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은 좌초입니다.
천안함 조사위원으로 참여한 선박 전문가 신상철의 비망기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
권력을 사익 확대의 도구쯤으로 여기는 오늘날 부패한 고위 관료들.. 김종익
도둑맞은 주권
18대 대선은 합법으로 위장한 부정선거였다. 김후용
진보적 글쓰기
우리의 글쓰기가 사회를 개선하는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김갑수
진보를 복기하다
국회의원으로서 내놓았던, 내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정책을 열한 가지의 주제로 묶어 정리했다. 이정희
천안함 7년, 의문의 기록
사건의 재구성과 57명의 증언 (미디어오늘 조현호 기자)
천안함의 과학 블랙박스를 열다
분단체제 프레임 전쟁과 과학 논쟁 (한겨레 오철우 기자)
논  쟁   문재인정부   천안함   세월호   최순실   검찰개혁   국방개혁   정치개혁   일반   전체 
💖부쉬 의리삭발 온국민 격찬!!💖
  번호 121532  글쓴이 특종 사진들  조회 172  누리 5 (30,35, 0:6:7)  등록일 2019-9-14 02:38 대문 0

부쉬 의리삭발 온국민 격찬!!
특종 사진들 -한국민 특성인 ‘의리문화’(깡패)는 미국(건전)에도 있나봅니다.

부쉬 대통령 경호원아들 백혈명 의리삭발에 전국민 찬사 격추 잠수함구조 7장




♥긴급-삭제하기전 저장하시압-중대자료!!
너무 귀중
한국 최초로 성경전권을 주석한 분. 평신, 고신, 총신, 합신 등뿐 아니라 전교파 통들어서도 한국목사중 박윤선교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이다. 어떤 목사들 서재에 가더라도 대개 “박윤선 주석" 한질은 볼 수 있었다. 이거 뭐 이젠 인터넷 검색만 잘해도 교회사의 내밀한 부분들을 다 알게 되어 연구가 가능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온갖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앞다퉈 올려놓으니...

http://www.seonjija.net/new/board_rohk67/41043

■ 박윤선(朴允善, 호:正岩, 1905-1988) 박사

박윤선 목사는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경건한 설교자이며 성경 주경학자이다. 신구약성경을 모두 주석하여 1979년도에 완간 기념예배를 드렸다. 평양신학교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생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일생은 기도일관, 진실노력, 침묵정진의 삶으로 요약된다. ‘목사에게는 강단이 생명이다’고 강조하듯이 성경연구와 목회전선을 접목시킨 경건 인물이었다.

박윤선은 1905년 12월 11일(음력)에 평북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에서 가난하고 부지런한 농부인 박근수와 김진신(金眞信) 사이에 태어난 2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형=박윤석, 누님 두 명, 여동생 한 명). 철저한 유교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30대가 넘기 전에 노름을 완전히 끊었으며, 불신자 때에도 술을 마시지 않고 깨끗이 사는 청년이었다. 후에 주님을 영접하여 독실한 신자로서 평생 교회를 신실히 봉사하였다. 윤선은 아홉 살 때(1913년)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다 마쳤고, 예기와 주역 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암송할 정도로 통달하였으며, 논어와 맹자는 그 주해(註解)까지 다 외웠다고 한다. 17세까지 서당에서 동양 고전을 섭렵하였다.

서당에 다니는 동안 여름에는 집에서 소를 먹이어야 했다. 서당에서 1등으로 공부했는데 한문시 작문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17세에 약 6km(15리) 떨어진 동문동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주일마다 걸어서 다녔는데 사춘기 때에 가지는 인생의 공허감을 매꾸어 보려고 열심히 다녔다. 당시 설교자는 한 달에 한번 순회 목사님들이었고 나머지 주일은 그 교회의 장로가 담당했다. 설교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계속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 당시는 남녀 좌석 가운데 휘장이 쳐져 있었다.

18세 때인 1923년 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32km(80리)를 걸어서 선천군 군산면 장공동에 있는 선천 대동소학교를 찾아가 6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당시 선천은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여 많은 주민들이 교회에 다녔다. 대동소학교도 그 동리의 부자요 기독교 신자였던 김도순씨가 세웠다. 그의 아들도 이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그가 박윤선의 고향으로 장가들게 되어,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권유로 이 학교에 오게 된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경건회가 있었고, 주일에는 교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를 열심히 듣긴 해도 큰 깨달음이 없었다. 3?1 독립만세 운동이 있은 후 몇 해가 지났지만 일본 경찰들이 종종 학교에 와서 검사를 하였다. 겨울방학 때 부모님이 정해 준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얼굴도 보지 못하고 순종했다. 당시 신랑 박윤선군은 18세였고, 신부 김애련양의 나이는 15세였는데 학력은 없었고 한글은 읽을 수 있었고 농촌 여성으로 매우 수줍어하였다. 소학교 졸업시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1년 동안 수학과 일본어도 자습하여 통달했다.

