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과 린든 존슨, 그리고 영화 『포레스트 검프』②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9-11)
아베 고다이阿部幸大
1987년생. 도쿄 대학 문학부 학사, 석사. 뉴욕 주립대학 박사 학위 취득. 쓰쿠바 대학 인문 사회계 조교, 미일 문화사 연구자.
『완전히 새로운 아카데믹 글쓰기 교과서』 『내러티브 피해학』 등의 저서가 있다.
■ 물려받는 전쟁
결국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1954년, 베트민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휴전에 합의했다.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임시 군사분계선으로 삼아 남북으로 나뉘었지만, 1956년에 베트남 전역에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므로 호찌민을 중심으로 베트남이 통일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친미파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앞서의 베트남국을 남베트남 정권으로 재편하고, 제네바협정의 통일 선거 조항을 사실상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남북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엠 정권은 남부에 남아 있던 옛 베트민 세력과 불교도, 농민 등을 탄압했다. 그에 맞서 1960년에 결성된 조직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다.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은 대통령은 존 F.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흔히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베트남 전쟁이 수렁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과 함께 거론된다. 그러나 군사고문단의 규모를 늘리고 악명 높은 고엽제 살포를 승인한 사람도 케네디였다. 어쨌든 이 글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1961년 해외 자원봉사 조직인 ‘평화 봉사단(Peace Corps)’을 창설하는 한편, ‘그린베레’로 불리는 육군 특수 부대를 대대적으로 쇄신했다는 점이다.
평화 봉사단은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교육과 의료 등을 지원하는 조직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냉전기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평화 봉사단원들이 해외로 떠날 무렵, 베트남에서는 대게릴라전의 비장의 카드인 그린베레가 ‘군사 고문관’이라는 이름으로 산악 민족을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케네디의 ‘뉴 프런티어’라는 이상은 이처럼 전쟁과 평화를 한 묶음으로 세계에 수출하는 미국 문화의 초석을 놓았다.
1963년 11월 1일, 케네디 행정부가 묵인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튿날 응오딘지엠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20일 뒤인 11월 22일, 이번에는 케네디가 암살되었다. 그리하여 케네디의 후임 대통령은 선거로 당선된 사람이 아니라,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바로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북폭을 감행한 린든 존슨이다.
이제야 이 글의 첫머리에서 다룬 시대로 돌아왔다. 지금까지의 서술이 보여 주듯, ‘존슨이 베트남 전쟁을 본격화했다’는 역사 인식만으로는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 전쟁의 기원은 늦어도 트루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탁 통치 구상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때부터, 아니,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젊은 호찌민의 청원서를 묵살한 우드로 윌슨 때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존슨은 물려받은 전쟁을 자신의 전쟁으로 만들기 위해 그 거짓말이 필요했을 뿐이다.
■ 쌍둥이 전쟁
케네디가 암살된 지 한 달 반가량 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갖은 수단을 동원해 선전포고를 회피해 온 나라의 새 대통령은 의회에서 당당하게 선언했다.
“우리 행정부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미국의 빈곤에 맞서 무조건 전쟁(unconditional war on poverty)을 선포합니다.”
1964년 1월,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기 약 반년 전의 일이었다.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무조건 전쟁’이라는 낯선 문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조건 항복’, 곧 제2차 세계대전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기억하는 미국의 ‘좋은 전쟁(Good War)’ 서사를 환기한다는 점이다.
둘째, 국내의 빈곤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훗날 닉슨의 ‘암과의 전쟁(War on Cancer)’, 닉슨이 시작하고 레이건이 확대해 나간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 클린턴의 ‘범죄와의 전쟁(War on Crime)’, 그리고 아들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수사가 탄생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1964년 5월 22일, 존슨은 케네디가 평화 봉사단 구상을 처음 밝힌 미시간대학교의 졸업식 연단에 올라, 미국은 풍요로운 사회에 머물지 않고 ‘위대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언제나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Great Society’라는 구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켰을까. 자유의 실현, 빈곤의 박멸, 그리고 세계 평화였다. 미국 대통령이라면 으레 그런 이상을 이야기하기 마련이지만, 존슨은 연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여러분은 ‘위대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싸움에 자원할 뜻이 있는가.”
