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외롭게 싸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④
100년 전, 일본에서 국가 권력에 저항한 무정부주의자의 투쟁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8-14)
모리 마유미森まゆみ
1954년생. 작가이자 시민운동가.
저서에 『오가이의 언덕』『이치요의 사계』『센다기의 소세키』『고집불통의 사람―하니 모토코와 그 시대―』『‘세이토’의 모험―여성들이 모여 잡지를 만든다는 것―』『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시키의 소리』등이 있다.
■ 날조 사건과 천황제 비판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불을 지른다”, “조선인 수백 명이 로쿠고 나루를 건너 수도를 기습했다”와 같은 유언비어가 퍼졌고, 행정과 경찰은 이를 확산시켰다. 그리고 9월 3일에는 정식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이란, 비상사태를 이유로 군대가 자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도록 하는 포고이다.
실제로 초기 학살은 자경단보다 경찰과 군대가 자행한 경우가 많았다. 재일 조선인은 많게는 6,618명이 살해되었다고 하며(내각부 전문 조사회 보고서도 1,000명에서 5,000명 사이로 추산한다), 중국인도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조선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된 일본인이 수백 명에 이르렀고, 사회주의자 등도 이 기회를 틈타 체포되어 살해되었다(가메이도 사건, 아마카스 사건 등).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9월 3일 보호검속되었다. 이는 자경단의 민중 폭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다음 날 경찰범 처벌령에 따라 29일간 구류되었고, 10월 20일에는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이치가야 형무소에 기소․수감되었다. 취조 과정에서 죄명은 계속 늘어났다. 이듬해 2월에는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혐의가 추가되었고, 여기에 다시 1925년에는 황태자(훗날 쇼와 천황)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대역죄 혐의까지 적용되었다.
“황족은 정치의 실권자인 제2계급(대신 등)이 무지한 민중을 속이기 위해 부양하며 이용하는 가엾은 괴뢰이자 꼭두각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박과 함께 결혼식 때 ‘도련님’(황태자)에게 폭탄을 올리자는 이야기를 줄곧 나누었습니다.”
예심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철저하게 천황제 비판을 전개한다. 1910년 고토쿠 슈스이 등의 대역 사건이,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겠다는 몇몇 사람의 몽상과 결부시켜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까지 사형에 처한 날조 사건이라면, 이 다이쇼 대역 사건 또한 실행된 행위가 아니라 몽상 자체를 재판해 처벌한 날조 사건이다.
1926년 3월 25일, 사형 판결. 10일 뒤, 은사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박열은 감형 통지를 받아들였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그것을 발기발기 찢어서 버렸다. 박열은 지바 형무소로, 후미코는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7월 23일 아침, 후미코는 감방 안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형무소 측은 후미코를 교외 묘지에 매장했다. 7월 31일 새벽, 동지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와 변호사 후세 다쓰지 등이 갓센바 묘지에 묻혀 있던 후미코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미 부패한 상태였지만 화장한 뒤, 박열의 형 박정식(朴庭植)이 유골을 인수했다. 그리고 박열이 태어난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의 산속에 안장했다.
나는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무작정 호텔 프런트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모두 “금자문자”라고 입을 모아 말하며, “우리 사장이 박열 현창회 회장입니다”라고 했다. 그에게 전화해 먼저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를 참배하고, 다음 날 그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때는 겨울로, 눈이 있고, 반은 언 강가의 길을 따라가자, ‘金子文子’라고 한자로도 쓴 하얀 간판이 눈에 띄었다, 거기서부터 고사목이 즐비한 산으로 들어가, 가파른 비탈길에 차를 세운 뒤 나머지는 걸어 올라갔다. 여기는 팔령리다. 언덕을 200미터 정도 올라가자, 산자락 깊숙한 곳에 가네코 후미코의 묘가 있었다.
당신, 이런 곳에 잠들어 있었군요.
■ 그 뒤의 후미코, 그 뒤의 박열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피고 후미코는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황폐한 가정에서 자라 일찍이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떠돌며 갖은 고생을 겪은 끝에 혈육의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고, 효도를 부정하며, 권력을 저주하고, 황실을 멸시하여 마침내 허무주의 사상을 품기에 이르렀다.”
후미코는 이렇게 말한다.
“천황은 우리 평민과 다른 인간이 아닙니다. 눈이 둘이고 입이 하나이며, 걷기 위해서는 다리가 있고 일하기 위해서는 손이 있습니다. 다만 그 다리로 걷지 않고 그 손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천황이 전후 인권 선언을 하기 20여 년 전의 말이다. 또 하나.
“박열과 나는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둘이 하나가 된 삶이 아니었다. 서로 독립된 두 사람의 삶이었다. 어떤 개성도 다른 개성을 흡수할 권리는 없다. 박열이 박열의 길을 걷듯, 나는 나의 길을 걷는다.”
박열에 대해 조금 더 덧붙이자면, 그는 조선 시대 양반으로 불리던 집안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과 『자치통감』 등을 공부했다. 두뇌가 명석하고 성품이 곧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남루한 차림의 노파를 보고는 어머니에게 “예쁜 치마를 드리라”라며 울며 조르던 아이였다. 경성의 공립학교에 진학했는데, 이 학교는 엘리트 코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전단을 뿌렸다. 식민지 조선의 총독부는 독립운동을 고문까지 동원한 가혹한 탄압으로 억눌렀다. 박열은 조국에서는 더 이상 활동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후미코를 만난다.
“박열은 일본의 패전으로 22년에 걸친 긴 옥살이를 마치고 아키타 형무소를 나왔습니다. 그는 영웅으로 대접받았고, 재일 한국 거류 민단 단장을 지냈으며, 재혼해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습니다”라고 다음 날 만난 박인원 씨는 말했다. “곧바로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박열은 북한으로 끌려갔어요. 거기서도 의로운 지사로 대우받아 일흔이 넘도록 건강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그곳에는 묘가 없는 겁니다.”
일본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반체제 아나키스트였지만, 한국에서 박열은 애국적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의로운 지사로 기려지고 있는 듯했다. 후미코의 묘도 이미 없어졌다고 했다. 문경시 교외에 세워진 박열 의사 기념관의 넓은 부지로 이장되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들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2018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에 서훈되고,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다리 사이로 남을 보지 않고, 세상 꼴을 거꾸로 보고 싶어서
나는 그 뒤 서울로 돌아와, 박열이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과도 만났지만, 가네코 후미코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는 2017년 야마다 쇼지의 해설을 붙여 이와나미문고에서 출간된 뒤 11쇄를 거듭하고 있다. 정리된 자료는 이 수기밖에 없지만, 스즈키 유코가 엮은 『가네코 후미코, 나는 나의 삶을 산다』(梨の木舎, 2006년)에는 상세한 연보와 단가도 수록되어 있다. 후미코를 잊지 않고 사후 100년 동안 재판 기록과 단가 작품을 꾸준히 주목해 온 사람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기본적 인권을 유린당하고 자란 가네코 후미코가 천황제야말로 모든 차별의 근원이라는 생각에 도달한 것은 그녀가 이룬 사상의 근간이다. 그것을 재판에서 끝까지 호소해 낸 그녀에게, 그 삶은 비록 짧았지만 충분하지 않았을까. 쓰루미 슌스케가 말했듯이, 그녀의 사상은 번역서를 통해 받아들인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그녀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국가에 맞서 홀로 선 존재’라는 자각에서 형성된 것이다.<끝>
(『세카이』, 202608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