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규수 / 2026-08-31)
100년의 이미지가 묻는 진실
11시 58분, 일상을 삼킨 미증유의 대재앙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단단한 대지가 구겨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상을 영위하던 제국 일본의 심장부가 무너져 내리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간토(關東) 평야 앞바다 사가미만(相模湾) 지하 깊은 곳에서 암반 단층이 파열되었다. 현대 지진계 척도로 규모 7.9에 달하는 강진이었다. 대지는 요동쳤고, 제국 일본이 문명국이라 자랑하던 서양식 붉은 벽돌 건물과 근대화 상징들은 단 10여 초 만에 붕괴했다.
“관동대지진 전체 지역 조감도”(關東震災全地域鳥瞰圖繪)
이 조감도는 대지진 발생 직후, 후지산부터 도쿄, 요코하마 등 간토 평야 일대의 피해 상황을 조망할 수 있도록 제작된 시각 사료다. 화면 좌측에 후지산을 배치하고, 그 아래 인구가 밀집한 도쿄와 요코하마 도심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 기둥이 동시다발적으로 치솟는 모습을 묘사했다. 사진과 영상 매체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이 조감도는 수도권 전체를 마비시킨 재난 규모와 위기감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사진 제공 = 이규수)
재앙은 땅의 흔들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각 가정과 식당에서 점심을 준비하던 정오 무렵, 도심 곳곳의 아궁이와 화로 불씨가 무너진 목조 건물 잔해로 쏟아지며 옮겨붙었다. 일본 열도로 북상 중이던 태풍의 영향으로 도쿄만에 초속 15미터 이상의 강풍이 불었고, 불씨들은 바람을 타고 ‘화염 폭풍’(Firestorm)으로 탈바꿈하여 도시 전역을 집어삼켰다.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는 순식간에 불지옥으로 변모했다. 피난민들이 가재도구를 챙겨 몰려든 도쿄 혼조구(本所区) 피복창(被服廠) 터에는 불기둥이 덮쳤다. 수만 명의 인파가 화염에 휩쓸려 희생되었으며, 이 지진으로 인한 공식 사망자와 실종자는 10만 5천여 명에 달했다. 통신과 교통이 두절된 요코하마를 비롯해 수도권 전체가 밀실로 변해버린 상황은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마비시켰다. 잿더미가 된 폐허 속에서는 자연재해를 넘어선 인위적인 참극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연재해의 장막 뒤에 숨은 ‘살인 면허’
조선인에게 관동대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 일본 국가 시스템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식민지 지배의 모순’과 타자를 배척하는 ‘배외주의(排外主義)’가 폭력적인 형태로 폭발한 제노사이드(집단 학살)였다. 재난 앞에서 위기감을 느낀 것은 이재민만이 아니었다.
“화염에 휩싸인 제국의 치안 심장부, 경시청”
이 사진은 제국주의 치안의 최고 사령탑이었던 도쿄 경시청 건물이 화염과 연기에 휩싸여 타들어 가는 참상을 보여준다. 국가 통제력 상징이자 폭력 기구의 심장부였던 경시청 붕괴는 단순한 화재 이상의 충격이었다. 이 광경은 당시 지배 엘리트들에게 하층 민중과 식민지인들에 의해 체제가 전복될 수 있다는 실존적 위기감과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도화선이 되었다. (사진 제공 = 이규수)
1919년 조선의 3·1 운동을 총칼로 진압했던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와 아카이케 미노루(赤池濃) 등 치안 수뇌부들은 수도가 마비되고 경시청마저 불타오르자 체제 붕괴에 대한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이들은 빈민층과 사회주의자, 식민지 출신의 조선인들이 결탁하여 체제를 전복할지도 모른다는 가공의 ‘내란 공포’를 조장했다.
내무성 경보국은 각 지방 장관에게 “조선인의 폭동에 대비하라”는 전보를 타전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폭탄을 던진다”는 유언비어는 자연발생적인 소문이 아니라, 국가의 공식 행정망과 언론 호외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간 ‘관제 가짜 뉴스’였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추밀원 자문이라는 헌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계엄령을 선포했다.
