은 좀 다르다. 3천만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전의 박형룡은 wcc에 대해서 부드러운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온건한 반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사기를 당한’ 이후에는 급격히 강경해졌다며, 신신학과 단일교회의 두 가지가 쟁점이었는데 ‘용공주의’ 하나가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글(『현대신학비평』제12장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 1972)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3천만환 사건이 있기 전 1958년 3월에 썼던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통일에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교리 무관심주의로 인하여 결국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변해가며, 심지어 이교도까지도 허용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의 글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되는 성명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wcc의 용공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81쪽)



그의 신학적 변화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3천만환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세속적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한 신학’으로 향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wcc논쟁을 보다



사회학자 노치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세속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 분열 현상은 세속화의 추세와 밀접하다는 주장이다. 즉 세속화의 추세에 대한 수용과 저항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고 말이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도, wcc를 지지하는 측은 세속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측은 세속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노치준은 wcc운동이 세속화의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세속화에 대해서 피터버거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요약하면, 제도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인간 의식의 측면에서 이 영역들이 교회의 통제, 권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박형룡은 1976년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아들 박아론의 글이 총신대 학장과 교수진에 의하여 거절된 사실을 접하고 “총신대학의 좌경화의 뚜렷한 징조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세속화를 거부했던 박형룡은, 박호근이 추진했던 세속적인-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역으로 그의 ‘믿는 바’ 신학마저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신학의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갔던, 큰 신학자 박형룡의 생애에 돌출 된 부분으로 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wcc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신학적 영역에서 보기 보다는, 지역적, 역사적, 당파적 영역에서 보아야 그 첨예하고 해묵은 갈등이 바로 보일 것이다. 해법은 물론, 그 안에 있다.







http://reformednews.co.kr/921

통합측과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총회신학교(박형룡 박사) 3천만환 재정 사고와 그를 이용한 음모

소재열 | 기사입력 2009/08/09 [12:58]



금년 2009년 9월에 소집될 제9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통합측과 분열된지 꼭 5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리폼드뉴스>는 기획연재 시리즈로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왜, 무엇 때문에 분열했는지,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입장에서 연재한다. 본 연재는 소재열 목사가 집필하여 곧 출간하게 될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의 일부 내용을 요약해서 연재하게 된다(리폼드뉴스 편집부).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1) 사건을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과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반대로 합동측에서는 3천만환 사건을 이용한 W.C.C.측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이미 총회 안에서는 W.C.C.와 NAE라는 두 세력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대립의 씨앗이 발아 되어 갈등관계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갈등과 대립은 이미 1959년 제44회 분열 총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통합측에서는 박형룡 박사 3천만환 부정지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본다.2) 이러한 시각이 W.C.C.을 지지하는 통합측의 시각이라고 한다면 W.C.C.의 신학적인 문제로 반대했던 합동측에서는 W.C.C. 운동과 그 신학을 은폐하기 위하여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을 걸고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3)



이 같은 두 대립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논리이며 분열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확보하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이 분열의 책임을 논할 때에는 양측이 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분열이후 정통성이 자신들의 총회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리한 입장에서 설명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역사는 주관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필자는 어느 한쪽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그 시대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신학적 배경을 살펴서 과거 치열했던 분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교훈 받게 될 것인지 추적하게 될 것이다.



통합측에서는 지나치리만큼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박형룡 박사 3천만환 사건으로 전개한다.4) 민경배 교수는 “분열의 기원이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 기금 유용에서 유래된 교장 사임과 관계가 있고 더욱이 에큐메니칼의 중상이라는 박형룡 일파의 소행에서 결국 왔다고 한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5)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에게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진현 목사의 말대로 역사를 그렇게 창작하면 안 된다.6)



조동진 박사는 ‘총회신학교 건축기금의 실체와 그 오용(誤用)에 관한 진상’에 있어서 그 헌금이 어떻게 박형룡 박사에게 전해졌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불법으로 지출했다는 신학교 건축기금 3천만 환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의 장로로 미국의 대 은행금용기업가가 개인적으로 친구로서 교장 박형룡에게 보낸 1만 달러 개인수표와 별도로 공식으로 보내진 10만 달러 중에서 지출한 것이었다. 제 십장로교회 장로의 이 특별헌금은 본래는 미국장로교회 총회의 세속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불신하는 제 십장로교회의 미국 은행금융가의 거물 장로가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통해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헌금하기를 원하여 준비된 돈이었다.



1956년 “한국NAE” 총무였던 필자는 WEF 총무 엘윈 라이트(Elwin Wright)로부터 이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헌금자는 자기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면서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신학교 교육기금의 제1차 헌금액이 10만 달러였다. 필자는 이 신학기금이 한 교파의 신학교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보다는〈한국복음주의신학교 육재단〉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수령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이 재단기금으로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수의 봉급 지원과 교수 양성 장학금과 건전한 신학 교재의 출판과 세계 수준의 신학도서관을 설립하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WEF 총무에게 보냈다.



그러나 WEF 국제총무의 견해는 달랐다. “이 돈이 장로교 장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신학교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신학자인 박형룡 교장을 믿고 그에게 보내자”는 것이었다. 필자는 신학교의 미국장로교회와의 관계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적극 만류하였지만 필자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헌금이 교장 박형룡을 통하여 총회신학교에 보내어진 것이다. 제 십장로교회는 끝까지 연합장로교회가 속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는 탈퇴하여 지금은 70년대 후반부터 PCA 장로교회 총회에 속하여 있다.”7)



요약한다면, 그 특별헌금은 교장 박형룡의 총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지 그를 축출한 미국연합장로교회 산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에 보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장 박형룡이 남산에 있는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하여 3천만 환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지불한 것은 행정상 과오이기는 하지만 그 지불의 결과로 대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 불하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부터의 헌금이 선교부를 통하지 않고 교장 박형룡이 수령한 것부터 문제를 삼고자 했던 선교부로서는 그것을 교장 박형룡 축출을 위한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교장의 행정적 실수를 구실로 박형룡을 추방하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는 새 교장을 세운 연합장로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책에 합치된 신학교로 개편하자는 것이 그들의 본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박형룡 박사의 진술서를 총회신학교 재정조사위원회의 보고서로 채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번 이 사건에 대하여 본인의 불민한 관계로 여러분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어 대단 히 미안하다고 전제한 후, 박호근을 소개받은 것은 숭의여중 교장 이신덕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같은 남산에 소재하고 있는 숭의학교의 기지 불하 관계를 알선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믿고 총회신학교에 쓰라고 온 돈 10,OOO불(환액 8,8OO,OOO 환), 북장로 선교부에서 5,OOO불(2,500,OOO환), 특별비 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 산액 중 13,807,042환, 1958 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계 30,162,172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금번 사건을 추진 중 일부 이사는 격려로써 속히 추진시키라고 말씀한분도계셨으나, 본래 경리관계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 큰 사기꾼인 박호근을 만나게 되어 이 같은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됨은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다.