대동소학교를 마치고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거기서 한 학기를 공부했는데 학기말쯤에 이구하 교장을 배척하는 데모로 인해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선천 신성중학교에서 실시하는 3학년 보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해서 이 학교를 고학(소 먹임, 우유배달, 밭에 김매는 일, 변소 거름 치우는 일, YMCA 아동 교육사업 교사)하면서 다니게 되었다(1923~1927). 고학생으로 공부하자니 시간도 부족하여 식사시간을 절약하는데 식당에서 5분 동안에 식사를 마치곤 하여 “5분”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신성중학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어서 날마다 경건회가 있었다. 길선주 목사께서 오셔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몇 일 동안 사경회를 인도하는 모임에서 열심히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인가 허전한 느낌도 가졌다. 계시록에는 무엇인가 깊고 좋은 내용이 있을 터인데 강사목사님께서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는 것을 느꼈다. 주일마다 선천 북교회(1000여명 참석)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양전백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해가 갈수록 차츰 신앙이 생겨 신앙운동에 열중하게 되었는데 이때 평생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하게 된다. 22세 어느 날 학교 가까이 수청고개 밑에 있는 시냇가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그의 심중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하고 자문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즉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음성같이 들리는데,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니라’하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이때부터 분명히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고,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 후로 성경을 견고히 붙잡고 살아가는 믿음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기간은 아내와 떨어져 있게 되고 방학 때만 고향에서 함께 지냈다. 첫아기가 첫돌이 못되어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박윤선 학생은 이로 인해 죄책감으로 괴로웠다. 신성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내로 하여금 교육을 받도록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아내를 선천으로 데리고 와서 선천읍 보성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때 아내 이름을 영선(英善)으로 개명해 주었다.

김선두 교장선생님은 그의 은인이 되었는데 그는 윤선으로 하여금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도록 밀어주었다. 평양숭실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1927~1931) 계속 고학으로 공부를 하였다. 관영 철도호텔 종업원들에게 4년간 영어를 가르치며 적지 않는 월급을 받아 생활을 하였다. 숭전 영문과에서 공부하는 4년 동안 기도운동을 일으켰다. 서문밖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였다. 몇몇 동지들(이유택, 송영길, 김철훈, 박기환, 김진홍, 방지일)과 함께 새벽 3~4시에 기상하여 약 1시간 정도 걸어가서 모란봉 뒤 숲 속에서 기도하곤 했다.

“조기부대(早起部隊)”라는 별명도 얻었는데 회원 모두 후에 목사가 되었고, 이유택목사, 송영길목사, 김철훈목사는 공산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방학마다 전도대를 조직하여 지방 순회 전도 강연을 다녔다. 이때 윤선은 설교를 많이 하게 되었다. 만주 봉천에까지 가서 전도를 하였다. 이러던 중 그는 4학년 때에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기도했다. 숭전(교장: 마포삼열 선교사)에 재학하던 4년 동안 모란봉 뒷동리에 있는 가현교회를 맡아서 주일마다 설교를 했으며 교우들 심방을 하였는데 물론 보수는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끔 서문밖교회에 가서 임종순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는데 임목사는 복음주의 설교가로서 보수주의를 지켰다.

해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도자들 가운데 더러 사회복음주의 노선에서 설교한 것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면과 사상면에 있어서는 깨끗한 인격으로 감화를 끼친 정재윤(鄭在允) 교수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훗날 방지일 목사는 그에 대해 회고하기를 ‘박 형님은 숭전 재학 시절 언제나 성경에 열중하여 있었으니, 계속 성경을 외우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침 새김질하는 소나 양같이 그는 성경을 계속 반복하여 읽는 것이었다’고 한다.

숭전을 졸업하고 1931년 4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신학교에는 10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으며,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입학시키지 아니했다.
거의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그 분위기는 매우 친밀했으며, 학생들도 학교의 규칙을 잘 지켰다. 결석할 경우 반드시 교장의 허락을 받았다. 또한 새벽기도회에 힘썼고, 기회가 닿는 대로 목회도 힘썼다. 이러다 보면 졸업을 4년 후 심지어 7년만에 졸업하는 이들도 있었다. 박윤선은 신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숭실중학교의 사감으로 일하였다. 특히 문제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상담하고 도와주었다. 주일에는 숭실중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실시하는 성경반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교안을 작성할 때는 신학교 도서실에서 영문 성경주석을 빌려다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방학 때는 교수들의 성경주석(영문)을 빌려 가지고 고향 장평동에 가서 열심히 읽은 후 돌려주기도 했다.