치안 통제권을 내무성에서 군대로 이관한 이 조치는, 조선인을 구호 대상이 아니라 전시 상황에서 무력으로 격퇴해야 할 ‘적군’으로 공인한 선전포고였다. 이는 국가가 이성을 잃은 민중과 군대에게 이방인에 대한 폭력을 승인해 준 ’살인 면허’와 다름없었다.
공포를 조작한 군대와 자경단의 광기
계엄령 선포 직후, 군대는 거리 질서를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대중 심리를 통제하고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살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국가 이름으로 승인하는 시각물들을 거리에 내걸었다.
“관동계엄사령부의 거리 포고문 - 음식물 주의”
이 포고문은 국가가 민중의 공포를 극대화하고 이방인을 향한 적대감을 합법화했는지 보여주는 사료다. 핏빛 강물과 붉은 화염 묘사 위로, 우측 하단에는 ‘관동계엄사령부(關東戒嚴司令部)’라는 국가 폭력 기구의 서명이 박혀 있다. 좌측에 쓰인 ‘음식물에 주의(飮食物ニ御注意)’라는 경고 문구는 당시 거리를 휩쓸고 있던 “조선인들이 우물과 식량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에 군사 당국이 공식적인 권위와 신빙성을 부여한 것이다. 생존 조건이 이방인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시각적 공포는 이성을 잃어가는 민중 뇌리에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멸의 당위성을 주입했다. (사진 제공 = 이규수)
이 선동에 ‘선도(善導)’된 일본 민중은 자경단을 결성했다. 재향군인회 지휘 아래 완장을 찬 시민들은 사형 집행관으로 돌변하여 인간 사냥을 시작했다.
“우시고메 가구라자카(牛込神楽坂) 경찰서에 압수된 자경단의 흉기들”
이 사진은 군경 비호 아래 자행된 폭력이 얼마나 원초적이고 고통을 수반했는지 증언한다. 사진 속 무기들은 고도의 살상 무기가 아니다. 죽창, 목검, 쇠몽둥이, 쇠갈고리(토비) 등 하층 민중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상 도구들이 주를 이룬다. 생업에 종사하던 이웃들이 이러한 도구들을 흉기로 삼아 수천 명의 생명을 난도질했다는 사실은, 이 폭력이 희생자들에게 얼마나 처절하고 긴 고통을 강요했는지 방증한다. (사진 제공 = 이규수)
자경단은 길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검문소를 세웠다. 통행인들에게 일본어 탁음인 “15엔 50전”을 발음하게 하여, 억양이 어눌한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도륙했다. 이 사냥망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발음이 달랐던 지방 출신 일본인, 청각 장애인, 중국인 유학생들까지 예외 없이 참살당했다.
공권력의 밀실 테러와 식민지 폭력의 역류
학살 현장에서 국가의 정규 군대와 경찰은 대중을 제지하려 한 ‘선의의 중재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대량 살상 무기를 동원하여 제노사이드를 주도하고 방조한 가해자였다.
“관동계엄지역 내 경비부대 배치 개요도”(警備部隊配置の概要)
이 군사 지도는 계엄령 선포 직후 제1사단 사령부 예하 보병, 기병, 포병 연대가 도쿄, 요코하마, 지바 등 수도권 일대에 진주했음을 보여준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부대 배치는, 이 작전이 인도주의적 구호가 아니라 무력 진압과 치안 통제를 목적으로 수도권 전체를 ‘병영 국가’이자 ‘사냥터’로 변모시켰음을 폭로한다. (사진 제공 = 이규수)
계엄사령부 지휘 아래 도심에 진주한 군대는 치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무방비 상태 민간인에게 통제를 가했다.
도쿄 한복판에서 벌어진 ‘가메이도(亀戸) 경찰서 사건’은 공권력이 주도한 폭주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보여준다. 경찰은 폭도로부터 보호라는 명분으로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 등 약 1300여 명을 백주대낮에 무차별 검거해 유치장에 억류했다.