이 모든 지출관계는 총무처장 박내승 목사와 의논하여 지출된 것이므로 박호근을 사기죄로 징역 보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줄 아오나, 우리 신학교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고 미국서 온 돈 10,OOO불도 학교에 쓰라고 온 돈이므로 내 친구로부터 내게 보내 왔으나 응당 학교에서 쓸 돈이라 경상비에서 임시로 17,973,742환을 유용한 것은 우선 이 사건을 속히 결정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후일 북장로회 선교부에 보조를 얻어 충당하려고 생각하고 지불한 것인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처럼 실패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다.”8)



총회에 보고 된 이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박형룡 교장께서 교장직을 사임하셨음으로 이를 수리하였사오며”라고 기록하였고 “후임 교장이 선출된 때까지 교장 대리는 총회장으로 하되 이사장이 협동케 하였사오며”9)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형룡 박사 사표수리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바쳐 온 박형룡 박사의 사표가 이사회에 의하여 수리되었다. 이사회 전체 회의는 3월 10일 오후 3시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회되어 8일 오전 1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교장 사표수리는 7일 밤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다(밤 회의는 인톤 선교사 집에서 열림). 회의는 이사장 인톤 선교사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참석 이사는 42명 중 38명이고 가 부 투표에서 20:17 기권 1표로 수리되었다 한다.



동 회의에서 교장 사표수리에 대한 결정에서



① 1958년 3월 7일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대전제일교회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은 총 38표 중 가 20, 부 17, 기권 1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과장 박내승 씨도 역시 가 30, 부 7, 기권 1로사표가 수리되었다.



② 1958년 3월 8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장 인선위원 9인을 선임키로 하고 선교회 3인, 이사회 3인, 실행이사회 3인을 결정하기로 하고 후임 선정위원으로 선교사 대표 인톤 감부열 감의도 실행이사 대표 전필순(미참 경우에 노진현) 김윤찬, 김재석, 전체 이사 대표 이승길, 김형모, 김석진 9인을 선정하였다.



③ 후임자가 선정될 때까지 박 박사가 계속 집무할 것



모 이사는 회의 경과를 설명하면서 교장서리를 권세열 교감으로 추천하는 동의 제청이 있었으나, 총회 결의를 상기시키면서(초대 교장엔 선교사도 무방이나 2대 교장 이하는 한국인으로 할 것) 총회 결의가 번복되기 전에는 될 수 없다고 하여 선교사가 교장 사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며 한편 후임자 결정에는 전체 이사회의에서 2/3의 표를 획득하여야 하며 총회(금년 총회는 금년 9월에 회집 됨)에서 인준을 받아야 정식으로 교장으로 취임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제3대 교장취임은 일러도 10월 초순에야 가능.

한편 사무처장 박래승 목사의 후임은 4월 11일에 회집할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 하며, 총회 인준 여부에는 관계가 없다 한다.10)



제43회 총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교장직 사표를 내고 명예교수로 있도록 하면서 교장서리에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학교의 내무는 계일승 목사로 담당케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그 후 신학교에서 물러나서 쉬었고 그가 가르치던 조직신학은 김규당 목사가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단 3천만 환 사건은 수습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제43회 총회는 신학교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조직케 하였다. 이를 위해 1959년 1월 20일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새로 조직되는 이사회가 모였다.11) 안광국 목사는 NCC측 인사로서 그가 집필한 「장로회신학대학 70년사」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NAE측은 신학교 3천만환 사건을 무마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재임케 하기 위하여 실행이사를 유리하게 선임코자 했다. 저희들의 비밀히 추천한 실행이사는 다음과 같다. 이환수, 정선득, 양화석, 송암석, 나기환, 노진현, 정일영, 황병혁, 김수영, 전제영, 김윤찬, 황득환, 김치선 등이었고 이사장으로 보이열 목사를 내세웠다. 그러나 막상 당선된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 안두화, 부 : 김석진

서기 : 안광국, 회계 : 위두찬

실행이사 : 안두화, 김석진, 권세열, 양화석, 보이열, 김재철, 노진현, 계창봉, 이환수, 김재석, 위두찬, 김윤식, 안광국, 황병혁



이상 14인 중 이환수, 노진현, 양화석, 김재석 외에는 다 탈락이 되고 말았음으로 이사회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는 어렵게 되었고, 저희는 박형룡 박사의 구명운동이 실패함을 느꼈다.”



이렇게 역전 되기까지 NCC측의 안광국, 위두찬, 김성칠, 김석진, 나기환 등은 온양에서 모여 구수밀의를 하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진두 지휘한 결과 40:17이란 차이로 승리하였다.12)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교장 사표수리는 총 투표수 38표 중 가 20표, 부 17표, 기권 1표의 근소한 차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총무처장 박내성의 사표는 압도적인 가표로 가결되었고,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열리기 전에 신학교 이사회는 회합을 갖고 후임 교장을 선출키 위하여 투표에 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명되었다.



교장 지명투표 - 게일승 19표, 명신홍 17표, 기권 2표

교장 선거투표 - 계승일 가 18표 부 19표 기권 1표



교장 선임에 실패한 이사회는 다시 인선위원 7인을 선정하였다. 안두화, 김석진, 노진현, 권연호, 김재석, 안광국, 김윤찬. 그러나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시비로 인하여 비상정회가 되자 교장선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이것이 분열 전의 마지막 이사회였다.13)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으로 처음에 준비한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였다.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지도 과정에서 본 논문은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논문을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이 더 권위있는 논문이 될 것이라는 교수님의 지도에 순종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장로교회 분열사>가 탄생되었다. 본 논문은 공적 문서를 기준으로 신국판 500여 페이지로 준비된 논문이다. 곧 출판된다.









