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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16
  번호 130565  글쓴이 강진욱  조회 201  누리 0 (0,0, 0:0:0)  등록일 2021-9-14 11:18 대문 0

[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16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WWW.SURPRISE.OR.KR / 강진욱 / 2021-09-14)

 

16. ‘허수아비 안기부장’ 노신영

1981년 5월 말 유학성 안기부장 등 남한 정보부 책임자들을 미국으로 불렀던 부시가 11개월 만에 서울에 와 전두환과 나눈 ‘밀담’에 대해 청와대 대변인 이웅희(李雄熙, 전 동아일보 기자)는 다음과 발표했다.

[전두환 대통령과 부시 부통령은 26일 45분간의 단독 요담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세를 함께 우려하며 자유 진영이 결속하여 이에 대처할 필요성이 긴요하다는 등 국제정세 전반에 관해 의견을 교환 ... 부시 부통령은 특히 “미국 조야의 한국에 대한 호감은 확고하다”고 ... 이 대변인은 단독 요담 중 한.일 경협 문제와 최근의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고 ... 부시 부통령은 요담이 끝난 후 레이건 미 대통령의 친서를 전했다.] (<경향신문> 1982.4.27)

현안인 “한일 경협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일절 이야기가 없었다”는 말은 사족(蛇足)이다. 정작 해야 할 말이 없거나 못 할 때는 이처럼 안 해도 될 말을 갖다 붙인다. 하긴, 부시가 양측 배석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계획을 바꾸어 단독으로 전 대통령과 55분 동안 요담”(<연합통신> 1982.4.27)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발표하면 되겠나.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 출신답게 적당히, 그럴듯하게 둘러댄 것이다. 다만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세”를 우려하며 이에 “대처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는 말 속에서 둘이 ‘반소반북 공동전선’에 따라 뭔가를 도모(획책)한다는데 합의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는 있다. 부시의 방한은 1982년 1월 초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대신 국무장관 헤이그가 오는 것으로 돼 있었다.

[정부는 지난해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에서 거둔 성과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양국의 기존 우호관계를 한층 심화하는 한편 미국의 대한 이해를 제고한다는 목표 아래 한.미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오는 5월 22일을 전후하여 미 정부 고위층 인사의 방한을 추진... 외무부의 한 소식통은 7일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고 전하고 그 대신 헤이그 국무장관의 방한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했다.] (「헤이그 미 국무 등 5월에 방한 추진」<경향신문> 1982.1.7)

( 동아일보 1982.1.7)

“미국의 대한 이해 제고”니 “한.미 우호통상조약 체결일” 따위는 일종의 구실이고 요체는 “지난해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에서 거둔 성과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지난해 전두환의 방미 성과’란 미국에 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1차 비동맹 순방 외교 및 이를 계기로 본격화된 ‘전두환 시해 음모 쇼’였다. 그러면 “그 성과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킨다”는 말은 북측을 악마화하는 자작테러 쇼를 1982년에도 계속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1983 버마 사건’을 결행하기 위한 1차 리허설에 이어 2차 리허설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5월께 방한할 것이라던 헤이그 대신 부시가 직접 오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시의 방한 계획이 알려진 것은 3월 말. 한국 외무부는 부시 부통령이 4월 하순 동남아·태평양 국가들을 순방하면서 한국에 올 것이라고 발표했다.