신학교 1학년 때 부친께서 별세하셨다. 장례는 기독교식으로 하였다. 신학교 재학생 몇 명(김진홍, 방지일)고 함께 <겨자씨>라는 신앙지를 출판하였다. 방지일목사가 주동이 되어서 열심히 출간하였다. 선배 중 한 분인 김린서 장로(후에 목사가 됨)는 부흥사였는데 단독으로 <신앙생활>이란 신앙지를 출판하면서 진리를 파수하며, 교회의 세속화를 방지하기 위해 투쟁했다.

1934년 3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을 더 연구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추진하였다. 모친은 아들의 유학을 반대하였는데, 부친의 제사를 반대해 왔으므로 유학으로 인해 그의 신앙이 더 견고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모친께서 엄지발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몹시 고통을 당하자 평양 기독병원에서 수술을 받도록 했는데 당시까지 어머니는 이름이 없었고 “김씨”라고만 불리어졌는데 윤선은 어머니께서 참으로 믿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金眞信으로 지어주고 입원시켰다(후일에 모친도 회갑을 맞이할 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고 한글을 배워 신구약성경을 일독하였다. 어머니는 붓글씨로 요한복음 3:16말씀을 써서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아들에게 보낸 것을 박목사는 귀중하게 보관했다). 마침내 그는 Westminster 신학교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

1934년 8월 중순경에 미국으로 유학올 때 왕길지 선교사가 모자라는 여비를 빌려주었다. 후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다 갚았다. 일본 고베에서 배를 타고 상항에 17일 간 오면서 요한계시록을 18장까지 암송하고, 상항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그레이하운드로 일주일간 오면서 계시록의 나머지 부분을 암송하였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으로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구약학자 윌슨(Robert D. Wilson)과 신약학자며 학장인 메이천(Gresham Machen,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 1929년 프린스톤신학교가 자유주의로 나갈 때 떨어져 나와 웨스트민스터를 세웠다)으로부터 칼빈주의(혹 개혁주의) 신앙과 성경의 권위성, 주경신학, 성경해석을 배웠다. 오직 성경만이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인 줄 확신하고 성경을 바로 알고 그대로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살았다.

재학 중 화란어, 독일어도 틈틈이 공부하여 칼빈주의 신학자인 카이퍼와 바빙크의 저서들을 읽을 정도였다.
1936년 5월에 졸업을 하고 신학석사(Master of Theology)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해 8월에 귀국하여 고향에 계시는 모친을 문안한 후 가족과 함께 평양에 거주하면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성경 원어를 강의했으며 총회 표준 성경주석 편집부에서 근무하였다(1936. 8~1938. 7). 이때 편집부장은 박형룡박사였고, 사무실은 신학교 하층에 있었다. 당시 평양의 유일한 여자 성경학교였던 고등성경학교에 강사로 나가 성경을 가르쳤다.

1938년 8월에 다시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1년간 머물면서 밴틸(C. Van Til)교수의 지도로 변증학 및 성경 원어를 더 연구하였다(1938. 9~1939. 11).
밴틸교수의 변증학은 특징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아는 길은 성경뿐이다. 자연계를 보고도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불신자는 자연계를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 불신자도 오직 성경으로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2차대전이 시작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공부를 마치고 1939년 10월 동경와 와서 표준 성경주석부의 일을 계속하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골로새서를 주석하다가 1940년 3월에 귀국하였다.

귀국하자 얼마 후 바로 만주 봉천(현 瀋陽)에 있는 우지황교회에서 청빙이 있어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가서 목회하였다(1940. 4~1941. 3). 그 다음해에 봉천 북능(北凌)지역에서 개교한 만주신학교(교장:정상인 목사)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1941. 4~1943. 7). 성경원어(히브리어, 헬라어), 신약학을 가르쳤다. 일본으로부터 오신 박형룡박사도 함께 가르쳤다. 신사참배 문제로 교계가 어려울 때 그는 계속 주석서를 저술했다. 그도 한번 신사참배를 한 적이 있어 이를 회개하는 심령으로 저술에 집념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가족과 함께 6개월 고향에 거주하였다. 북이 공산화 되어가기에 월남할 뜻을 정하고 1946년 2월에 가족과 함께 월남(越南)하여 3월 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의 소원은 신학교육과 주석 집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태원에서 두어 달 지내고 5월에 한상동 목사의 초청으로 신학교 설립을 위해 부산을 경유하여 진해로 내려갔다. 경화동 교회에서 설교를 몇 달 하였다.