치마를 벗고 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오늘의 사태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이 되어야 한다...



[7/7] 눈팅1 IP 121.254.16.x 작성일 2009년1월11일 09시49분

제가 써프에 자주 들어와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님의 글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자료 첨가해서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그 노고와 정성에 감사드리며....



귀하가 서프라이즈에 올리는 기독교 신사참배 문제와 여러 목사들의 죄악상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서프에서 귀하가 올린 글만 수십차례(우연히 클릭)해서 읽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님이 이상한 글을 올리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정독한 결과 내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나는 교인인데 평소에 교회의 죄악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고 신사참배 건도 문제가 있는 것만 피상적으로 알았지, 귀하가 올린 내용처럼 그렇게 파렴치하고 인간쓰레기 백정짓이 해방 후에 자행됐는지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노하였습니다.



나는 귀하의 글 애독자가 되었는데 서프에 들어와서 귀하의 글을 어떻게 찾냐면 자극적인(?) 제목을 우연히 클릭하면 귀하의 반가운 글이 있고, 예전에는 귀하가 ★▶ 이런 찐한 별표, 화살표 문양을 제목에 넣어서 제가 얼른 알아차리고 클릭해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서프에 와서도 시간을 많이 쓸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글이나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귀하의 글을 찾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튼 앞으로도 잘 읽겠습니다. 부디 귀하의 글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직 귀하가 링크한 파일은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클릭해서 다운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내 조심성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어떤 경건한 개혁목사이자 신학자는 당시의 썩어빠진 사이비 목사들을 향해 "잡종 성직자" "우상의 목자" "바벨을 사랑하는 자"라고 격하게 비판하였더군요. 나는 이 말이 오늘의 많은 사이비 목사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진실하게 믿어보고 이웃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부족한 저에게는 한국교회의 과거 어두운 역사와 현재 많은 목사들의 더러운 행태를 알려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그럼...





출옥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신사참배 찬성파들이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면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예측 대비할 수 있고, 잘못된 미래를 막기 위한 예방 효과를 갖는다. -김두식 교수





아래가 어느 분이 여러해전 "성경 다음으로 보관 하겠습니다!!"라고 댓글을 올린 글



치마를 벗고◆정조를 스스로 내주는




수치의 순간



◆강조점들을 컬러처리하여 기억하기에 좋게 만들었사오니 저장해 두시어 여기저기 게시판들에 푸기 등 많은 이용바랍니다. 서문은 맨뒤로 옮겼습니다.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숫처녀가★갈보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났습메

한국교회는 이 공적인 불경건 죄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교단적으로 회개를 한적이 없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교 총회가 일본 우상에 절하는 것에 찬성을 가결하였는데 여기에 맹렬히 반대한 소수의 목사님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평양의 주기철 목사(1897-1944, 경남)는 양들에게 부담이 된다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남출신인 한상동 목사(1901-1976)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이고 다녔다



한상동 목사(평신, 고려파 총수, 고신대학장)

그리고 만주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메이쳔파 선교사인 한부선 선교사(1903-1992년, 나중 고려파에 가담)가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2차대전 발발후 귀국보다는 감옥행을 택하였다가 나중 포로교환 때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항거하던 지도자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옥중 교인들의 특별기도회의 결과 1946년 9월 20일 개교했다. 고려학교를 설립한 후 앞줄 왼쪽부터 한부선, 주남선, 박윤선, 한상동. ⓒKPM



이러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닌 목사, 전도사들의 숫자는 많지는 않다. 현재 충현교회 원로 목사인 김창인 목사의 경우는 반대하다가 만주로 도망을 가서 신앙적인 정조는 지킨 셈이다. 신학교는 1950년대 말에 가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고 있는 바는 목사는 당연히 이러한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에스겔 3 :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에스겔 3 :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일본우상에 절하는 것에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순교자의 수는 약 50명이고 고문과 옥중기아와 추위(영하 40도)를 견디어내고 출옥한 성도들의 숫자는 20여명이다. 그래서 이들을 “옥중성도(獄中聖徒)”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고 부른다.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출옥성도들, 유명한 사진인데 구하기 힘든 고화질 저장바람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다.)



해방이 되자 일본우상에 절한 목사들은 면목을 잃게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옥중성도들은 배도한 한국교회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2천명 정도 되는 장로교 목사들은 자신들의 생명줄을 끊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이에 대하여 반발하고 저항을 하게 되었다. 출옥성도들이 제출한 회개법안이란 것은 단 2개월의 자숙기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반발 한 것이다. 만주로부터 귀국한 평신교수였던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졸업, 평신, 고신초대교장, 총신 교수 역임)가 수양회 도중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자 다음날부터 강사자격을 박탈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프린스턴, 평신교수, 고신교장, 총신교수)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습격되어 구타 고문 당한 후 해산된 것같은 현상이 한국교회 내에서 벌어진 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3년동안 목회를 못하고 그 동안에 지하에 있던 목사들이 교회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아마도 99.9%가 넘는 양떼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고 있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편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50대의 목사들조차도 자세한 얘기는 거의 모른다. 아니, 아예 관심 대상조차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식(歷史意識)의 결여(缺如)를 볼 수 있고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가 있는 것이다.



1951년에 6.25중 부산에서 장로교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배도한 목사들이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제명해 버렸다. 그리고 시무중인 예배당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요새 어느 토론장에 어떤 분이 “■나성한인교회 속보” 하고 올려놓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질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출옥성도중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상동 목사는 저항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대부분의 성도들 약 4백명과 예배당을 내주고 나와 맨땅 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때 초량교회를 접수한 목사가 년전에 세상을 뜬 1958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한 노진현목사이다. 당시 초량교회에 남아서 예배당을 차지한 교인들 수는 구영기 목사, 양성봉장로 등 20명 정도이다.