[조지 부시 미국 부통령이 유창순 국무총리 초청으로 오는 4월 하순 한국을 공식 방문한다고 ... 부시 부통령은 방한 기간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 유창순 국무총리, 노신영 외무장관 등 정부 고위 지도자 등을 차례로 만나 두 나라 간의 긴밀한 우의를 재확인하고 두 나라 간의 공동 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나눌 예정 ... 부시 부통령의 이번 방한은 한국을 비롯, 일본,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태평양 연안 국가에 대한 친선 순방의 일환 ... ] (<조선일보> 1982.3.26)

(사진 좌 : 조선일보 1982.3.26) (사진 우 : 경향신문 1982.4.22)

레이건은 ‘1983 버마 사건’이 완결된 지 두 달 뒤인 1983년 11월에 한국에 와 ‘북괴의 아웅산 테러’와 ‘소련의 KAL 007편 격추(1983.9.1)’를 규탄하면서 미국과 일본, 한국 3자 간 대북대소 적대 공생체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런 수순에 따라 1982년에는 부통령 부시가 온 것이다. 그러나 정작 부시가 무엇을 하러 오는지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에 붙여야 했다. 그러니 또 둘러댄다.

외무부 관계자는 “부시 부통령의 이번 방한이 한-미 수교 100주년을 맞아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양국 간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며, 특히 작년 2월 양국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주한미군 철수 백지화와 대한 안보 결의를 재다짐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했다. 매우 의례적인, 하나마나한 말이다. 부시가 이렇게 한가한 일로 한국에 올까. 커가는 궁금증을 해소하려 했는지 부시는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서 방한한다”는 이야기를 외신을 통해 흘렸다.

[【워싱턴=연합】조지 부시 미 부통령은 방한 중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할 것이라고 미 정부의 한 소식통은 밝혔다. 미 정부 소식통들은 도 부시 부통령이 방한 일정을 마치면서 유창순 국무총리와 공동성명을 채택, 미국의 주한미군 불철수 정책을 재확인하고 경제·문화 분야의 협력 증진에 관한 합의 사항을 발표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82.3.26)

부시의 방한 일정이 최종 확정된 것은 4월 15일이었다. 부시는 4월 25일 오전 서울에 도착, 2박3일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국군묘지와 캠프 리버티벨 미군부대를 방문하고, 26일에는 청와대로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하고, 27일 오전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가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 일정을 한국 측에 통보하는 과정이 특이했다.

[【워싱턴=최용길 특파원】유창순 국무총리 초청으로 오는 25일 서울을 방문하는 조지 부시 미 부통령은 15일 하오 유병현(柳炳賢) 주미대사를 백악관 집무실로 초청, 그의 방한 일정을 비롯 한.미 관계 전반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경향신문> 1982.4.16)

대통령 또는 부통령의 해외 순방 일정은 국무부가 현지 해당국 대사관에 알리는 것이 상례다. 한국 외무부가 밝힌대로 부시의 방한이 고작 “한-미 수교 100주년을 맞아 양국 간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부시가 직접 주미한국대사를 불러 자신의 방한 일정을 일러줄 필요가 없다. 이는 공식 외교라인을 제치고 ‘비선’이 움직이는 모양새다. ‘1983 버마 사건’은 청와대나 안기부 비선 조직이 주동한 사건임을 상기하자. 부시는 4월 22일 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오르면서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또 하나마나한 소리를 늘어놨다.

[【워싱턴=최용길 특파원】오는 25일 방한에 앞서 이날 백악관 행정실 부관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부시 부통령은 자신의 방한에 대해 “한국 지도자들과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이지만 [강조]어떤 새로운 제안을 들고 가는 것은 아니며 또한 한국 지도자들에 대해 어떤 부담을 촉구하기 위해 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강조]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고 강조 ...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창의적인 대북 제의를 높이 찬양하며 모든 한국 사람들이 이 제안을 지지하고 있어 새로운 제안이 더 이상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또 한국 행정부는 대단히 훌륭한 솜씨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한국에 대해 어떤 특별한 소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1982.4.22)

자신의 방한 목적에 특별한 것은 없다는 말이었다. <연합통신>은 부시의 말을 “특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워싱턴=연합】조지 부시 미 부통령은 21일 한미관계가 현재 극히 양호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이번 한국 방문이 한미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며 어떤 특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 한반도 긴장 해소를 위한 전두환 대통령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매일경제신문> 1982.4.22)

부시의 ‘워딩’이 무엇이었든 부시네와 전두환네가 공개적으로 밝힌 것만으로는 그의 방한에 쏠리는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사실 그대로 밝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왜 한국에 와 전두환과 밀담을 나눴는지는 이후 일어난 일을 통해 추리할 수밖에 없다. 그가 다녀가고 나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고, 이런 일들이 종국에는 ‘1983 버마 사건’으로 귀결됐다.