1946년 9월 20일부터 개교한 부산 고려신학교(설립자: 주남선목사, 한상동목사)에 교장서리에 취임하였다. 본래는 박형룡박사가 초대교장으로 내정되었는데 귀국이 늦어짐에 따라 서리로 취임한 것이다(박 박사는 10월 14일부터 교장으로 근무했다). 학교의 신학 노선은 칼빈주의였다. 주경신학, 조직신학, 성경신학, 성경 원어를 가르쳤다. 한부선(韓富善, B. F. Hunt)선교사, 마두원(馬斗元, D.R. Malsbary)선교사, 최의손(崔義遜, W. H. Chisholm)선교사, 함일돈(咸日頓, F.F. Hamilton)선교사가 신사참배문제로 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모두 돌아와서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신학교가 처음에는 부산진에 있는 금성중학교 교실 하나에서 시작했다가 둘째 학기부터 초량교회 부속건물에서 수업하다가, 광복동에 있는 큰 건물을 구입하여 1956년까지 교사로 사용하다가 암남동에 교사를 신축하여 옮겼다. 서울 조선신학교 학생들 일부가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여 학교를 자퇴했는데 이들 34명이 박형룡박사와 함께 부산에 내려와 고신에 편입하기도 했다.

그 다음헤 봄 학기에 박 박사는 서울에 신학교를 설립할 뜻을 두고 고신을 사임하고 상경하여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그와 함께 내려온 34명의 학생들 전원이 박 박사와 함께 서울로 떠나갔다. 고신은 그 설립목적을 위해 계속 부산에서 기반을 닦았다.

1947년 10월에는 교수로 취임했고, 1948년 5월에는 교장으로 취임하여 봉사하였다. 6?25가 터지기 전에 고신에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는데 박윤선목사가 경건회 시간에 요한복음 21:15~17을 읽고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을 근거로 하여 설교한 후에 학생들 중에서 누구든지 한 사람 일어나 기도하라고 했는데, 어떤 학생이 일어나 통회 자복기도를 하는데 눈물겹고 진실한 내용이었다. 기도가 끝나자 곧이어 다른 학생이 일어나서 회개 기도하는데 계속 되니 학교에서 강의를 전폐하고, 기도회는 한 주간 계속 되었다. 이 운동이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도 일어났고 점점 퍼져 고신측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6.25 때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에 모일 때 회개 집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특히 초량교회 한상동 목사의 주관으로 전국 피난교역자 부흥회(강사:박형룡, 김치선, 박윤선, 한부선)가 개최되어 민족과 교계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기도운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부선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를 적극한 일에 대한 간증으로 많은 교역자들이 은혜를 받고 일부 신사참배에 참여한 죄를 철저히 회개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칼빈주의에 입각한 성경 주석 서술은 계속 되었다.

신학을 더 연구할 목적으로 1953년 10월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 가서 6개월간 신약학을 연구하던 중 54년 3월에 뜻밖의 비보를 받고 즉시 귀국했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별세한 것이었다.
이때 박윤선목사는 49세였고 아내는 46세였다. 미성년 5자매를 두고 먼저 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주님의 위로로 견디며 6개월을 지내다가 그해 10월 이화주(李和主)와 재혼을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항상 마음은 성경에 머물렀고 신구약 주석 집필을 쉬지 않았다. 1954년 9월에 미국 필라델피아 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명예박사(D.D.)를 받았다. 1960년에 성수주일에 대한 의견차이로 말미암아 고려신학교를 사임하였다.

고신에서 14년간 재직하면서 탈고한 성경주석은 25권이었다.2) 잠시 부산에 더 머물면서 사도행전을 탈고하고 서울로 와서 동산교회(서대문)에서 목회를 하였다(1961. 2~1964. 4). 이 기간 중 1963년 3월 10일 서울 총회신학교(사당동, 현 총신대 신대원) 교수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7대 교장(윤번제)으로 취임하였다.