위에서 구영기 목사는 예배당을 내주고 나온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스스로 말하기를, 인간취급을 못 받았고 경남지사로 이승만 박사의 총애를 받던 양성봉 장로는 훗날 60년대에 세상을 뜰 때 당시의 잘못을 회개(悔改)하고 한상동 목사를 불러다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 탈취한 당시 장로교 총회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출옥성도는 내주고 나왔으나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교회는 그렇게 탈취가 용이하지 않았다. 피땀 흘려 세운 예배당을 쉽게 내주리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약신 목사(1952년 고려파 1대 총노회장, 이효재 교수 부친)등이 시무하던 교회 등은 탈취할 틈새가 없어서 탈취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총회측(당시에는 합동과 통합측이 나뉘기 전)에서는 법정에 소송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총회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교회 내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고소할 것을 금지하는 유명(有名)한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6 : 1-7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위 총회측의 “법정 고소”에 대하여 “응소”한 분이 1930년대 한국교회에서 주초문제 등 절제운동을 하기도 한 절제운동가 송상석 목사(1897-1978)이다. 그래서 장장 10여년 세월에 걸쳐서 대법원에까지 올라가는 법정 공방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송상석 목사(1896-1980, 고신의 행정지도자, 속칭 ‘부곡사단’ 총수)

총회측에서 출옥성도측을 고소한 이유는



☆ 재산이 탐나고 또 교인 이탈을 막고자 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다음과 속셈이 있었다.



☆ 즉 “출옥성도라는 사람들이 뭘 세상 재산에 관심을 갖느냐?”는 식으로 망신을 주고자 하는 비열한 계산.



☆ 또 고소한 인간보다는 고소를 당하는 쪽이 시달린다는 것을 이용하고자 아는 속셈과



☆ 고려파 내부를 흔들어 놓고자 하는 교활한 착상.



아닌 게 아니라 우선 고려파 내부에서 논란이 심하게 일게 되었다. 즉 박윤선 교수가 응소를 극력 반대하여 송상석 목사와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박윤선 교수(1905-1988, 평북 철산, 고신교장, 총신교장, 합신교장)

박윤선 교수는 앞서의 ‘고린도 전서 6장’을 들어 여기에 위배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덕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하였고 이에 항거하는 송상석 목사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고소한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응소한 것이다.



* 위 구절은 같은 형제간의 문제이다. 갈려져서 서로 “치리기관”이 다르니 총회측과 고려파측이 서로 잘못이 있을 때 내부적인 치리를 할 수 없으므로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송상석 목사의 10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의 항거는 실로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런데 1960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갈릴 때 합동측 목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과거 출옥성도들을 쫓아낸 것을 사과하고 하나가 되자 했을 때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한국 보수신앙의 위기였기 때문에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내세우고 합동하게 되었다. 이때 합동총회의 사회를 본 분이 바로 송상석 목사이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총회장을 한상동 목사가 연임했으니 처음 약속과 달리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방적으로 나가므로 부득이 다시 분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한상동 목사의 1962년 ‘복교선언’이다. 이때 경남노회 소속의 고신측 교회는 송상석 목사의 탁월한 행정력에 힘입어 거의 다 환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로 이북출신의 목사님들로서 고려파에 가담했던 분들은 환원하지 않고 합동측 교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주요한 분들은 나중에 1980년대에 합동측의 총회장을 역임한 세사람 김창인, 최훈, 김현중 목사(2001년 소천)등이다. 이 세사람은 모두 신학교는 1950년대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면 그 대법원까지 올라간 “예배당 양도 소송”의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1965년 판결은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응소한 처음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의 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응소항전이 계속 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로(출옥성도 지지측이 예배를 못 드리게 막거나 시간을 갈라서 예배를 보게된 일) 많은 교인들이 여러 교회를 만들어 나가거나 이웃 다른 교파의 교회로 옮기거나 하게 되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교인들 알박기 등 그래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숫자가 적으므로 예배당은 통합측에 내주고 교육관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응소에 반대하는 박윤선 교수는 고려파 탈퇴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3. 결언



위같은 이러한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난후 교회간에 분쟁이 있을 때 처리는 쉬워지게 되었다. 즉 송상석 목사의 소신이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나중에 심판하실 것인가? 여러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의 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신자들은 앞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다면 어떡할 것인가?



* 고소를 한 총회측 목사들이 잘한 것인지?

* 응소한 송상석 목사도 잘 한 것인지?

*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가 잘 한 것인지?



한상동 목사가 잘했고 송상석 목사 박윤선 목사도 각각 잘 한 것인가?

대법원에까지 가서 예배당 탈취에 성공한 총회측 목사들이 “승리(勝利)의 기쁨”을 누렸으니 신나는 일인가?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목사의 처신은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바 있지만 ▼“사람이 패거리를 이루어 환장을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게시판에 들르는 여러분들은 각별히 이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 탈취하고 천당 안가기로 작정한 다음이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회개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게 아닌 다음에야 기독신문 주필인 한명수 목사의 다음 말을 빌어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한경직 목사님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한 목사님께서 63빌딩에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실 때, 신사참배에 대해 자숙한다고 해서 상당히 그 자리가 엄숙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투옥되고 순교한 사람들 앞에 해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멘~~~~~~~~~~~~~~▶









사진첨부 추악한 한국장로교회사

내일의 교훈



사진 & 추악한 한국장로교사




『종교는 공적 영역에서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만석 간사--(맨 뒤 추가 설명)





●한국장로교의 추악한 역사를 밝힌다●



* 성경에 더러운 얘기는 감추고 기술이 안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다 모두 기술했지요. 그러한 추악한 얘기들을 왜 읽습니까? 후세에 교훈을 삼았지요! 과거에 눈감으면 현재에도 봉사가 됩니다.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오늘 바로잡지 아니하면 밝은 내일은 없습니다.



* 다른 교파들은 더 했으면 더해서 아예 바르게 살아보자는 분들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오해는 마십시오.



*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아직도 장로교 각교단들이 교단적으로 회개 선언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언한 것은 있습니다.(●부록1) 맨뒤에 붙입니다. 회개할 때까지 회개를 촉구하는 게 성경적이며 이제 사회가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때입니다.(●부록2) 건전한 상식부텀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RE;[질문]합동.통합.... : 아주 자세한 설명 1



* 계속 주요 내용을 추가 개정하고 있으니 참고 하실 분은 다운로드 해놓으시면 좋습니다. 성경공부 백번 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가치가 훨씬 더 있습니다.





맑은 새벽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곳의 글을 읽다가 보니 기독교에 '합동' , '통합'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건 장로교나 침례교와같은 교파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 미국이나 외국에도 합동파, 통합파등이 있나요?



기독교에도 종류가 많은것 같아 헷갈리네요? 잘 알고 있는 분 계시면 간단한 설명 부탁합니다.