그 이상한 일들 중 하나가 노신영을 안기부장으로 보내는 ‘인사 공작’이었다. 전두환 정권 출범 때부터 외무장관이 돼 한.미의 비동맹 외교전선을 지켜 온 그를 갑자기 안기부장으로 보낸 것은 ‘버마 공작’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부시가 다녀간 지 한 달이 채 못 된 1982년 5월 하순 전두환이 노신영을 불러 “노 장관도 정치를 좀 알지요?”하고 물었단다. 그리고 며칠 뒤 또 부르더니 “최근 유학성 안기부장을 만난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신영은 곧바로 남산 안기부 청사로 가 안기부장 유학성을 만났다. “조금 전 대통령께서 최근 유 부장을 만난 일이 있느냐고 물으시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유학성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며칠이 지난 6월 1일 전통은 다시 노신영을 불러 “안기부장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노신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극구 사양했지만 전통은 “그 자리에 오래 있으라고는 안 할 테니 어서 내려가 이·취임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노신영은 이날 귀가해 부인으로부터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충격이 컸다고 회고한다. 그와 부인은 “그날 밤 온갖 상념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다음날 마지막으로 고사의 뜻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한다.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고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지만 전두환은 노신영을 만나주지 않았다. 대신 낮 방송을 통해 그의 안기부장 발령을 확정 발표했다.

(『노신영 회고록 313쪽)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노신영을 안기부장에 앉혀야만 했던 이유는 한 해 전인 1981년 8월 초 수도경비사령관에서 물러난 박세직 등 육사 12기들이 주축이 된 ‘812 계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는 ‘평양의 주석궁을 폭파’한다는 목적 아래 북파공작원들을 양성하는 계획이었다. ‘아웅산 작전’에 투입된 세 명의 공작원(범인)들은 어쩌면 ‘북괴와 친한 버마에 북괴의 누구누구가 오니 그들을 처치해야 한다’는 거짓 명령을 수행했을 것으로 본다.

( 박세직 사진)

이렇게 은밀한 작전을 벌이던 박세직은 아웅 산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갑자기 ‘안기부 2차장’ 직함을 달고 나타난다. 그가 안기부와 치안본부 내 폭파(특수공작) 전문가들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을 이끌고 버마로 갈 때였다. 두 달여 전 그를 한국전력 부사장에 임명한다는 발표만 있었을 뿐, 이후 그를 안기부 2차장에 임명했다는 말은 없었다. 사실은 그가 안기부 2차장으로서 ‘버마 사건 진상조사단’을 이끈다는 것도 비밀에 붙여져야 할 사안이었다. 그의 안기부 내 직책을 갑자기 드러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조선일보> 취재망에 잘 못 걸려든 것이다. 실제로 진상조사단장을 다른 이라고 보도한 언론사도 있었다(앞글 8편).

박세직은 이미 - 안기부장 특보 또는 안기부 차장보 등 - 안기부 내 비공식(위장) 직함을 달고 수상한 작전을 벌여야 했다. 그 은밀한 작전을 안기부장 모르게 본격적으로 수행해야 할 시점에, 눈 뜬 장님 흉내를 내며 딴전을 피워줄 안기부장 적임자가 바로 노신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노신영을 안기부장에 앉히는 공작이 시작된 1982년 5월 말은 박세직이 한전 부사장에 임명된 지 두 달 만에 ‘태평양원자력회의 준비위원장’이 되는 때였다. 한전 부사장에 임명되기 전에는 동력자원부 자문위원 등의 위장직함을 달고 다녔다. 그렇게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박세직에게 새 임무가 부여되면서 그를 안기부 내 어떤 자리(안기부장 특보 또는 차장보)에 앉히고 곧바로 노신영을 안기부장에 임명했을 것이다.

