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과 사상
(WWW.SURPRISE.OR.KR / 탁류 / 2020-03-29)

조국 해방과 통일의 길은 왜 이리 느린가? 왜 대서양 너머로 거대 로켓이 날아오르지 않는가? 왜 조선은 행동에 나서지 않는가? 이미 기울어진 국면이라면 왜 아메리카는 한반도에서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가? 과연 살아서 조국의 해방을 볼 수나 있겠는가? 수많은 조바심들이 있다. 이 글은 그런 초조한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1945년 미국은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 중 하나는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졌고 사흘 뒤 나가사키에 다른 하나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두 도시에서 20만 명 이상이 직접, 간접적 피해로 인해 사망했다. 이 미증유의 대량 학살 무기를 경험한 일본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총으로 무장한 백인들의 공격을 받은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있었다.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은 우금치 고개의 동학농민군들이 있었다. 인디언들의 손엔 도끼와 화살이 들려져 있었고, 동학농민군들의 손엔 죽창이 들려져 있었다. 인간은 총과 기관총과 대포를 향해 맨주먹으로 달려들 수 있다. 총알과 대포알은 때로는 맨주먹의 인간을 비껴가는 자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원자폭탄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과학의 세계를 가진 인간들에게 신념과 사상으로 무장한 인간들이 꽃잎처럼 쓰러져갔다.

과학과 기술에 기반을 둔 무력의 시대가 등장했다. 1945년 인류의 전쟁사에서 신념과 동포애와 살아남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핵폭탄이 전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원폭이 투하된 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낸 것은 2개의 원자폭탄이었다. 지휘관의 세밀한 작전계획과 지략도, 정밀한 병력의 배치도, 작전지역의 지형과 방어태세에 대한 분석 같은 과거의 전쟁이 요구하던 조건들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원자의 세계를 이해한 과학자들이었다.

우리가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아메리카 합중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원자폭탄을 제조하게 될 아메리카의 과학자들은 “우라늄이 현존하는 어떤 폭탄보다도 더 강력한 폭발력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이 보고를 기초로 루즈벨트는 1942년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맨하탄 프로젝트를 지시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든 ‘little boy’와 ‘fat man’이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은 군인과 시민들, 어른과 아이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고 가장 많은 살상 효과를 내는 지상 55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우라늄235의 원자핵을 분열하면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방출되는지를 관찰하고 이해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학자들만큼 원자의 세계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전쟁에 대한 권한을 가진 아메리카의 대통령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윤리와 철학의 문제다. <과학기술의 결과물, 즉, 우라늄235의 핵분열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과학 기술은 그 자체로 유해하지 않다.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과학 기술을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사상과 철학과 가치관의 문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말살한 백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백인들의 행동의 기저에는 반드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어떤 가치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타 민족을 말살하는데 어떤 가치관이 필요하겠는가? 없다. 그래서 아메리카는 인디언들을 도륙했을 때와 같은 저급한 가치관으로 무차별적인 대량학살을 반복했다. 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백인들은 과학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세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상과 철학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너무도 낙후된 민족이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선 세계를 이해하는 눈이 없었다. 원자폭탄은 철학이 결여된 인간이 어떻게 과학을 악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가 서양의 문물을 만나기 전 조선 후기까지의 사상의 흐름을 살펴보자면 우리 민족은 그 당시 이미 보편적인 가치를 생활 속에 이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다져놓은 사상의 강국이었다. 대륙을 거쳐 유입된 어떤 학문이라도 우리의 토양과 문화에 맞게 수용하고 발전시켰으며 심지어 중국이 근대화의 과정을 겪으며 견실하게 유지되어오던 사상이 피폐해져갈 때에도 조선은 한층 발전된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꽃피우고 있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는 서원과 서당과 향약으로 조선에서 유교적 질서를 구현하고, 성리학의 관념적 형식에서 벗어나 실학이 조선의 토양위에서 싹을 움틔우고 있었다.

직파법의 도입으로 인한 쌀 생산량 증가와 그에 따라 요구되는 늘어난 노동력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한 두레와 품앗이의 예를 보자. 너의 논과 나의 논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일을 하고 너의 논의 크기와 나의 논의 크기를 비교하거나 계산하지 않는 공동체 정신을 일구어낸 사회가 조선이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지금 농촌에서 이게 가능할 것인가? 내 논의 크기는 10마지기, 내 이웃의 논은 2마지기다. 아마도 내 이웃은 나에게 8마지기 분의 노동력을 추가로 제공한데 대한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이런 사회에 두레와 품앗이는 뿌리내리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판알을 튕기기 전에 먼저 손을 내미는 사회가 가능하려면 구성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공기와 같은 가치관이 공유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교하고 따지면 두레와 품앗이는 유지될 수 없다. 그 선결 조건이 그 사회 전체의 성숙한 가치와 사상이다. 조선 후기에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진보한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도와 예와 의를 가지고 사람을 대했다. 부모가 죽어 땅속에 묻히더라도 보이지 않는 부모의 정신세계에 대한 존경과 예를 보이는 민족이었다. 우리 민족은 야만적 행위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위배되며 하늘의 이치에 맞게 삶을 살아가려는 구도적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이 그 당시 과학 기술의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걸어온 20세기는 과학의 세계에 어두웠던 빈자리를 야만적 사상을 가진 서양의 과학 기술이 채우면서 만들어낸 시간이었다. 그것은 파괴적인 시간이었고,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해체되는 시간이었다. 이제 21세기의 첫 10년이 지나갔다. 조선의 힘과 아메리카의 힘은 무력 대 무력으로 충돌을 맞이할 것인가? 나는 조선의 사상이 서양의 야만적 사상을 흉내 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조선의 무력은 서양의 무력과 달리 철저히 우월한 우리 민족의 사상과 철학의 통제 아래서 작동할 것이다. 그 통제력은 무력이 통제력을 벗어나 삐죽 튀어나오지 않게 하는 힘이다. 창이 날카롭게 솟아오르면 손에 빈자리가 생긴다.

왜 그런가? 모든 전쟁과 불행은 인간의 사상적 공백이 불러들인 실수다. 실수하지 않는 촘촘한 사상적 완성은 창을 던져 내 손을 공백으로 만들지 않는다. 단단히 창을 쥔 손과 냉철한 머리를 가진 사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때 시간은 아메리카의 편이 아니다. 견디는 자는 굴복시키고 군림하지 않는다. 다만 패배하지 않을 뿐이다. 이 통제력을 유지하는 힘, 바로 그 힘이 결국 아메리카의 내부 붕괴를 촉진시킬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서방 세계는 조선의 사상을 이해하고 들여다보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조선의 힘은 결코 무력에 있지 않다. 조선의 힘의 원천은 가치와 사상이다. 조선의 실학 사상을 엿보면 거기에 국방-경제 병진노선이 보인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을 갖춘 미사일이 있어도 그 미사일은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다. 해답은 먼 곳에 있지 않다.