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2
11월 26일 방송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하여
(WWW.SURPRISE.OR.KR / 강진욱 / 2020-12-03)
2. 한 교수에게 역사란?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말이 있다. 그에 빗대면 사건은 ‘역사적 맥락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맥락’이란 사건이 일어난 때와 장소 즉 시공간의 선후 및 주변의 정세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때의 선후 및 그 주변은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듯 엮여 있다, 어떤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얽힌 시공간을 통시적이고 공시적으로 세밀히 관찰해야 한다. 1987년 11월 29일 일어난 KAL 858기 사건을 논하면서 시야를 이 사건 하나 또는 1987년에만 고정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 사건의 진상을 논하려면, 최소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는 때부터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까지,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개된 남북관계와 한미관계 및 북미관계, 나아가 미국의 동북아전략 및 한미일의 대북 적대동맹체의 동태(動態)를 면밀히 교차 검증해야 한다.
그런데 한 교수는 이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을 총체적으로 살피지 않고, 극한의 남북 적대라는 고정된 틀에 끼워 맞춰 사건의 내막을 재단하려 했다. 그가 1시간 37분 짜리 영상에서 두 번 언급한 “남북 간 체제 경쟁”이란 말이 그것이다. 남북이 체제 경쟁을 하던 때 “북한이 남한 정권을 욕보이기 위해” 남한 주민 115명을 상대로 테러를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그는 북한이 KAL 사건을 저질러 무슨 득이 됐냐는 시청자들의 댓글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OOOO님 ... ‘무슨 이익을 봤을까’ ... 하지만 ... 안기(부) ... 전두환 정권이 흉악한 정권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 몇 십 년을 끌고 왔잖아요. 그 점이 북쪽의 정보기관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 득이 된다고 봤을 겁니다.]
[OOO님 ... 여전히 .. 북한이 무슨 이익이 있을까 의심하시는데 ... 어 ..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쪽 정권을 욕하고 욕보이는 거 ... 는 ... 이게 ... 그 체제경쟁이던 시절에 .. 의미가 있죠 .. (남한의) 우익들은 아직도 북한을 욕보일려고 ... 그렇게 하고 있고 .. ]
질문은 매우 현실적이었지만 한 교수의 대답은 초현실적이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저질러 북한이 무슨 덕을 봤냐는 질문에, 남한 정권에게 흉악한 이미지를 씌웠고 그래서 덕을 봤다고 둘러댄다. 되받아치는 능란한 화술은 칭찬할 만하나 그저 말장난일 뿐이다.
우선 ‘남북이 체제 경쟁을 하는 때 북한이 KAL 사건을 일으켜 남한을 욕보였다’고 말하려면 1987년 또는 1980년대에 남북이 상대를 궤멸시키려 서로를 무모하게 공격했다는 근거를 대야 한다. 특히 북측이 남측을 상대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려 한 정황과 그런 짓을 벌여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한 교수는 이런 근거를 대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자신만의 편견이기에 그 근거를 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단지 아웅 산 묘소 테러와 KAL 사건을 북한이 저질렀다는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 두 사건을 저질렀으니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것이고, 그러니 당시는 남북이 체제경쟁을 하던 때였다고!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듯 뱅뱅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해괴한 화술!
남과 북이 극한의 적대관계였던 때가 있었다. 남과 북이 각각 ‘북진통일’과 ‘남조선 해방’을 외치던 때, 해방 후 미국과 이승만 세력이 중도파 지도자들을 마구 살해하며 남한 단독정권 수립을 획책할 때(1947.8년)부터 한국전쟁 시기(1953년 휴전)까지 약 5∼6년 간이 그랬다. 한 교수는 이 시기의 정세가 1980년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한 교수는 정녕 1960년대와 70년대 20년 동안 남북 간, 북미 간에 또 동북아시아 전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이 땅 남녘이 1980년대를 맞이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1980년대는 시종일관 한·미·일 3국이 북한을 궤멸시키려는 듯 전방위적 봉쇄와 압박 전략을 구사하고 위험천만한 군사·외교적 전술을 펼친 시기다. 1976년 시작한 팀스피리트 훈련의 강도가 날로 높아져 1983년에는 한미 양국의 20만 대병력이 동원돼 거의 석 달간 전시준비태세에 준하는 훈련을 벌이며 북측을 괴롭혔다.
(1983. 2. 2. 조선일보) (1983. 3. 25. 경향신문)
북측도 대응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국제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형제국이나 다름없는 버마(미얀마)를 국빈 방문하는 남한 대통령(전두환)을 살해하는 따위의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을 했겠나? 어떻게든 ‘남북이 함께 여는 올림픽’을 만들겠다며 IOC를 찾아가고, 몇 개 종목이라도 평양에서 열게 해 달라고 남북 체육회담에 매달리던 북측이 “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KAL기를 폭파했다”고? 한 교수는 더 이상 남북 관련 문제를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은지는 모르지만, 도무지 역사적 맥락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이 남한 주민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테러를 저질러 득을 봤다는 그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궤변인지 보자. 앞에서도 밝혔듯이, 북한은 미국과 전두환 정권이 조작한 ‘버마에서의 1차 테러’(아웅 산 묘소 테러, 1983.10.9)로 인해 형제국이나 다름없는 버마로부터 ‘절교’(외교관계 단절)를 당한 것을 비롯, 국제사회에서 적잖은 외교적 타격을 입었다. 특히 미국을 추종하는 나라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1983.11.5 경향신문)
또 미국은 이 사건을 기화로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부에 올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4년 뒤 역시 전두환 정권과 미국이 합작했을 ‘버마에서의 2차 테러’(버마 안다만 해역에서 KAL기 실종.폭파, 1987.11.29)가 일어났고, 결국 북한은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부에 올려졌다. 이후 오늘날까지 극심한 제재를 받고 있음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북한이 득을 봤다고? 돌았나?
30여 년 동안 “전두환 정권이 흉악한 정권이라는 누명을 썻다”는 말은 더 터무니없다. 전두환 정권이 그 누명 때문에 힘들어 했나? 억울해 했나? 전혀 아니었다. 광주에서의 학살 만행(5.18) 이후 3년 내내 ‘학살자’와 ‘학살 방조자’라는 지탄을 받던 전두환 정권과 미국은 1983년 아웅 산 묘소 테러 이후 비로소 ‘정국 안정’과 ‘총화 단결’의 기치 아래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북한이 전두환 정권과 미국에게 은혜와 은총을 내렸단 말인가?
(1983.11.12 매일경제신문) (1983.11.13 조선일보) (1983.11.14 경향신문)
4년 뒤 일어난 KAL 사건은, 양 김 씨를 충동질해 둘 다 대선 후보로 나서도록 부추긴 미국의 분열 책동과 더불어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정권의 2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북쪽의 정보기관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득이 된다고 봤을 겁니다”? ‘득이 있다’도 아니고 ‘득이 있다고 봤을 것이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쪽 정권을 욕보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말은 ‘북한의 테러’로 규정된 사건들을 전두환 정권과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논박하는 ‘우매한’ 사람들로 인해 남한 정부가 무려 30년 넘게 욕을 먹고 있는 것이 바로 북한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남북을 이간질하고 남쪽 주민들에게 대북 적대감을 조장하려던 전두환 패거리, 과거 김형욱의 중앙정보부 패거리나 할 소리다. 이쯤 되면 한 교수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3편으로 계속)
강진욱 <1983 버마>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