‘1983 버마 사건’이 미국의 직간접적인 도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는 점, 특히 한국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버마와 한국 양쪽에서 수상한 일들이 몇 차례나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로 미뤄, 박세직의 예편이나 노신영의 안기부장 발령은 모두 ‘미국 측’의 밀지(密旨)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한다.

그 밀지의 발신자 또는 메신저가 바로 부시였다고 본다. 유학성 안기부장이 비밀리에 미국에 가(1981년 5월 말) 부시를 만나고 온 지 두 달여 뒤 박세직 수도경비사령관의 강제예편 쇼가 연출됐고(앞글 7편), 부시가 한국에 와 전두환과 수상한 밀담을 나눈 지(1982년 4월 말) 한 달 뒤 노신영을 안기부장으로 보내는 해괴한 인사가 단행된 것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대개는 이런 일을 우연이라고 간단히 넘기지만, ‘1983 버마 사건’은 그런 우연이 수도 없이 얽히고설킨 사건이다. 그러면 그렇게 교묘하게 얽힌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치밀하게 짜인 기획인 것이다.

노신영 안기부장이 ‘허수아비’였다는 사실은 그의 후임으로 장세동이 안기부장이 되고(1985년 2월, 노신영은 총리로 영전), 이때 안기부장 특보로 특채된 박철언의 회고록『바른역사를 위한 증언-1』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박철언 책 116 노신영 칭찬)

위 문장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 “노 부장은 국제외교 관계에 밝아 제2차장 소관은 보고를 안 들어도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국내 문제에만 진력하고 있다더라”는 말이다. ‘제2차장’은 바로 박세직이고, ‘제2차장 소관’이란 바로 박세직이 비밀리에 벌이는 어떤 일일 것임은 어렵잖게 추리할 수 있다. 노신영은 박세직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보고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노태우의 처조카인 박 씨는 당시 정무비서관이었고 전두환에게 모든 일에 대해 직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최측근이었다. 그는 전통이 노신영 부장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노 부장이 열심히 해서 문제 종교 대책에는 큰 도움이 되나, 그 아래 간부 요원도 열심히 하고 있을텐데 위에서 너무 직접 나서면 아랫사람의 사기와 활동 범위에 영향이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완곡하게 언급했다”(116쪽)고 썼다. 안기부장이 제 할 일 못 하고 별 씨잘 데 없는 일이나 하고 다니니 정작 그런 일을 해야 할 아랫것들이 할 일이 없다는 직언이었다.(*당시 전두환이 박철언 앞에서 노신영을 칭찬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글 7편 후기(P.S.) 참조)

외무장관 노신영을 안기부장으로 보냈으니 후속 인사가 따라야 했다. 노신영을 안기부장으로 보내면서 동시에 청와대 비서실장 이범석을 외무장관에 임명했고(6월 2일), 이범석이 앉았던 자리에는 함병춘 연세대 교수를 앉혔다(6월 7일). 함병춘은 1981년 11월, 부시의 지령에 따라 유학성 안기부장이 추진한 ‘모(스크바) 프로젝트’의 주인공이었다(앞글 9편). 함병춘을 안기부 공작에 끌어들일 때부터 그를 버마 공작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이범석은 외무장관에 임명된 지 20여 일 뒤 미국에 가야 했다.
 