동산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탈고한 성경주석은 15권이었다.3) 또 총신 부산분교에서 교수 생활 및 부산 성산교회(좌천동)에서 목회를 하였다(1965. 3~1967. 2). 이때 시편 주석 증보(增補)작업을 마쳤다. 67년 3월에 다시 서울로 와서 서울 총신대학 신학원에서 교수생활을 하다(1967. 3~1974. 11).4) 이 기간 중 서울 한성교회(노량진)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였다(1968. 6~1973). 1974년 11월에 서울 총신대학 신학원 교수를 사임하였다(70세 은퇴). 총신 교수 11년 동안 탈고한 성경주석은 13권이었다.5)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건너가서 4년 동안 있으면서 약해진 건강을 돌보며 성경주석 저술에 전념하였다. 담석 치료를 받아 완치되는 기쁨도 누렸다.
여기서 탈고한 주석은 12권이었다.6) 에스더서를 마지막으로 성경 66권을 완필하기까지 인생 여정 74년을 붙잡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렸다(1974. 12~1979. 1). 1977년 여름에 일시 귀국하여 총신대 신대원에서 한 학기 교수하고, 다시 로스엔젤레스에서 머물다가 1979년 3월에 서울 총신대학 대학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9월 3일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총신대학 대강당에서 가졌다. 그의 성경주석의 기본은 항상 칼빈주의와 성경의 정확 무오설이었다.

1980년 11월에 서울 총신대학 대학원장을 사임하고, 수원 합동신학원 초대 원장(1980. 11~1985. 2), 수원합동신학교 명예 교장(1985. 3~1988. 6)으로 있던 중 1987년 4월 27일 박윤선 목사의 ‘성역 50년’을 기념하여 남서울 예배당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후에 기념 논총인 <敬虔과 學問>을 받으면서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고 진솔한 두어 마디로 답사를 대신하였다. 그는 종종 말하기를 ‘내가 죽었다 깨어나 다시 한세상을 산다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 하겠다’고 했다. 이 말처럼 그는 성경을 사랑하고, 확신하고, 묵상하고, 주석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그의 기도생활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경 연구에서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기도로 영감을 얻었고,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에 옮겼다.

1988년 6월 30일에 83세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합동신학교장으로 장례예배를 드렸다.

자료: 재미 윤사무엘 교수



■ 박윤선 목사님 전기 요약

"박윤선 목사님의 자서전은 안 나옵니까?" "자서전은 안쓰세요?" 어느날, "어디 좀 정리해 볼 수 있겠나." 하시면서 얄팍한 원고 뭉치를 넘겨 주셨읍니다. "성경과 나의 생애." 드디어 쓰셨구나 생각하면서 받아보았더니, 그것은 1979년(75세)까지의 생애를 아주 간략하게 담은 글이었읍니다.

1987년 4월 27일, 박목사님의 "성역 50 년"을 기념하여 남서울예배당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후에 기념 논총(경건과 학문)을 받으신 박 목사님은 진솔한 두어 마디로 답사를 대신하셨읍니다.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지 며칠 후 박 목사님의 말씀이, "이제는 천국에 갈 일만 남았구나..." 하셨는데, 이듬해 6월에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는 평북 철산군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부터 시작하여 사서 오경을 다 마쳤고 논어와 맹자는 그 주해까지 다 외웠다. 대동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에서 한학기를 편입하여 지낸 후 교장배척 데모로 인한 휴교로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학교 선천 신성중학을 졸업하였다.

이무렵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신앙 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나는 학교 가까이 수청고개 밑에 있는 시냇가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나의 심중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고 자문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즉시로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음성같이 솟아오른 것은,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니라" 하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 때에 놀랄 정도로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고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 때에는 성경 주석도 별로 없었고, 신학 서적들도 우리말로 발행된 것이 아직 없었다. 나는 기도와 전도의 은혜를 받아 열심히 나가는 가운데 4학년 때에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내 일생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때도 나는 자유주의를 배척하는 성경관을 가졌던 것이 기억난다. 어느 주일에 숭전 선배가 가현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였는데, 그가 "성령의 불"을 해석하면서 그것은 '신자의 열심'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한번은 어떤 설교자가 "영생"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자손손 계대(繼代)해 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런 해석도 배척하였다.

위의 두 가지 잘못된 말을 보더라도 이미 그 시대에 한국 교계 설교자들 가운데 자유주의 또는 인본주의 사상이 침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길선주 목사는 사경회 인도자라기보다는 부흥가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말하는 스타일로 보아서 그렇다. 어느 날 그가 숭전 경건회 시간에 오셔서 설교하셨는데, 그의 말한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즉, 그가 어떤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회중을 향하여 "이 망할 놈들아!" 하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부흥가가 이런 식으로 회중을 깨우쳤으니, 성경을 성경신학적으로 풀이한 설교를 들어보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 시대를 계몽시대라고 할 수 있고, 또 그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31년 4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신학을 배우는 3년 동안 숭실중학교 사감으로 일하였다.