안녕히...



[ 김 형석 : ]





자세한 설명: 우선 쓴 것을 올리고 몇시간후 나머지 부분들을 올리겠습니다. 우선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장로교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도적인 교파로 전개신교인의 70% 정도를 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242개 장로교 교단들이 있습니다.



해방전까지는 장로교파는 한 개였습니다. 미국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등 여러나라 장로교선교부에서 왔지만 협력하여 전도했기 때문에 교파는 하나였고 신학교도 1908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로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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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설립 (1901)된 장로회신학교는 이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사진은 1908년에 건축된 초기 교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장로교가 1938년도에 교단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고 그 이후 예배당안의 강대상 전면에 일본 우상신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먼저 절하고 예배를 드리는 끔찍한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악질목사들의 주도로 일본중이 주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의식을 한강이나 혹은 추운겨울에 바다에 나가 완전 나체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감리교파나 성결교, 카토릭은 등은 자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섰기 때문에 뭐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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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선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가장 강력히 저항한 교파가 장로교파였는데 그 저항을 한 목사님은 약 천명 가까운 평양신학교 졸업생인 목사들중 겨우 20여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다수가 감옥에서 순교하고 일부가 살아서 해방후 출옥하였는데 이들을 “옥중성도” 혹은 “출옥성도(出獄聖徒)”라 부릅니다. 약 20여 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전도사였던 분도 있고 여전도사도 몇분 있었습니다.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계신 분이 두어분 됩니다. 한국 교인들은 이분들을 이름을 아는 분이 0.01%나 제대로 될까요? 놀랍지요! 영양실조 기아로 여러분들이 줄줄이 순교하셨는데...



출옥성도중 주요인물은 한상동 목사(1901-1976, 사진에서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손양원 목사(1902-1950), 주남선 목사(1893-1950), 이인재 목사(1908-1999, 미국), 조수옥 권사(2001년 현재도 마산에 생존, 사진에서 뒷줄 맨왼쪽)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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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 평양)

-위 쪽에 더 고화질로 나와 생략-



해방후 신사참배에 나섰던 목사들은 참으로 면목이 없게 되었는데 나치에 협력했던 도이치 기독교단에 소속되었던 독일의 목사들은 종전후 3년간 목회를 안하고 자숙을 하고 그동안 나치치하에서 지하교회로 있었던 고백교회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일제에 아부하려고 신사참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혹은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일경에 밀고하여 끔찍한 고문을 받게한 목사들이 속을 못차리고 교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였고 또 많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지지하여 주었으니 문제였습니다. 요사이 김홍도 목사 사건 때 교계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김목사를 지지하는 걸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기득권 즉 밥그릇을 놓칠까 바 혈안이 되어 그러는 겁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안을 제출하고 단2개월간의 자숙기간을 갖자고 하였는데 이것조차도 거부하고 1951년 그 출옥성도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려신학파가 생긴 것입니다. 이 출옥성도들은 경남출신들이 많아 신학교도 부산에 있는데 고려신학대학이 그것입니다.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교수를 교장으로 하여 1947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어 고려파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후 그들이 시무중인 예배당을 소송을 걸어서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출옥성도들은 두말 않고 내주고 나왔습니다. 이 교회당을 피땀흘려 가꿔온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예배당을 버리고 빈손으로 출옥성도들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에 분개하여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친일파목사들의 총회에서 소송을 걸어서 10년간에 걸쳐서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제치고 예배당을 탈취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항거한 분을 지지하는 성도가 대다수였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운고로 제2문창교회, 동광교회등 새교회를 세워 나기도 하고 다른교회로 옮기거나 하여 예배당은 결국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고신측 송상석목사의 소신대로 “교회건물은 교인의 총유”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분쟁시 문제가 없습니다. 숫자적으로 우세한 측이 처음부터 소유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식으로라면 맨처음 예배당을 서슴없이 내주고 나온 교회는 출옥성도를 따라서 그 교회를 나온 교인이 90%가 넘었으므로 그 예배당은 출옥성도측 교인들의 것인셈입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차대전후 결성 되었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도 참여하고 노선이 불분명하고 불교 마호멧교와도 짬뽕을 하려고 논의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48년인가 장로교가 아직 하나일 때 몇몇 정치목사들이 가서 무조건 가입시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국장로교는 WCC 소속이 된 겁니다. 여기에 옥중성도측은 처음부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에는 국회에서 감리교목사이자 독립투사인 국회의원 이규갑(1887-1970, 충무공 이순신 9대손, 사모인 이애라도 독립투사)외 22명의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WCC를 용공이라고 성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 것이 전선에서는 공산군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장로교대표들은 방콕에서 열리는 WCC 총회에 공산당들과 같이 참석했거든요. 그리고 6.25 때도 공산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지금도 살아 있는 모모 목사가 대표들로 나서는둥 수백명의 기독교 인사들이 YMCA회관인가에 모여서 소위 “인민군환영대회”를 “김일성 장군... 운운” 하며 열었습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반대한 장로교총회측에서 김재준이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쳐 그에 반대하는 학생들 수십명이 총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항의 했는데 그러다가 마침내 1952년 자유주의자들이 분리되어 기독교장로회 즉 기장교단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합니다. 여기에는 우두머리들이 주로 자유주의적인 캐나다 선교부가 맡아 선교한 함경도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재준 강원룡 조향록 등...



그때 김재준의 자유신학에 51명의 학생이 항거하였는데 일제말 설립된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전학의 이유는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프린스턴신학교가 1929년 좌경화 되기 전에 유학을 다녀온 박형룡박사가 만주의 봉천신학원으로부터 귀국하여 고려신학교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34명의 학생들 주요한 인물은 지금도 교계원로로 활동하고 있는 정규오, 김준곤, 박창환, 신복윤 등등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총회안에서는 50년대에 NAE라는 보수적인 복음주의동지회측에서 세력이 매우 컷습니다.. 그당시 총회장은 명신홍(일제말 칼빈신학교유학, 나중 합동), 한경직(친일경력), 전필순(친일행각으로 반민특위에까지 체포된 자) 목사 등이 하고 있었습니다.