[【워싱턴=안종익 특파원】헤이그 국무장관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 중인 이범석 외무장관은 29일 낮 미 중앙정보국 본부에서 케이시 국장과 오찬 ... 이 장관은 북한 문제 전문가 자격으로 케이시 국장이 오찬에 초대한 것 ... 앞서 이 장관은 칼루치 미 국방차관을 방문, 한-미 양국의 군사 유대 강화의 필요성을 재확인 ... 이 장관은 이날 오후 2시 30분(현지시각) 백악관에서 부시 부통령과 면담 ... 이어 오후 3시 30분 국무성에서 헤이그 장관과 회담한다. 헤이그 장관은 그의 사표 수리에도 불구, 후임 슐츠 씨가 상원 인준 후 취임할 때까지 국무장관 직을 수행케 되어 있다. 헤이그 장관과의 회담에서는 주로 의례적인 얘기가 오갈 것이며, 실질적인 문제들은 30일 있을 이 장관과 월트 스토슬 국무차관 간의 오찬 회담에서 토의될 것이라고 ... ] (<조선일보> 1982.6.30)

이범석의 방미는 헤이그 국무장관의 초청이었는데 헤이그는 이미 사표를 낸 상태였다? 이미 사표를 낸 헤이그 국무장관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 부통령 부시와 CIA 국장(윌리엄 케이시)을 만나고 왔다면 그를 부른 것은 부시나 CIA 국장이다. 1981년 5월 안기부장과 대공수사국장, 해외공작국장 등 안기부 수뇌부를 CIA 본부로 불러들였던 자들이 이번에는 이범석 외무장관을 불러들인 것이다.

이범석이 ‘북한 문제 전문가’여서 저들이 그를 불렀을까. 미국에는 그만한 ‘북한 문제 전문가’가 없어서? 이범석은 앞글(5편)에서 살펴봤듯이 그냥 ‘북한 문제 전문가’가 아니었다. 북녘에 친지들을 두고 있는 그의 대북관은 매우 선진적이었고 언행은 때로 파격적이었다. 대북 적대시 정책으로 일관해야 하는 전두환 정권과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못 마땅했을 것이다. 그래서 통일원장관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고 전두환의 ‘따까리’(청와대 비서실장)로 불려 들어갔던 것이다(1982년 1월. 그의 후임에 손재식(孫在植) 내무차관(박정희 시절 충북.경기지사)을 앉힌 것은 통일원장관이란 자리를 유명무실화하려는 의도였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미국이 이범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당시 주한미국대사 워커의 말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워커는 버마행 비행기의 항로를 바꾸는 등 ‘1983 버마 공작’에 부분적으로 관여했다.
 

( 허영섭 책 491쪽)
( 허영섭 책 492쪽)

이 말은 이범석이 매사에 직설적이어서 전두환 정권을 감싸줘야 하는 미국으로서도 못마땅했고 껄끄러웠다는 말이다. 미국은 광주에서의 학살 만행을 자행한 전두환의 원죄를 씻어주고, 그럼으로써 자신도 하루빨리 그 학살을 방조했다는 오명을 떨쳐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 1981년부터 내리 3년 동안 전두환네로 하여금 비동맹 순방 외교에 나서도록 했고, 그 때마다 ‘북괴의 전두환 시해 음모’를 조작했다.

이미 필리핀에서 한 차례 ‘전두환 시해 모의 작전’(1차 리허설)을 벌인 뒤, 2차 리허설을 앞둔 시점에 이범석을 외무장관에 임명됐고 한 달 뒤 그가 미국으로 불려갔다면, 그것은 이범석이 북한 문제 전문가여서가 아니라, 그를 버마 공작에 활용할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버마 공작’은 청와대와 안기부 비선 조직에 의해 기획됐고 추진되지만 공식 주무부서는 외무부다. 그러면 외무장관 이범석을 이 공작에 끌어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공작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범석은 그런 공작에 적당히 눈 감고 가담할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어떤 낌새라도 챈다면 저항하고 반발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이 공작은 이범석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매우 은밀하게, 또 그가 어떤 낌새를 채더라도 저항하거나 반발하지 못하도록 윗선(청와대)의 일방통행식 지휘 통솔 아래 강압적으로 진행돼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됐다.