1학년 재학중에 나의 부친께서 별세하셨다. 형님과 내가 부친 제사를 반대했으므로 어머니는 몹시 원통한 마음으로 땅을 치며 아들들을 헛키웠다고 통곡하셨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한국 초대의 중진 선교사였다. 내가 입학한 그 해에는 그가 소요리문답을 가르치셨다. 교장 라부열 박사는 그의 저서 "사복음 대조 기술"을 교재로 사용하여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그가 명확한 한국말로 강의할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종종 신학생들에게 말하기를, "교역자는 재지(才智)가 부족해도 진실하면 되지요"라고 하였다. 그가 서재에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의 서책 중에서 뉴월(Newell)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빌려간 적도 있었다.

조직신학 교수 이율서 박사는 고아하고 성스러운 인격자였다. 그는 미국 선교사이면서도 능숙한 한국말로 강의하였는데,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때로는 어떤 수도사 앞에서 설교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조직신학 교재는 중국어로 번역된 챨스 핫지(Charles Hodge)의 조직신학을 우리말로 다시 번역한 단편적인 것이었다. 그의 교수 방법은 비판에 의해 진리를 확신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통 교리를 보수하며 전달하려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어도만 박사는 주로 주경신학을 맡아 구약을 가르치셨는데 불행하게도 나는 그에게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숭전재학시 초청강의시 그가 강의하는 도중에 한 학생이 조금 불손한 태도로 그의 잘못을 지적하니, 그는 즉시 부드러운 어조로, "잘못했습니다. 사과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에 그가 변명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거두 절미하고 사과한 것이다. 후일에 내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재학 중에 어도만 박사의 댁을 방문한 일이 두어차례 있었다.

업아력 교수는 카나다 선교사로 교회사를 가르치셨다. 한번은 내가 불건전한 신비주의운동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물었더니, 그는 그런 일이 사단의 운동(광명의 천사로 가장)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의 말씀을 읽으라고 대답해 주셨다.

곽안련 교수는 실천신학을 담당하시고, 설교학, 목회학, 종교교육 등 여러 과목을 가르치셨다.

왕길지 선교사는 호주에서 오신분인데, 성경원어교수였다. 솔직하기로는 거의 수학적이었고 책임감이 강하신 인격자였다. 그의 교수 방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남궁혁 박사(1882-1950, 서울)는 신약교수였다. 6.25 때 인민군에 납치되어 가셨는데 그는 본국인 교수로는 제일 먼저 부임하신 분이다.

이성휘 박사(1889-1950, 평북 철산)는 구약교수였다. 평양 서문밖교회의 동사목사(협동목사)로도 봉사하였다. 공산당의 박해로 순교하였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평북 벽동)는 나의 1학년 시절부터 교수하기 시작하셨다. 변증학 방면의 여러 과목들을 담당하셨다. 박 박사께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나를 소개해 주셨다.

당시 농촌 교회의 실정은 교역자 한 분이 너더댓 교회를 맡아 사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재학중에 어학(영어, 독일어) 공부도 힘썼는데, 언제나 독일어 문법책을 손에 들고 다녔던 것이 생각난다. 이처럼 어학에 치중했던 것이 후일 성경 주석 저술에 유익한 결과가 되었다. 이런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생각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나의 재학 당시 학생들의 숫자는 일백 명 내외로 생각되며, 거의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누구든지 한두 교시라도 결석할 경우에는 교장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보통으로는 신학을 공부하다가 한 학기 정도는 쉬면서 교회로 돌아가 목회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학생들은 졸업하기까지 5 년 혹은 6,7년 걸리기도 했는데, 이 같은 신학 교육 방법이 유익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목회하면서 신학 훈련을 받고 목사가 된 그들은 유력한 일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는 사명감 없는 사람은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사명감 없는 사람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맡게 되는 떼에, 직업목사들(종교업자들)이 많아지는 동시에 교계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지고 부패해질 수밖에 없다.

그 당시 재학생 몇 명(김진홍, 방지일, 필자)이 힘을 합하여 '겨자씨'라는 신앙지를 출판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잊을 수 없는 한 분이 있으니, 김린서(金麟瑞)장로(후에 목사, 1894-1964, 함남)이다. 부흥가이기도 한 그는 단독으로 '신앙생활'이란 신앙지를 출판하면서 진리를 파수하며, 교회의 세속화(世俗化)를 방지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던 특수한 지도자였다.