“계엄령 하의 도쿄 만세이바시 정경”(戒嚴令下の東京萬世橋所見)
이 그림은 화염이 타오르는 밤, 도쿄 만세이바시(萬世橋) 길목을 통제하고 있는 무장 군경 모습을 담고 있다. 장총을 든 군인들은 불을 피워놓고 통행인들을 검문하며 늘어서 있다. 반란군 실체가 없는 상황에서, 정규군은 국가가 지목한 가상의 적을 색출하기 위해 도심 한복판에 진주했다. (사진 제공 = 이규수)
경찰서에 갇힌 수용자 항의로 통제 불능에 빠지자, 서장은 군대를 불러들여 경찰서 안에서 군인들이 수용자들을 기병창과 일본도로 찔러 죽이는 학살극을 자행했다. 이 밀실 테러로 노동운동가 히라사와 게이시치(平沢計七)를 포함한 청년들과 수백 명의 조선인이 도륙당했다. 일본 헌병대는 혼란을 틈타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부부와 일곱 살 조카를 헌병대 본부로 끌고 가 목 졸라 살해하는 ‘아마카스 사건’을 저질렀다. 재난이라는 예외 상태는 국가 권력이 반대파를 헌법 굴레 없이 숙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백주대낮의 강제 연행: 스다초(須田町) 부근에서 끌려가는 조선인들”
도심 거리에서 민중과 치안 당국에 의해 연행되는 조선인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 속 조선인들의 불안이 서린 표정과 강압적인 연행 분위기는 이것이 명백한 ’불법 검거’이자 인간 사냥이었음을 보여준다. 백주대낮에 끌려간 이방인과 노동자들은 구호 대신 밀실 테러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사진 제공 = 이규수)
민중과 공권력이 이방인을 향해 흉기를 휘두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식민지 전장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자경단을 이끌던 재향군인들과 계엄사령부 지휘부는 한반도와 만주 등지에서 의병과 독립군을 무자비하게 토벌했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도쿄의 폐허는 과거 자신들이 총칼을 휘둘렀던 ‘식민지 전장’으로 환유(換喩)되었다. “제국에 반항하는 조선인은 재판 없이 찔러 죽여도 무방하다”는 전장의 야만적 논리가 지진이라는 재난을 타고 일본 본토 일상으로 역류하여 폭발한 것이다.
망각의 벽을 깬 강덕상의 시선과 흑백의 증언
학살 실상이 알려질 조짐이 보이자, 문명국 체면을 중시하던 일본 정부는 은폐 공작에 돌입했다. 군사 작전 기록인 “계엄사령부 상보” 핵심 페이지를 뜯어내어 파기하고, 희생자 시신을 유족 몰래 소각하거나 아라카와 강변 등에 내다 버렸다. 국가가 생산한 문서 사료 자체를 조직적으로 증발시킨 것이다. 사법부 역시 학살을 ‘정당방위’로 포장하기 위해 조작된 ’조선인 범죄 목록’을 언론에 발표하며 진실을 비틀었다.
국가 주도 망각의 벽 앞에서 진실의 파편을 주워 모은 이가 재일 사학자 故 강덕상 선생이다. 그는 평생을 바쳐 헌책방과 벼룩시장을 누비며 버려진 시각 사료들을 수집했다. 공문서가 침묵을 강요당한 상황에서, 그가 찾아낸 그림엽서와 화첩, 흑백 사진들은 은폐된 진실을 복원해 냈다.