앞글(5편)에서 봤듯이, 이범석이 버마에 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것은 어쩌면 저들의 은밀한 공작의 낌새를 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버마에 가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이범석을 억지로 데려가 죽게 만들어 놓고, 마치 북측이 그를 미워했던 것처럼, 그래서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북측 인사들이 환호한 것처럼, 훗날 안기부가(그리고 미국이) 거짓말을 조작해 유포시킨 정황을 앞에서 살펴봤다(앞글 4편).

P.S.

위에서 부시가 유병현 주미한국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러 자신의 방한 일정을 확인해 준 것을  ‘비선’이 움직이는 모양새라고 지적했다. 물론 유병현이 전두환의 비선인지 부시의 비선인지는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보면 충분히 비선으로 활용될 수 있는 인물이다.

유 씨는 그 이름도 유명한 ‘7특’(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 특별 7기) 출신이다. 정부 수립 (1948.8.15)후 장교 수를 늘리기 위한 비상조치로 정부 수립 선포 이틀 뒤인 1948년 8월 17일(정규 7기 입교 1주일 뒤) ‘특별 입교한 7기’ 246명 중 한 명. 입교한 지 고작 2개월 뒤인 10월12일(정규 7기보다 1주일 먼저) 졸업하는 특전을 누렸다. 이 ‘7특’은 이미 군대에 갔다 온 뒤 재입교한 이들과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다수 포함된 점 등으로 미뤄 누군가 이들에게 ‘정부 수립 후 첫 입교 첫 임관’의 영예를 안겨주고 훗날 ‘귀하게’ 쓰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유 씨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뒤 - 아마도 미군 정보 계통에서 - 휴전 이듬해인 1954년 미 육군 참모대학에 유학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차지철 등이 1959년에 미국 군사유학을 떠나기 무려 5년 전에 먼저 미국 물을 먹은 미 군사 유학 1세대였다. 그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미국을 오갔고 1961년 1월 별을 달았다.

4개월 뒤 미국의 방조 아래 박정희 쿠데타가 성공한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농림위원)과 농림장관(1963.6.25 임명)을 지내며, ‘농업 진흥’ 및 ‘영세민 구호’ 등 박정희 정권 공식 출범 전까지 핵심적 역할을 했다. 특히 한국 경제의 목줄을 쥐고 있는 미 USOM(United States Operation Mission. ‘미국대외원조처’라고 번역하지만 ‘미국작전국’이 맞는다) 및 ‘유엔특별기금’ 등의 한국 측 파트너가 바로 유병현이었다.

(사진 좌: 조선일보 1962.12.15) / (사진 중앙: 조선일보 1963.6.26) / (사진 우: 조선일보 1963.8.7)

박정희가 양복으로 갈아입고 대통령이 된 뒤(1963.11) 유 씨는 군에 복귀했고 1966년 8월부터 1년 1개월 동안 파월 맹호부대장으로 베트남에 가 있었다. 1967년 10월 합참 작전기획국장에 임명됐고 군사정전위원회 한국 대표를 겸해 판문점 북미 회담에도 배석하는 등 미군 주변을 맴돌다 합참 본부장(대간첩작전본부장 겸임)이 돼 한미연합사 창설 멤버가 됐다(1978).

1979년 10.26 사태 당시에는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 전두환의 12.12 쿠데타 때는 합참의장으로 한미 간 막후 채널로 활약했다. 전두환의 5.18 광주대학살 때도 전두환의 군부와 미군(미국) 간 연락을 맡았다. 이어 대장으로 전역한 뒤 곧바로 주미대사로 미국에 가 미국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던 레이건이 전두환을 초청하는 데 또 막후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부시가 그를 따로 불러 자신의 방한 일정을 통보했다면 이 또한 막후 공작 아니겠나. (17편으로 계속)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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