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외롭게 싸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③
100년 전, 일본에서 국가 권력에 저항한 무정부주의자의 투쟁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8-12)
모리 마유미森まゆみ
1954년생. 작가이자 시민운동가.
저서에 『오가이의 언덕』『이치요의 사계』『센다기의 소세키』『고집불통의 사람―하니 모토코와 그 시대―』『‘세이토’의 모험―여성들이 모여 잡지를 만든다는 것―』『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시키의 소리』등이 있다.
■ 동지 박열
후미코는 현이라는 조선인과 사귀었지만, 부잣집 아들이자 사회주의자였던 그에게 농락당하고 버림받은 적이 있다. 그는 이제 독일로 유학하러 간다며 후미코의 곁을 떠났다. 그때 박열이 나타났다. 박열은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보여 준 「강아지」라는 시가 후미코의 가슴을 울렸다.
후미코는 스스로 박열에게 교제를 신청했다.
“저는 일본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선인에 대해 특별한 편견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당신은 저에게 반감을 갖고 계신가요?”
“아니, 제가 반감을 갖는 것은 일본의 권력 계급입니다. 일반 민중은 아닙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제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쯤에서 옥중 수기는 끝난다. 그 뒤의 일은 간략히 적어 보겠다. 두 사람은 동거하며 ‘불령사’(不逞社)를 결성하고, 『후토센진』(『太い鮮人』)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한다. 조선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던 시대에 ‘박문자’(朴文子)라는 명함을 들고 조선 인삼을 팔러 다녔다는 후미코의 용기는 놀라울 따름이다.
결사에는 일본인을 포함해 20여 명이 참여했다. 니야마 하쓰요와 그의 파트너 김중한(金重漢)도 있었다. 그러나 박열과 김중한의 노선 대립 끝에 후미코와 하쓰요도 결사를 떠나고 만다.
■ 벗,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
여기서 잠시 니야마 하쓰요를 소개해 두겠다. 자서전에서도 “내 평생 내가 찾아낼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여성”이라고 그리워하며 회상한 벗이었다.
후미코와 하쓰요는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서 1922년 1~2월 무렵 처음 만났다. 하쓰요는 후미코보다 두 살가량 위였으며, 혼고 기쿠자카(本郷菊坂, 도쿄도 분쿄구)에 본가가 있었다. 도쿄 부립 제일 고등여학교에 입학했는데, 하니 모토코(일본 최초의 여성 저널리스트), 야나기 가네코(성악가), 다무라 도시코(소설가), 사와무라 사다코(영화배우) 등을 배출한 유서 깊은 학교였다. 2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본인도 결핵에 걸려 요양 생활을 했다. 제일 고등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세이소쿠 타이피스트 학교에서 영문 타이프를 배워 영국인이 경영하는 회사의 사무원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직업이었다.
1922년 11월부터 혼고 호라이초 18번지에 잡화점 겸 과자 가게를 열어 자립했다. 현재의 지명으로는 무코가오카 2초메, 혼고 거리의 신조지(真浄寺) 옆이다. 이는 시타야구 류센에서 잡화점을 열었던 히구치 이치요를 떠올리게 한다. 결핵을 앓던 그녀는 본가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시와 와카(和歌), 소설에 관심이 많았고, 독서도 즐겨 했다. 세이소쿠 영어 학교 야간부에서 후미코를 만나 후미코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후미코는 니야마를 통해, 독일의 철학자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러시아의 소설가 미하일 아르치바셰프(Mikhail Artsybashev),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등을 알게 되었다. 지병 탓도 있었던 니야마는 허무주의에 기울었고, 1923년 7월에는 고마고메가타마치(駒込片町)의 노동운동사(勞働運動社)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달 말에는 자택에서 강연회를 열기로 하고,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아나키스트)에게 강연을 부탁했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니야마는 간토대지진 뒤인 9월 24일 특고에 연행되어, 신문으로 결핵이 악화, 11월 20일 시바구의 협조회 병원에서 죽었다는 설과, 11월 27일 옥사했다는 설이 있다. 스물두 살이었다. 묘는 야나카의 호조인(法藏院)에 있다. 나는 오랜 친구이자 후미코에 대해 정통한 가메다 히로시 씨와 함께 찾아가 보았다. 사망일이 11월 27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옥사했을 것이다. 교도소 직원들이 다급히 병원으로 옮겼는지도 모른다. 니야마와의 만남으로, 후미코는 다소 허무주의에 기울었지만, “비록 우리가 사회에 이상을 품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우리의 일이 있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4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