윌슨의 징병과 케네디의 평화 봉사단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수사로, 존슨은 ‘위대한 사회’를 위한 ‘전쟁’에 나설 ‘자원자’를 모집한 것이다.
이리하여 국외에서는 ‘조건부’ 제한전쟁을 결의한 대통령이 거의 같은 시기에 국내에서는 무조건 전쟁을 선언했다. 베트남 전쟁과 빈곤과의 전쟁―두 전쟁은 1960년대 미국이 벌인 쌍둥이 전쟁이었다. 실제로 ‘빈곤과의 전쟁’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한 경제기회국의 초대 국장은 사전트 슈라이버였다. 그는 바로 케네디가 창설한 평화 봉사단의 초대 단장이기도 했다. 존슨은 그야말로 쌍둥이 전쟁을 동시에 키워 낸 것이다.
존슨은 ‘위대한 사회’를 추진할 예산을 의회에 요구하는 동시에 롤링 선더 작전을 개시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 비용은 불과 2년 만에 10억 달러에서 200억 달러로 불어났다. 반면 ‘빈곤과의 전쟁’에 투입된 예산은 베트남 전쟁 비용의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렇게 국내 ‘전쟁’의 예산은 국외의 전쟁에 모조리 잠식되었다. 존슨은 결국 쌍둥이를 함께 키우는 데 실패한 것이다.
■ 전쟁과 인종
베트남 전쟁에는 널리 알려진 사진이 많지만, ‘빈곤과의 전쟁’에도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이 있었다. 1964년 4월부터 5월까지 존슨은 ‘빈곤 투어’라 이름 붙인 현장 시찰에 나섰다. 투어 초기에 그는 켄터키주 아이네즈를 방문해,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의 현관에 앉아 톰 플레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플레처는 일자리를 잃은 야윈 남자로, 여덟 아이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물론 그는 이 행사를 위해 미리 신중하게 선정된 인물이었고, 주위에는 취재진이 빽빽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이 사진이 무엇을 선전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는가. 바로 ‘미국의 가난한 사람은 백인이다’라는 메시지였다.
미시간에서는 “신조나 인종, 피부색과 관계없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싸움에 자원할 뜻이 있는가”라고 물었던 존슨이, 정작 자신의 ‘전쟁’을 상징하는 인물로 선택한 것은 이른바 ‘힐빌리’로 대표되는 가난한 백인이었다.
여담이지만, 플레처가 백인이라는 사실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일본인에게 좀처럼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종종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 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격차라 할 젠더 격차는 미국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미국에는 그 위에 인종이라는 훨씬 더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가 한 겹 더 포개져 있다.
다시 말해, 인종 문제가 일본인의 일상과 동떨어져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백인은 흑인을 죽여도 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극심한 격차가 여전히 사회를 규정하고 있다는 현실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폭력은 일본에도 존재한다. 어쨌든 인종 문제는 일본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많은 사람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먼저 의식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쌍둥이 전쟁은, 바로 인종 문제였다. ‘빈곤과의 전쟁’이 구제했어야 할 흑인 청년들은, 대학 진학으로 징집을 유예받은 백인 중산층 청년들을 대신해 베트남으로 내몰리는 희생자가 되었다. 무하마드 알리가 징집 거부 의사를 밝히며 “나는 베트콩과 아무런 다툼도 없다”고 말하고, 자신을 흑인이라 비하하며 부른 적도 없는 베트남인들을 쏠 수 없다고 역설했듯이, 흑인에게 베트남 전쟁은 ‘백인의 전쟁’이었다. 흑인의 눈에 베트남인은 피부색으로 차별받는 ‘형제’였다.
그런데 베트남인은 미국 백인에게 어떤 차별을 받고 있었을까.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침략전쟁에서 대량 학살당했다. 미국이 벌인 여러 전쟁과 잔학 행위를 한번 조사해 보라. 그 표적이 언제나 유색인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전쟁은 곧 인종 문제다. 다시 한번 쓰겠다. 전쟁 자체가 추문이다.<3편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