위 기장을 포함한 당시 총회측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회개를 하기보다는 1938년의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한 결의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즉 원인무효시켰는데... 그리고 신사참배를 안했다면 취소가 가능합니다. 다 신사참배 하고서 회개를 안하고 가결시킨 옛날 것만 취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도 여러번에 걸쳐서 취소하고 또 취소하고 그랬습니다. 장난도 아니고 이거...



그런데 신사참배 회개를 거부한 자들이 무슨 보수 자유를 따지는 게 의미가 별로 있었는지 서로 긴장관계에 있었는데... NAE 측의 우두머리가 지금 ‘합동’에서 나온 ‘개혁’의 정규오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고문이 박형룡박사입니다. 박박사(평북)는 1897년생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가 좌경화되기 직전에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서 1920년대부터 신학교육을 시작한 당시 최고 교수였습니다.



이 박형룡박사가 1947년 중반 고려신학교 초대교장으로 있다가 외국선교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신학교의 위치가 부산인 점 그런 것 때문에 서울로 가버리고 서울에서 전학온 34명 학생 전원은 박형룡박사를 따라 서울로 가서 불과 두어달 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실한 거지요.



박형룡박사도 해방후, 평북, 전주 집회 등에서 수차에 걸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때마다 목사들이 들고 일어나 반발하고 집회강사를 못하도록까지 저항하는 고로 회개 보다는 후진양성에 주력하자고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1978년경 세상 뜨실 때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님의 말대로 “회개를 우선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WCC를 찬성하는 우두머리가 한경직 목사(1902-2000, 평북, 숭전, 좌경무렵의 프린스턴졸)이고 WCC 즉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는 측의 우두머리는 박형룡박사였습니다. 이 두사람이 직접 치열하게 싸운 것은 아니고 그 아래사람들이 붙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1958년경 신학교부지를 구입하려는데 박박사가 외국선교부의 원조금 3,000만환을 박호근이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날려버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WCC 찬성측에서는 “이때다!” 하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한편 정규오목사(해방후 신학교 1회 졸업생)를 우두머리로 한 NAE측에서는 자신들의 고문이자 스승인 박형룡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WCC 찬성측을 뒤늦게 용공으로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기노회에서 총회에 보낼 총대를 뽑는데 이때 NAE측 목사들이 총대로 많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만 WCC측 한명이 누락되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유리하게 뽑혔으므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발표하면 될 것인데 그냥 넘어가서 이게 나중에 싸움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싸움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WCC에 찬성하는 파들(통합)은 저들끼리 따로 모여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도 있었던 친일파 전필순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습니다.



외국선교부들의 원조 등 때문에 목사들이 많이 쏠렸을 거는 당연합니다. 당시엔 태반의 사람들에겐 미국이 천당 가는 거였으니깐요. 기독교 학교 등 재산 등은 통합으로 남았지요. 평신도들은 합동측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한편 위기에 몰린 NAE측 목사들은 박형룡박사와 자기들도 한패가 되어 내쫓은 출옥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총회에서 축출한 것을 사과하고 하나로 합칠 것을 제의하게 되었습니다.



출옥성도측에서는 자신들을 교회밖으로 축출하고 예배당까지 탈취한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쉽게 화해 할 일은 아니지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데 거절하면 교만하다는 비난을 모면키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고 한편 위기에 몰린 한국보수신학을 살려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게 되었습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2.gif



사진설명:

(NAE운동을 지지하는 장로교는 촐옥성도측 즉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1960년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소위 예장 합동이 형성되었다. 맨앞줄 가운데 분이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분 뒤에 분이 박형룡 교수이다. 1947년 고려신학교(교장)에서 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국교회 개혁에 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하였다.)



---얘기가 점점 흥미 진진하게 전개 되는데...



NAE측과 고려측이 합하는 과정, 다시 분리하는 과정, 그후 전개 되는 상황, 그리고 1979년부터 시작된 합동측이 수십개로 분리되는 과정을 기술하자면 도저히 한두번에 끝내기는 힘들고 앞으로도 여러번 나누어 계속해야 할 것같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그치고 내일부터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나중에 위의 것을 다시 보충 정리하고 맨나중에 최후로 정리하여 한번에 시리즈로 올리겠습니다. 다운로드하여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kcm.co.kr/korchur/chpic/1960-3.gif

(자유당선교위원회가 마련한 오찬에 참석한 교계지도자들(1960.2.18). 지금도 알만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위 내용은 많은 교회사 책들을 참고로 하고 여기저기 오랜기간 읽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구두로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도 합했습니다. 자세히 쓴 교회사책이라도 한두권만 읽어서는 위같이 객관적 종합적으로 기술된 것을 찾기는 힘들것입니다.









위글을 가져오게 된 성경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4 : 26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이렇게 속이지 말자는 겁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이라는 게 물질입니까?)



에스겔 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현실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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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당하고도 말못하는 충격사연 심층취재**

사진첨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 당하고도 신고하는 율이 2% 정도밖에 안된다고 언론들에 보도된 바가 있다. 법정에 서는 것조차 수치스런 일이지만 그 재판 진행과정에서... 한국의 성폭행은 세계 1위라고 한다. 얼마나 썩은 나라인지 미국은 인구 10만명당 몸파는 여자가 23명인데 우리나라는 몸파는 여자가 무려 1백만명이 넘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몇 cm를... 몇분동안...” 하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 게 진행된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잡아 죽일 것같지만... 재판정에서서 호소하렵니까? 그렇게 “몇 cm를... 몇분동안...” 재판관에 호소하렵니까?



한국의 여성단체에 신고되는 여신도 성폭행 숫자는 엄청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단 1년만에 47건이 신고되었는데 실제 100배에 이르고... 교회의 특성상 모호하게 진행되는 점도 많고... 그런점을 감안하면 성가대원 50명 성폭행등 헤아릴수 없이 많이 여신도들이 교역자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근데 위와같이 당하고도 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래 모교수가 쓴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이란 책이 있다. 본문과 현장사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현재 한국교회 실정과 교단간 눈치보기 때문에 얼마나 솔직하게 쓰여있나 의심스러웠는데 예상보단 신랄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통합측과 한신대 즉 이른바 진보(내지는 자유)와 그 아류교단의 과거사를 상당부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먹사가 신사참배에 항거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들었고 어느 먹사가 주기철 목사의 노모 등 가족을 목사관에서 끌어내어 탈취했느냐는 등은 언급이 안되어 있다. 이름을 밝히지 못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이자들이 해방후 한국교회를 주름 잡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최고 지도자로 행세하며 존경을 받고 있는데...