“망각의 벽에 맞선 연구자, 재일 사학자 故 강덕상 선생”
일본 국가 권력의 은폐와 침묵 카르텔에 맞섰던 재일 사학자 강덕상 선생의 생전 모습이다. 공문서가 침묵을 강요당한 상황에서, 그는 대학 강단 대신 일본 전역의 헌책방과 벼룩시장을 누비며 그림 엽서와 화첩, 흑백 사진들을 수집했다. 그가 모은 시각 사료들은 오늘날 역사를 왜곡하는 부정론자들 허위를 타격하는 무기이자, 은폐된 진실을 향한 이정표가 되었다. (사진 제공 = 이규수)
강덕상 컬렉션 속 이미지들은 인간 이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훼손된 시신 앞에서 피 묻은 흉기를 들고 미소 지으며 포즈를 취한 자경단원들의 ‘기념사진’은 그들이 조선인 사냥을 범죄가 아니라 조국을 구한 ‘애국적 쾌거’로 인식했음을 폭로한다. 뱃속에 태아 대신 폭탄을 품은 조선인 임산부를 극화하여 대중 적대감을 유도한 선전 엽서들은 어떻게 혐오 이미지가 인간 이성을 마비시키고 살육을 정당화하는지 보여준다. 이 시각적 물증들은 당시 폭력이 치안 부재 속 우발적 일탈이 아니라, 국가가 조작하고 대중이 가담하여 소비했던 ‘사회적 제노사이드’였음을 증명한다.
학살을 지우려는 자와 진실을 기억하는 자
100년 세월이 훨씬 지났지만,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망각하려는 자’와 ’기억하는 자’로 나뉜다. 일본 정부와 극우 세력은 국가가 없애놓은 문서를 근거로 “학살을 증명할 공식 기록이 없다”며 책임을 부정하는 기만술을 펼치고 있다. 하버드대 존 마크 램지어 교수는 과거 일본 사법부가 날조한 가짜 뉴스를 답습하여 “조선인 갱단 범죄가 실재했다”며 가해 논리를 옹호하는 궤변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내놓기도 했다. 이들의 역사 부정은 과거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처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상처를 다시 찌르는 진행형의 ‘구조적 폭력’이자 2차 가해다.
하지만 권력의 은폐와 억압 속에서도 진실을 좇고 연대하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1923년 당시 일본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는 당국의 방해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진상 조사에 앞장서며, 식민지 조선을 직접 찾아가 희생된 한인들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자체 조사를 통해 ‘6661명 피살’이라는 통계를 기록에 남겨 일제의 축소 조작을 논파해 냈다.
일본 사회 밑바닥 요코하마 노동자들은 경찰의 폭압적인 탄압 속에서도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 추도회를 강행했다. 1970년대부터는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단체와 향토 사학자들이 우익의 테러 위협 속에서도 사재를 털어 암매장된 유골을 발굴하고 위령비를 세우며 보편적인 인권 연대를 실천해 오고 있다.
다가올 야만을 막는 백신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망각되고, 망각된 역사는 다른 얼굴의 폭력으로 삶에 회귀할 위험을 안고 있다. 오늘날 도쿄와 오사카 등 일본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일 코리안을 향한 혐오 발언(헤이트 스피치)은 1923년 참극에 대한 진상 규명과 국가 차원 반성이 부재했던 역사적 토대 위에서 자라난 결과물이다. “조선인은 떠나라”, “재난이 오면 저들이 불을 지를 것이다”라는 혐오 언어는 100년 전 도쿄를 휩쓸었던 유언비어 메아리와 겹쳐진다.
우리가 100년 전 흑백 사진들을 피하지 않고 직시해야 하는 이유는 이웃 나라를 향한 복수나 증오심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타자에 대한 혐오를 경계하고, 합법적 무력을 독점한 국가 권력 폭주를 시민 이성으로 제어하며, 증오 사슬을 끊고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을 지켜내기 위해서다. 이것이야말로 혐오와 갈등이 만연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인권의 백신’이다.
강덕상 컬렉션 속 이름 없는 희생자들의 훼손된 주검은 100년 세월을 건너와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들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다가올 시대의 야만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비극의 역사 앞에서, 이제 우리가 온전한 기억과 연대로 그 질문에 응답해야 할 차례다.
이규수
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한국근현대사 전공. 역사문헌을 바탕으로 근현대 일본인의 한국인식과 상호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강덕상 소장자료의 정리와 분류, 목록화 작업 등의 기초작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출처: 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