구세군영 예배실에 들어가 철야 기도를 하고, 이튼날 미 대사관 영사과로 찾아가 비자 신청을 하였다. 인터뷰 시간에 영사가 나에게 묻기를, "이 재정 보증인이 약속대로 실행할까요?"하며 나를 보았다. 이 때 나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대답하기를, "선생님이 더 잘 아십니다." 하였더니 영사는 씽긋 웃으며 나의 여권에 사증(visa)을 꽉 찍어 주었다.

태평양을 건너는데 17일이 소요된다고 하므로 나는 그 기간을 유익하게 사용하고자 요한계시록을 암송하기로 작정하였다. 쌘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에는 18장까지 암송한 것으로 기억된다. 거기서 다시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동쪽에 있는 필라델피아까지 한 주간을 달렸는데, 이 때에도 이미 암송한 부분을 계속 외우면서 갔다. 계시록의 나머지 부분(19-22장)은 학교에 다닐 때 아침마다 외워서 다 마쳤다.

필라델피아 한가운데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현재는 교외에 있음)에 도착하니 한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그 학교를 졸업한 김치선 박사(1899-1968, 함남 흥남, 일본 여러 곳과 서울 목회, 1960년대 초 합동서 나온 현 예장(대신)인 성경장로회 총회장)는 텍삭스에 있는 달라스신학교로 떠나간 후였다.


여름 방학 약 3개월 동안 학생들의 대부분이 학비를 벌기 위해 성경책 판매원이 되어 미국 각처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탄복하였다. 고향의 가족 소식을 받아 보면 봉투에 찍힌 소인이 약 두 달 전의 날짜였다. 개학해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주말에 교회의 초청을 받아 나가서 설교도 하였다.

어느 날 나의 실수로 미화 10불을 분실하고 그것 때문에 몇 시간 동안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깨달은 것은, 내가 돈을 잃고는 괴로워하면서도 영적 손해(믿음이 약해지거나 사랑을 못 가진 경우에 대하여는 괴로워할 줄 몰랐던 나 자신의 우매함이었다. 그 후 나는 그 돈에 대한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나는 유학 중에도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모친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시게 되기를 위해 계속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기도는 응답되어서 모친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성경을 사모하여 그 때부터 한글을 배워서 신구약을 일독하셨다고 한다.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어머니는 붓글씨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써서(책에 수록) 미국에 있는 나에게 보내주셨다. 나는 그 글을 받고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그 때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있는 동안 틈틈히 화란어를 자습하였다. 삼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 두 사람이(카이퍼, 바빙크) 화란 사람이니, 열심히 노력한 결과 화란어 주석과 교리학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약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36년 8월에 귀국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성경 원어 강사로 약 2년간 일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평양의 유일한 여자 성경학교였던 고등성경학교에 시간강사로 나가 성경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후에 나는 원어학과 변증학을 더 연구할 목적으로 1938년 8월에 웨스트민스터로 다시 갔다. 그 곳에 1년여 머물면서 뱀틸(C. Van Til)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변증학을 연구하였다.
1939년 10월에 동경에 가서 머물다 다음해 3월에 귀국하였다.

이 해에 나는 봉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3년 나는 만주신학교를 사임하고 약 이백 리 거리인 안산으로 내려가 성경 주석 저술에 몰두하고 있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1946년 6월 진해에서 60여의 수강생을 두고 신학 강좌 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란 명칭으로 부산에서 개교하였다. 설립자는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인데, 이들은 출옥성도이다. 한상동 목사께서 목회학 교수로 수고하였고 한명동, 이상근, 박손혁 목사 세 분은 강사로 협력하였다.


어려운 이 시점에 미국 선교사 네분이 가담하여 신학교 강의를 시작한 일은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한국과 만주에서 선교활동 중 신사참배 문제로 투옥되었다가 본국으로 추방되었고, 마두원, 최의손, 함일돈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세분은 강사로 협력했고, 한부선 선교사는 교수로서 여러 방면으로 협력하였다.

개교 2년 후에 이상근 목사(대구의 신약주석을 쓴 이상근 목사와 동명이인)와 김진홍(근래 유명한 김진홍 목사와 이름이 같음) 목사께서 교수로 취임하여 이 목사는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김목사는 구약학,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말씀운동을 힘쓰고 있었던 고려측에서는 박태선운동을 처음부터 외면하였다.


