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④
트럼프의 집권을 초래한 미국 공화정 250년사
(WWW.SURPRISE.OR.KR / 김종익 / 2026-07-15)
마쓰바라 히로유키松原宏之
1971년생. 히토쓰바시 대학 사회학부 졸업.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크루즈 캠퍼스 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 교수.
『벌레 먹는 근대 ― 1910년대 사회 위생 운동과 미국의 정치 문화』『‘오늘’을 생각하는 미국사』 등의 저서가 있다
■ 트럼프 정권 탄생의 토양
흔히 제기되는 설명은, 1970년대 이후 중간계층의 몰락이 결국 2017년과 2025년 두 차례의 트럼프 정권 탄생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시야를 1970년대 이후로만 한정하면, 무대의 주역은 쇠퇴한 제조업 지역의 노동자들이 되고, 사태는 오로지 경제 구조의 변화로만 보이게 된다.
그러나 250년의 역사에 비춰 보면, 1970년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보수파 자본가들의 운동도 시야에 넣어야 한다. 20세기 중반 쓰라린 패배를 맛본 세력은 뉴딜 체제의 지지층을 떼어 놓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그 전략들은 예상 밖의 큰 효과를 거두었다.
쇠퇴한 제조업 지대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지해 온 민주당을 버렸다는 설명은, 그 ‘노동자’들이 인종적 타자에 대해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고, 젠더 규범의 유지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인종과 젠더의 경계 의식을 자극하는 것은, 과두정 연합을 떠나 뉴딜 체제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시민적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 타자를 발판으로 삼는 민주정의 오래된 악습을 다시 불러내는 전략이었다.
제1차 트럼프 정권 아래에서 주목받았던 반정부 민병 조직과 백인 우월주의 운동 또한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었다. John Birch Society로 대표되는 1950년대의 씨앗은 베트남 전쟁 이후 퇴역 군인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준군사적 네트워크로 태동해 세력을 키워 갔다. 1970년대 이후 표면화된 이 운동의 기반은 이미 전후 시기에 형성되고 있었으며, 군대에서의 폭력적 경험과 인종 질서의 유지를 요구하는 의식은 수면 아래에서 서로 이어져 있었다.
극우 세력은 이제 더 이상 고립된 이단이 아니다. 뉴딜 체제 아래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싱크 탱크와 대학, 종교단체는 물론 풀뿌리 조직과 라디오․TV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오랫동안 배양해 온 토양 위에서, 정부에 대한 민간 무장봉기를 그린 윌리엄 루터 피어스의 소설 『터너의 일기』(『The Turner Diaries』, 1978년) 같은 상상력이 꽃피었고, 이를 모방하듯 민간 무장 집단도 점차 늘어 갔다.
1996년 보수 성향의 TV 방송사인 Fox News가 개국하면서, 보수파는 대중매체에서도 확고한 거점을 확보했다. 더욱이 인터넷이 보급되자 기존 주요 언론의 바깥에서 보수 성향의 뉴스 사이트들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여기에 SNS를 통한 음모론까지 더해지면서, 과거 주요 신문과 TV 방송이 게이트키퍼 역할을 맡았던 뉴스 생태계는 크게 달라졌다. 이제는 제도 밖의 실력 행사도 서슴지 않는 극우적 경향마저 공론장의 한 축을 이루는 상황에 이르렀다.
반공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반정부 사상, 음모론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파 진영의 공간을 확대해 갔다. 극우 세력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온건해 보이는 보수주의를 상식적인 선택지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정치 담론의 중심 자체가 점차 우경화되어 갔다.
공화당 자체의 변질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풀뿌리 보수 운동과 복음주의 세력, 반공 네트워크, 대형 기부자들의 자금 지원은 오랜 시간에 걸쳐 공화당 내부의 주도권 판도를 뒤바꾸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공작은 입법부와 선거에만 그치지 않았다. 법조계와 사법부에 대한 개입 역시 학문적․재정적 지원을 통해 꾸준히 이루어졌다. 최근 투표권법을 둘러싼 사법 판단의 변화도 그러한 흐름의 한 귀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의적인 선거구 획정을 금지한다는 연방의회의 합의를,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에서 다수를 차지한 6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서슴지 않고 뒤집었다.