위 책의 점수를 매긴다면 한 70점이나 될까? 위 책에 비하여 성결교 소속의 이선교 목사님이 쓴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는 신랄하게 까발긴 점으로 보아 한 80점은 된다. 하기야 이선교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를 검찰청에 반란방조혐의로 고발하여 신문에 보도되고 한동안 그것 때문에 지하언론이 무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 두책이 최초라 할만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친일 친독재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부정 사기 협잡들을 노출시킨 점에서 훌륭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예상보단 불과 몇 개월 사이에 4판까지 나온 것을 보아 그것도 반가운 일이고.





통합측이나 한신측 그리고 합동측에서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출옥성도 성자란자들이) 예배당 쟁탈전을 벌였다...” 즉 자세한 서술도 없이 무조건 소위 성자들이 세상 재산에 탐이 나서 혈안이 된 인간들이라고 하는식으로 매도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출옥성도측에서 나온 책에는 이 부분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 이 문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출옥성도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과 두말없이 피땀흘려 가꾼 교회를 내주고 나와 맨땅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배당을 내놓으라고 총회측(통합과 합동이 분리되기 전)에서 소송을 걸자 그걸 항거하는 성도들이 응소를 하여 장장 10년간에 걸쳐 대법원에까지 가서 판결이 난 것이다. 즉 예배당은 교인의 총유이다. 그러면 위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은 교인들 90% 이상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니 출옥성도측의 예배당이다.



사기꾼 먹사와 교회사가중 대부분인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즉 “하나님만이 누가 뭣이 옳은지 아신다”는 것이다. 미친넘들! 성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고 설교까지 하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알 것 아닌가? 일반계시인 양심으로도 판단 할 수가 있는 문제이고. 잘 몰랐다? 그럼 아래 태만의 죄에 해당한다.



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리고 또하나 사이비 교회사가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라는 것이다. 단순히 신사참배만 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친일하며 갖은 악행을 다하고 동족을 못살게 군 목사들에게 맞는 소리인가? 성경은 치리의 의무성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Y 신과대학 명예교수란 또라이 교회사가는 “그 말에는 반박못할 논리와 신학이 있다”고 하는데 그럼, 컨닝하다 걸린 신학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이다”하고 반발한다면 어떡할 셈인가? 공적인 죄는 공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위에 대한 참고문은 다음 “몸버린시골처녀를” 클릭하며 자세한 것을 읽을 수 있다.



(3-2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자가 속한 교단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까지 체포된 바 있는 일경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성도들을 밀고하여 죽도록 고문 당하게 만든 추악한 악질 한국교회 지도자를 읽고 싶으면 아래 “치마를 벗고” 안에서 나오는 “최고악질”을 클릭하시면 자세한 얘기를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총회측(합동과 통합, 기장)이 출옥성도들을 독선주의자 분리주의자들로 매도하니 그것을 방어하기에 급급한데 과연 성경신학적으로 그게 옳은 태도인가? 자의적으로 분리했나 쫒겨남을 당한 것인가 하는 사실확인을 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론 아예 맞받어 쳐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실제 처음부터 그런 교단도 두 개나 있다.



아래를 “치마를 벗고” 클릭하면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3-1 파일을 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왕따 당하는 게 두려웠던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말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위해 말하라”(잠 31:8)