1950년, 6.25동란이 발발하기 전에 고려신학교에는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학교측에서도 강의를 전폐하고 학생들의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협력하였다. 이 기도운동이 고려고등성경학교(부산 부민동 소재)에서도 일어났고, 점점 퍼져 고려측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한국 땅에 환난이 이르기 전에 이처럼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대비하도록 하신 귀한 섭리였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 후 두어 달 지나서 6.25동란이 일어났고, 국군의 후퇴 작전으로 인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각지에서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광복동의 고신 교사도 한동안 피난교역자들의 수용소가 되었고, 초량교회당도 피난교역자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다. 특히 최의손 선교사와 함께 포로수용소를 찾아 다니며 설교를 많이 하였다.

특별히 그 해 9.28 수복이 있기 전에 초량교회당에서 열렸던 피난교역자 부흥회를 나는 잊을 수 없다. 강사로는 박형룡 목사, 김치선 목사, 그리고 나도 함께 협력하도록 되었다. 우리는 매일 새벽 기도회와 낮 성경공부, 그리고 저녘 집회를 인도하였다.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던 이들도 점차 가담하게 되었다. 사흘째 되던 날 새벽으로 기억되는데, 그 시간에 참석한 교역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크게 통회하며 자복하는 회개를 시작하였다. 그 뼈아픈 회개는, 각자가 과거 일제의 핍박시에 신사참배를 한 그 죄로 인한 것이었다.

한부선 선교사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1939년 봉천노회가 나(한부선)에게서 당회장권을 회수하려는 이유가 비진리와 타협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노회와 함께 일하기 어려운 입장에 놓였으므로 노회 명부에서 나의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그 다음해 봄노회 때 나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총회에서는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기는 커녕 그 결의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관계하던 하얼빈교회 앞에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종교법을 반대한 일로 인하여 노회와 갈라졌으며, 또 나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기 때문에 조선 예수교장로회와 갈라집니다." 하여 나의 신앙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나도 단 한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그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 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공고백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울산, 온산에서 집회를 열게 되었다. 그 곳은 전선(戰線)이 가까운 지역이므로(당시 낙동강 북방에서 격전 중이었으므로) 인심은 더욱 긴장되어 있었다. 그 집회에서도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제주도에도 무수한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다. 나는 한상동 이학인 두 목사와 함께 제주도로 내려가 서부교회당에서 피난민교역자들을 위한 집회를 한 주간 인도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은, 이처럼 교역자들의 통회, 자복의 회개가 있은 후에 유엔(UN)군이 승리하고, 공산군은 삼팔선 이북으로 물러가게 된 사실이다. 회개의 사건에 뒤이어서 승전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신 결과이다.

나는 신학을 더 연구할 목적으로 1953년 10월에 화란 자유대학으로 갔다. 그 곳에서 유학하던 중 54년 3월에 나는 뜻밖의 비보를 받고 즉시 귀국하였다.
내 나이 49세 때 미성년 5남매를 두고 아내(金英善)가 교통 사고로 별세한 것이다. 가정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해졌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근근이 6 개월을 지내고 가정을 다시 세워 나가기 위하여 그 해 10월에 현재 내조하고 있는 아내(李和主)와 재혼하였다. 때로는 펜을 들 수 없을 만큼 심적 고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런 때에도 집필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게 되었던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생각한다.

1960년. 성수주일(聖守主日)에 대한 의견 차이로 말미암아 나는 고신 그 당시 이사회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으므로 그 해 가을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신에 몸담고 있었던 동안에 탈고한 성경주석은 25권이다.

◎ 정암 박윤선 목사 자서전(1905-1988)
책제목: 성경과 나의 생애
출판일: 1992년 10월 1일 1판 1쇄, 동년 11월 5일 2쇄
출판사: 영음사, 260페이지




★ 박윤선 목사(1905-1988, 웨스트민스터, 평신교수, 고신교장, 총신교장, 합신원장, 한국최고의 주경신학자, 한국최초 성경 전권 주석, 90년대말까지 한국의 모든 목사들 서재엔 이분의 주석전집 20권이 꽂혀 있었다.)

★★ “다시 태어난다면 ‘구체적인 설교’를 하고 싶다” 라는 말을 남기셨다.



왼쪽부터 한부선, 주남선, 박윤선, 한상동 목사. 고려신학교를 설립시키고
http://surprise.or.kr/board/view.php?table=surprise_13&uid=12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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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3회 김종익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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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한국당의원들 모조리 엎어치기! 대정부 질의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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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욱이 같은 사람으로 골라 낙점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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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경찰 故 안병하치안감 31주기 추도식 편집국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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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비리 폭로하겠다며 문재인 협박 문재인 비리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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