일련의 현상을 노동자들의 투표 행태와 같은 제도 내부의 변화로만 이해해서는 본질을 오판하게 된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뉴딜 체제를 전복하려는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제도권 안의 보수 세력과 제도권 밖의 과격 세력이 서로를 보완하며 전개해 온 운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보수파 자본가들에게 최종 목표는 뉴딜 체제의 해체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제2차 트럼프 정권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현상 파괴 지향 역시 체제 전환을 위한 공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연방 관료 기구에 대한 공격은 국익을 해칠 우려가 있을 정도지만, 그것은 뉴딜 체제를 떠받쳐 온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엎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 연구를 포함한 학술계에 대한 적대와 미국이 스스로 구축해 온 국제질서를 허물려는 움직임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타도해야 할 뉴딜 체제의 산물로 여겨진다. 2026년 가을 중간선거를 향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이 선거가 과연 평온하게 치러질지는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다.
■ 테크 억만장자(Technology Billionaire)
이러한 움직임은 리버럴 데모크라시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반동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민주정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모습에서 벗어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노우에 히로타카가 지적하듯,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에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글의 관점에서 다시 말하면, 공공선을 실현하는 방식에 관한 공화정적 비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특이한 개인에게만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리버럴 데모크라시와 민주정을 당연한 기준으로 전제하지도 말며,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보수파 자본가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복음주의 세력에서 극우 활동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기반으로 결집․재편된 각종 보수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검토해야 할 대상은 실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서도 새로운 과두정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테크 억만장자들은, 이 글에서 살펴본 공화정의 계보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AI와 정보 기술을 기반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 신세대 자본가들은, 자신들을 단순한 기업 경영자가 아니라 국가와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 남부의 노예제 대농장주들이, 공공선을 담당할 유능하고 덕망 있는 재산가야말로 공화국을 이끌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모습과 닮아있다. 국가를 이끌 자격이 있는 소수라고 자임하는 오늘날의 테크 억만장자들은 민주정과 사회 복지 국가를 흔히 비효율적인 체제로 치부하며, 기술과 전문 지식에 의한 통치를 강하게 지향하고 있다.
이를 비민주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이 과연 유효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공공선이다. 1970년대 이후 뉴딜 체제는 많은 실업자와 빈곤층, 소외된 사람들에게 풍요와 같은 ‘좋은 것’조차 제공하지 못했던 것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가 기술 혁신의 돌파구를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공공선을 실현하는 데 민주정만이 유일한 해법일까. 이러한 물음들은 충분한 숙고를 요구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미국은 과두정으로 향하는 걸까?
누가, 그리고 어떻게 공공선을 실현할 것인가. 미국 사회에 끊임없이 울려 퍼져 온 이 물음은, 종종 공화정적 비전에 손을 들어 주었고, 오늘날에도 테크 억만장자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과두정의 등장을 낳고 있다. 그것은 소수에 의한 지배이다.
그러나 이 글의 논지를 뒤집어 보면, 공화정이 언제나 옳았던 것만은 아니다. 공공선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과 ‘행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쟁점이 된다. 재산을 가진 사람이나 자신이 거시적 안목에 서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아무리 사회를 이끌고, 자신의 부를 성공의 증표로 과시한다 해도, 공공선이 실현되었는지는 결국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무수한 사회 운동이 부정의를 고발했고, 사회는 다른 형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우위를 점했던 뉴딜 체제 역시, 공공선을 실현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렸을 때 어떤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한 사례이다.
지금 포스트 1970년대의 미국은 유례없는 빈부 격차를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정권 관계자들은 공공연히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이를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다. 고율 관세 정책에서 이란 전쟁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축적되고 있다.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 결과가 오히려 미국을 궁지로 내몰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공공선의 범위와 내용도 다시금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뉴딜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동원된 극우 운동은 리버럴파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화당의 전통적 보수 주류마저 밀어내면서 공공 영역 자체를 기능 부전에 빠뜨리고 있다. 기술 혁신을 가속화해 이러한 난국을 돌파하려는 시도 역시 그 성과를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테크 억만장자에서 보수 논객에 이르기까지 공공선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기후 붕괴’를 비롯해 손을 대지 않는 과제 또한 너무나 많다.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러 정치적 조류의 경합 과정을 염두에 두고, 미국의 향방을 신중히 지켜봐야 한다. <끝>
(『세카이』, 202607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