당시 응소한 목사는 출옥성도는 아니고 해방후 출옥성도편에 선 1930년대에 한국교회에서 절제운동(주초문제)을 하던 송상석 목사(1897-1977)이다. 이분이 행정능력이 탁월하여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해방후 당시까지 만주봉천신학원에 머물던 한국보수신학계의 거성 박형룡박사(1897-1978)를 배를 전세내어 타고 만주에 가서 비밀리에 모셔온 분이다. 즉 오늘의 총신이 있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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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제        목 글 쓴 이 조  회 누  리 등 록 일
이명박, "BBK는 내가 설립했다" (6) 편집국 21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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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14:24
[법원제출] 프로펠러 손상 관련 검증에 대한 의견서 (7) 신상철 470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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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3 07:16
[법원제출] '제3의 부표'관련 UDT 대원 증언에 대한 의견서 (9) 신상철 539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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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21:18
[검증] 천안함 '1번 어뢰'는 고철 덩어리 (9) 신상철 449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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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09:10
[단상] 신에게는 아직 12번의 재판이 남았습니다 (13) 신상철 31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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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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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법치 행하는 검찰로 돌려놓을 것” 사람일보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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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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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2 강진욱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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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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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동안 법정시한 내 통과는 단 두 번 … 여야 예산... 아이엠피터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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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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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독일은 왜? 편집국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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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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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그리고 바꿔야 할 한국 교육의 체계 권종상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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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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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의 윤석렬 제거공작은 실패로....징계라는 사법농... (1) YK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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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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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은 인간이 아니다!!"🛑 중대발표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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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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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김장환 김삼환 관련 중대발표㈐... 특종맨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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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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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만큼만 정결한 남자를 만나고 싶다 더도 덜도 ... 마파람짱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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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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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가 전화하면 곡을 주는게 아니고 소속사에 가져... 마파람짱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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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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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1 강진욱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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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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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럴줄 알았다 권력의개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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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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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개가 권력이 되고, 권력의 감시자가 개가 되다 권종상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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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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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인 윤석렬에 침묵하는 넘들에게:€... (1) 중대경고: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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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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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에 명한다....권력형 부정비리 정밀조사 단칼에... (1) YK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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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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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예은"윤무" 노래 좋긴한데 김세정이건 안예은이건 ... 마파람짱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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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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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심 제출 천안함 사건 의견서 (PDF 파일 첨부) 진상규명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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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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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지금, 이 혹성에서 일어나는 일 12 김종익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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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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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에 와서 서프와 인연 맺었는데 강경을 떠날거 같... 마파람짱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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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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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태양은 서쪽에서 뜬다 이기명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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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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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자들의 소통법 강기석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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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08:35
127402
🎪부자되길 원하세요, 그럼 여길..🎴 부자 거지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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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07:34
127401
윤, 추 동반사퇴 절대반대..윤석렬 총장 찍어내라.... (2) YK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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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06:38
127400
종부세 폭탄?… 한국보다 더 가혹한 미국의 재산세 (1) 아이엠피터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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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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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요구한다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하라 사람일보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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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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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人物論 쓴소리를 기꺼이 받아들... 이정랑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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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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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남자 박그네...이유가 나왔네.....ㅋㅋ 각 분... YK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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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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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에게 재혼할 여자가 있다는데 내 맘이 왜 이렇... 마파람짱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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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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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윤석렬 만루홈런 2방 맞아!!⚾ 특종전문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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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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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11명강간목사 징역12년 덮어버려Ԃ... 놀렐루야~~~~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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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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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유럽에서 법을 집행하는 판사들 불법 사찰하... 김순신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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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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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법사찰인가? 004262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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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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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느껴지나요? 문재인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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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박그네 문재인...ㅋㅋ 어찌 이렇게 닮았나..ㅋㅋ YK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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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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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과적에 솔레노이드 고착이라고 해도 (3) 확률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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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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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100년 전통❌ ????????????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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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 한기총탈퇴 전광훈 김준곤 사위세습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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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법사찰인가? 0042625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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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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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인터뷰] 재벌과 검찰의 갑질과 비행을 고발한다... 임두만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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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아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김용택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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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김순신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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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한국은 잊지 않습니다, 한국을 도운 당신을” 뉴스프로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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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핵폭탄급 코로나 터져🛑 마침내~~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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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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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동에 화염병 화염방사기 대전투💥... 끝장투쟁!!!!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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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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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7시간 비밀은 최태민 노릇하려던 자 (1) 박형국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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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총장의 권력형 비리 조사 그리고 윤총장 제거 작전 YK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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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문재인 대통령 할애비가 와도 세월호는 대통령할애비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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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미국이 돌아왔다. 세계를 주도할 것” 김원식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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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지금, 이 혹성에서 일어나는 일 11 김종익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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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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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판사 “판사는 바보입니까? (1) 아이엠피터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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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시간 - 강고했던 카르텔에 금이 가기 시작할 ... 권종상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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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에 놀아난 무능한 대통령 & 참여연대의 추에 요... YK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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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렬 관련 천기누설🔴 🔴중...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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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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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추미애...완전 깔아 뭉게자.....대깨문 만만세... YK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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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판사 불법 사찰’… 사법부 위에 군림... (1) 아이엠피터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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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09:00
127363
추미애 법무부 장관,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 청구 및 ... 임두만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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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파쇼짓거리 하는 추미애를 깜빵으로..... YK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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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괴기소지(乖其所之) 이정랑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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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방가네 엽기 패륜 폭로✅ 서울의 소리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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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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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명 확진+구강성교+염병지랄 속였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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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수능100프로가야 면접전형 없애야 전라도 많아질... 의대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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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복귀 의대수능100프로가야 면접전형으로 가면 안... 전라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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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2단계 격상때문에 죽을 지경이라네요 (1) 마파람짱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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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수가 김대중 역할이라고…영화 ‘이웃사촌’을 둘... 아이엠피터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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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족 늘품에게 보내는 메세지 (6) 박형국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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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살아 있는 검찰 권력 이기명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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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20대가 겪어야 하는 비극을 만들어냈는가 권종상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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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백신 책임자 “내달 11일 첫 접종 기대… 내년 5월... 김원식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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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고 구입한 기사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 아이엠피터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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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의 ‘1984년’ 소설이 현실화하려나? (2) 시골목사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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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목잘라 연희동집에 던지려... 중앙일보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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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MB여펜네) 행각 기절할 지경💢... 역대최악~~~~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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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는 전두환에게 배워라 그리고 가덕도 신공항...... YK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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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ion Left 선언 김종익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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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렬 추미애 들이받기!!!!⭕ 장도리만화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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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만명 세자비 불륜 생방송 시청💥 BBC방송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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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국제공항’ 가능하다… 세계적으로 정치인 ... (1) 아이엠피터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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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총리의 불통? 꼴통 내각에 대한 불통치는 직... YK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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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지금, 이 혹성에서 일어나는 일 10 김종익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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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존엄 윤석열과 김건희, 영혼의 동반자 0042625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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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언론인연대 전북 팸투어 ‘새만금을 조명하다.... (1) 임두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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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人物論 황제가 되려면 현자를 스... 이정랑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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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 맞아죽을 각오하고 올림💦 죽기직전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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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타전💥: 추미애 vs 윤석렬 현장포착!!!!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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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파쇼 처단했던 국민들이 내로남불 사이비 문구라 ... YK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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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역의 허상 (서민교수) 재앙의 구라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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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앙 여러분께 작별인사 하려고 합니다 (2) 마파람짱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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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언론인연대 군산 팸투어… “새로운 군산을 조... 임두만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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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신공항, 천인공노할 일”… 국민의힘, 부산 ... 아이엠피터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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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 절대 필요없다.....만인의 악의 축이 될 것...... YK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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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공항 증설로 충분.. 결론 뒤집은 부산 가덕도 신... YK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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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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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음모론을 믿지 마라 나무맛사탕막...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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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7주기까지 성역없는 진상규명 완수” 뉴스프로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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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보다 무능한 병신 문재인 ㅋㅋㅋ 최순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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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검찰개혁, 공수처 이기명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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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안능동지(安能動之) 이정랑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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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짜리가 1등 윤석열 욕하는 추미애 아이러니.... YK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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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하버드2인방 난타전 총정리 현각vs혜민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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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이 도람뿌라 부르는 이유 트럼프 아냐.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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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존엄 윤석열 장모의 육성공개 (1) 0042625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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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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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람뿌 vs 💔포르노 배우=점입가경 셀프사면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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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말했던 중앙일보 기자들의 “홍 사장님 힘내세... 아이엠피터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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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정신의 몰이해, 그리고 윤희숙이란 괴물 권종상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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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서 목사가 권총 쏴 친구살해💥 쌀벌하네~~~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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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앞 라이브카페'시나위'에서 본 배우 목티에 가디... 마파람짱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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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끼로 버텨요 색즉시공공즉...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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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끼로 버텨요 색즉시공공즉...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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习近平主席的母亲是蟑螂吗? 习近平...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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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붓"은 통일된 한반도를 가정한 노래로 보면 ... (1) 마파람짱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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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석열 총장의 지지율이 급등한 이유는? (1) YK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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